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상헌과 최명길 동시대의 사람이며 라이벌이었는가?
(서로 대면, 충돌한 적이 있어야함)
2. 시대적 배경과 상황(요점만 간결히)
3. 김상헌과 최명길의 주장, 목적, 방향, 방법 등
※ 백과사전 및 다른 사람의 답변을 복사해오지 말 것.
만약 그럴경우 아무리 내용 많아도 절대 채택 안함.
백과사전이라도 자신이 요약해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확하게 하면 됨.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다른 답변 없다고 아무렇게나 써서 채택되길 바라는 분들께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럴 경우 어차피 내공 잃는거, 끝까지 채택 안하겠습니다.
반면 성실히 답변해주신 분께는 감사내공까지 드리겠습니다.
- 질문수48
- 채택률100.0%
- 마감률100.0%
1. 김상헌과 최명길 동시대의 사람이며 라이벌이었는가?
(서로 대면, 충돌한 적이 있어야함)
네.. 라이벌입니다...명나라와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과 현실을 중시하자는 최명길과의 대립이 있었으므로 이 둘은 정치적인 관계에 있어서 라이벌입니다...
2. 시대적 배경과 상황(요점만 간결히)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전쟁의 피해를 씻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중국대륙에서는 후금의 세력이 커져 명나라가 후금에게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이문제를 두고 김상헌과 최명길이 앞에 언급한 거와 같이 대립 한 거 구요....
3. 김상헌과 최명길의 주장, 목적, 방향, 방법 등
1)주장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헌은 국가의 자존심을 위해 끝까지 청나라에 대항하자고 주장하고 최명길은 현실을 인정하자며 이 나라 백성을 살리는게 우선이라며 청나라와 협정을 맺자고 주장합니다
2)목적
김상헌은 청은 명나라의 원수라고 하며 부모의 원수랑 친해지는 것은 불효라 하여 국가의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끝까지 싸우는 걸 주장하고 최명길은 국가의 안정을 추구하는게 목적이었죠.........
3)방법, 방향
전쟁이 터지자 최명길은 주화론을 주장하고 김상헌은 주전론을 주장합니다...
전자는 화해하며 넘어가지는 것이고 후자는 계속 싸우자는 거죠...
상황이 불리해지자 최명길은 청나라에게 항복문서를 작성하여 준비하지만
김상헌은 그런 최명길을 비판하며 항복문서를 찢고 대성통곡 했다고 합니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할려 했으나 실패하고 그후에 계속 치욕을 씻고 명나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정벌을 주장합니다.
최명길은 이후 영의정에 올라 대외정책의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지만 처음에는 나라를 팔아먹은자라고 선비의 비난을 받았으나 후대에는 나라를 위해 대의를 저버린 소인배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끝끝내 화평을 주장하며 나라를 사랑했다는 애국자라는 칭송을 받게 됩니다....
2006.11.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안동
호 : 청음 ·석실산인
별칭 : 자 숙도
활동분야 : 정치, 행정
주요저서 : 《야인담록》 《독례수초》 《청음집》
김상헌의 대하여
본관 안동. 자 숙도(叔度). 호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어려서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하였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시강원사서(司書)·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 선조 말년에는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모함할 때 같이 연루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의 외직으로 전보되었다.
광해군 대에도 북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그다지 뚜렷한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격렬히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폐모론(廢母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데다 광해군 말년에는 연이어 부모 상을 맞아 물러나 있어야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나가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로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은 5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1638년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면서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에 분연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차례 은퇴의 뜻을 밝히면서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야인담록(野人談錄)》 《독례수초(讀禮隨)》 《남사록(南錄)》 등이 있고, 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이 간행되었다
최명길의대하여
최명길 신도비
최명길 [ 崔鳴吉 ] (1586∼1647)
최명길! 그는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기 개인의 치욕을 참았던 사람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조 인조 때 청나라가 쳐들어와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수치스럽더라도 항복을 하여 실리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항복문서를 작성해서 바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평화주의의 선구자로 지금까지 그 이름이 빛나고 있다.
그는 1586년(선조 19)에 금천에서 태어났다. 비록 충북에서 출생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묘소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어 충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영총부사를 지낸 사람으로, 그가 아직 7세였을 때, 열심히 책을 읽으며 가르치기를
"나라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성인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고 하여, 이를 가슴에 새겨 주었다. 8세 때에는 부모 앞에서
"오늘은 증자가 되고 내일은 안자가 되며, 또 그 다음 날엔 공자가 되리라."
하여 부모를 놀라게 했다는 말도 전한다.
그는 당시 대학자인 이항복과 신흠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후에 크게 이름을 낸 이시백, 장유 등도 같은 문하생이었다. 그는 스승인 신흠의 사랑을 특히 많이 받았다. 그가 1605년(선조38) 20세로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 해 증광문과에 급제했을 때 신흠은 승정원의 높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보아 아시는 바와 같이 최명길은 몸이 약하긴 해도 정신만은 누구보다도 맑고 깨끗합니다. 장래에 틀림없이 큰일을 하고 또 존경을 받게 될 사람입니다."
