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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최명길에대해서 ~
최명길의 관직경력하고요 ~

격동기(혼란기)에 처란 상황하고 요

자기가 그상황이였다면 어떤 결정고 ㅏ 어떤행동을 했는지좀..

알려주세요 !!

꾝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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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sam5****
작성일2004.05.03 조회수 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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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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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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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국내가수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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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약

전주 최씨로 자는 자겸(子謙) , 호는 지천(泰川), 창랑(滄浪)입니다.

지천 최명길은 이항복의 문하로, 160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2.관직생활

증광문과 급제 이후 성균관전적이 되었습니다.

그후 1614년 (광해군 6년) 파직을 당했는데요...

인 조반정에 가담해 1등 공신으로 완성부원군으로 책봉을 받았습니다...
인조 5년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화친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다 좌천되어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구요, 다시 우참찬, 부제학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와 양

관 대제학을 지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도 역시 주화론을 펴서 선비들의 지탄을 받아 배신

자로 낙인찍혀 무시되다 조선후기 그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간파한 선비들에의해서 재평

가를 받기 시작합니다.

전쟁후에는 사신으로 가서 명정벌을 위한 무리한 원병요구를 막았고요, 그후에도 호조

판서, 영의정등의 실무적인 관직을 주로 맡았습니다.

3.격동기의 상황과 최명길-김상헌의 대립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끈질긴가가 바로 이 병자호란에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산성, 그것도 한겨울의 산성은 식량등을 자급자족할만한 곳이 못되는데도 불구하고 45

일을 버틴것은 일단 대단한 일이라고 봐야 겠지요.

최명길은 `화친을 먼저 하고 나중에 국력을 길러 청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구

요, 숙명의 라이벌인 청음 김상헌은 `먼저 싸워보고 화친을 하든말든 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상헌을 지지했는데요.. 소인배라는 누명을 써 가면서 소신껏 행동

했던 최명길이야 말로 진정한 장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실리적인 최명길의 행동을 지지하고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출처다음 백과사전 검색 결과- 최명길, 네이버 오픈사전- 역사의 라이벌 1.김상헌 VS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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