라고 칭찬을 하면서 특별히 추천까지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승무원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었는데, 이때 반대파인 북인의 이산해, 유영경, 정충민 등이 정권을 잡는 바람에 기를 펴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조가 서인인 김제남의 둘째딸(인목대비)을 둘째 왕비로 맞고 영창대군까지 낳으니 다시 득세하여 공조, 병조좌랑을 지내고, 선조가 죽은 후 1614년(광해군 4)에 27세로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런데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 폐모사건이 일어났다.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 자기의 외손자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한다고 반대파에서 거짓으로 꾸며서 광해군이 김제남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으로 쫓아버리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보낸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폐모(비)계획의 기밀을 최명길이 누설하였다고 탄핵당하여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 가평으로 들어가서 이시백, 장유, 조익 등과 어울리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다가 1623년(광해군 15)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폐모사건 등 북인 및 광해군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인세력인 이귀, 김자점, 김유, 이괄 등이 이들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세워 인조를 옹위한 정변이다. 여기에 최명길도 가담하여 인조가 등극하자 정사공신 1등공신에 올라 완성군에 봉해지고 이조참판과 비변사제조를 겸했다.
그런데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에서 자기보다 공이 낮은 최명길은 1등공신에 오르고 자기는 2등공신이 된 데 대한 불만에서였다. 이 때 최명길은 총독부사라는 직위로 직접 싸움에 나아가 이괄의 군대를 무찔러 평정함으로써 1등공신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로써 나라 안이 안정되자 그는 백성들의 호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군역의 의무를 평등하게 하자는 호패법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을 뿐 아니라 호패청 당상관에 올라 이를 직접 관장하였다.
그리고 3년 후,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을 맞는다. 광해군 때는 후금(후의 청나라)을 배척하지 않다가 인조가 왕이 되면서 후금을 멀리하고 명나라를 가까이 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후금의 태종이 명나라를 치기전에 조선을 먼저 정복하고자 하여 일어난 싸움이다. 이 때 인조와 대신들이 후금의 강력한 병력에 쫓겨 강화로 피신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대신들 간에는 화친이냐 싸움이냐의 의견이 맞서게 되었는데, 대세로 보아 화친이 불가피함을 깨달은 그는 싸우자는 쪽의 극렬한 반대에도 무릅쓰고 왕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마침내 형제의 동맹을 맺었다. 이것은 오직 국가의 장래와 평화를 사랑하는 충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많은 지탄을 받았다.
그 후 그는 경기관찰사, 우참찬, 부제학, 예조판서 등을 거쳐 이조판서에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을 자신들에게 열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조선은 화해를 깨고 후금을 배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화해를 지킬 것을 내세웠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그의 염려대로 1636년(인조 14) 후금의 태종은 국명을 '청'이라 고치고, 이제는 형제관계가 아니라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하며 쳐들어왔다. 이것이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중과부적임을 느낀 조정에서는 인조의 두 아들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왕족들을 강화로 보내고 인조 및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45여 일을 포위당해 있으니 식량은 떨어져 가고 병력은 지쳤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신들 간에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가 나섰다. 아무 대책없이 명분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나라의 장래와 백성을 위해서는 항복할 수 밖에 없음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항복문을 작성했다. 이른 본, 끝까지 싸움을 주장하는 김상헌이 그에게 달려들어 항복문을 빼앗고 찢어버리며 통곡했다. 이것을 보고 그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찢어진 항복문을 주우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 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된다."
하며 침통해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만한 일이다.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해 겨울에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고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는 동안 청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세폐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위한 징병요구를 막았다.
그런데 1642년(인조 20)에 변고가 일어났다. 그것은 청나라에 항복한 홍승주라는 명나라 사람에 의해서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청나라에 들어가 임금과 다른 신하들은 모르는 일이며 자신과 임경업이 사사로이 명나라에 사람을 보낸 일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거기서 병자호란 때 항복을 반대하여 먼저 잡혀온 김상헌과 만났다. 같이 옥살이를 타국에서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다를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했다. 이때 주고받은 시가 전한다.
조용히 찾아보니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반가웁고나.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노라.
이에 최명길이 받았다.
그대 마음은 돌같이 끝내 풀릴 줄 모르건만,
내 마음은 문고리같아 둥글게 돌아갈 줄만 아노라.
마침내 그들은 1645년(인조 23) 3월에 풀려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이제 늙고 약해진 몸으로 쉬려했으나 인조가 또부원군 겸 어영제조로 임명했는데 그 2년후 병으로 눕게 되었다. 임금이 직접 문병을 갔으나 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1647년(인조 25) 5월 17일, 62세였다.
저서로 그의 호를 딴 「지천집」19권과 「지천주차」가 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2006.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