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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동김씨 분파에 대하여
비공개 조회수 1,149 작성일2020.10.08
안동김씨 입니다
조부 는 김x한
부는 김x동
저는 김x현 입니다
신안동 김씨인거 까지는 알겠습니다만
제 분파를 찾으려면 할아버지나 아버지께 직접 묻는방법 외에는 없는것입니까? 그리고 안동김씨대종종인가 거기에 검색 기능이 있길래 제이름을 검색해보니 나오지 않는데 따로 가입을 해야 나오는것인지 아니면 구안동김씨 사이트인것인지 궁금합니다 제 조상을 더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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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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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안동김씨 분파에 대하여

안동김씨 입니다

조부 는 김x한

부는 김x동

저는 김x현 입니다

신안동 김씨인거 까지는 알겠습니다만

제 분파를 찾으려면 할아버지나 아버지께 직접 묻는방법 외에는 없는것입니까? 그리고 안동김씨대종종인가 거기에 검색 기능이 있길래 제이름을 검색해보니 나오지 않는데 따로 가입을 해야 나오는것인지 아니면 구안동김씨 사이트인것인지 궁금합니다 제 조상을 더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답변 : 님은 신 안동 김씨 이시군요.

신 안동 김씨는 각파가 통합된 대동 항렬표를 쓰고 있어 파는 찾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즉 족보에서는 숫자가 적은 것이 웃 대(代)이고, 숫자가 많은 것이 아랫 세대(世代)입니다.

시조 1세이시고, 님은 29세이시니 그만큼 차이가 많이 나시고, 님의 자식과는 1세대 차이가 나는 30세손입니다.

조부님 : 27세 O한(漢)자 돌림이시고,

부친님 : 28세 O동(東)자 돌림이시며,

님은 : 29세손 O현(顯)자 돌림입니다.

님의 신 안동 김씨 뼈대 있는 왕가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고 꼭 찾으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 한문을 쓰는 이유는 한문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신 안동 김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에 대(對)하여

1.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시조(始祖) : 김선평(金宣平)

2.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유래(由來) :

원 비조(鼻祖) 김알지(金閼智)의 후손(後孫)이며 경순왕(敬順王)의 후손(後孫)인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시조(始祖)는 김선평(金宣平) 36세 때 고창군주(古昌郡主)로 군병(郡兵)을 일으켜,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견훤(甄萱)을 병산(甁山)에서 대파(大破), 그 훈공(勳功)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아부(太師亞父)에 올랐다.

'태사공(太師公)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보면, 그는 신라(新羅)말에 고창성주(古昌城主)가 되어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때 공(公)이 권행(權幸)·장길(張吉) 등(等)과 더불어 군(郡)을 들어 귀부(歸附), 병산(甁山)의 승첩(勝捷)을 있게 했다고 하였다.

그 공(功)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號)를 주고 고창(古昌)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昇格)시켰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안동(安東)으로 삼게 되었다.

안동(安東)(신(新))김씨(金氏)의 선계(先系)는 신라 김씨(新羅 金氏) 곧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라고 한다. 그러나 김알지계(金閼智系)인지 혹(惑)은 경순왕계(敬順王系)인지는 상고(詳考)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라 김씨 선원보(新羅 金氏 璿源譜)'에서도 그의 상계(上系)를 알 수 없다하여 김선평(金宣平)을 관조(貫祖)라고 표시(表示)하였다.

또 하나 세계정오(世系正誤)에 관한 문제(問題)다. 시조(始祖)공 이후(以後)의 소목(昭穆)이 한동안 7세 김득우(金得雨)사이가 분명(分明)치 않아 전농정공(典農正公) 김득우(金得雨)를 기세조(起世祖)로 한 적이 있었다.

그 뒤 전농정공(典農正公)의 호장(戶帳)이 발견(發見)되어 공수부정공(公須副正公)까지의 계대(系代)가 알려져 '기해구보(己亥舊譜)'이후(以後) 기세조(起世祖)를 공수부정공(公須副正公)으로 하고 있다.

3.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본관지(本貫地) 연혁(沿革)

안동(安東)은 본래(本來) 신라(新羅)의 고타야군(古抒耶郡)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다.

고려조(高麗朝) 태조(太祖)가 안동(安東)으로 고쳐 부(府)로 삼았으며 성종(成宗)은 길주자사(吉州刺史)로, 현종(顯宗)은 안무사(按撫使)로 개명(改名)하였는데 뒤에 다시 안동부(安東府)로 고쳤다.

명종 때 도호부(都護府)로, 신종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昇格)되었고 충렬왕(忠烈王) 때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으나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만들었다.

조선조(朝鮮朝)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고 부사(府使)가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겸임하게 하였으나 곧 부사(府使)는 폐지하였다.

이후 변천(變遷)을 거듭하다가 1895년 군(郡)이 되었고 1914년 예안군(禮安郡)을 병합(倂合)하여 1995.1.1 안동군(安東郡)을 안동시(安東市)로 통합(統合)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4.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파명록(派名錄)

- 판관공계권파(判官公係權派)

- 감찰공영전파(監察公永銓派)

- 진사공영윤파(進士公永勻派)

- 부사공영추파(府使公永錘派)

- 장령공영수파(掌令公永銖派)

- 정헌공계행파(定獻公係行派)

- 참봉공극인파(參奉公克仁派)

- 진사공극의파(進士公克義派)

- 생원공극례파(生員公克禮派)

- 학생공극지(學生公克智派)

- 군수공극신파(郡守公克信派)

- 어담공삼익파(漁潭公三益派)

- 주부공삼우파(主簿公三友派)

- 계공랑공맹귀파(啓公郞公孟龜派)

- 참봉공시좌파(參奉公時佐派)

- 참봉공시량파(參奉公時亮派)

- 생원공시우파(生員公時佑派)

- 생원공이려파(生員公以礪派)

- 중파(仲派)

- 숙파(叔派)

- 등암공계귀파(藤菴公季龜派)

- 습독공엄파(習讀公淹派)

- 첨사공온파(僉使公溫派)

- 항재공낙파(恒齋公洛派)

- 목사공치림파(牧使公致林派)

- 참봉공언적파(參奉公彦迪派)

- 별장공홍파(別將公洪派)

- 국헌공준파(菊軒公浚派)

- 학생공수정파(學生公遂晶派)

- 호장공처상파(戶長公處商派)

- 현감공지철파(縣監公之哲派)

- 사헌공원수파(司憲公元水派)

- 사과공열파(司果公烈派)

- 선군공여중파(選軍公呂重派)

- 판관공용파(判官公龍派)

- 시중공학파(侍中公鶴派)

5.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갑자보(甲子譜)'를 보면 8세 김혁(金革) 이래로 경북 안동군(安東郡) 일원을 안동 김씨(安東 金氏)의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삼고 있으나, 관향(貫鄕)인 안동(安東)에 터를 잡고 세거하게 된 것은 그 이전부터라고 믿어진다.

11세 김영전(金永銓)의 자손들은 김영전(金永銓)의 조부(祖父) 김삼근(金三近)의 대 이래로 안동(安東)의 소산(素山)에서 살면서 의성(義城)·예천(醴泉)·영풍(榮豊)·봉화(奉化)·영덕(盈德) 등 경북 일원에 나뉘어 터를 잡았던 것 같다.

김영전(金永銓)의 동생 김영윤(金永勻)의 자손들은 김영윤(金永勻)의 둘째 아들 김환(金 )의 후계(後系)가 의성(義城)에서 살았고, 16세 김치문(金致文)의 후계(後系)는 상주(尙州)에 살았으며, 그밖에 22세 김유순(金儒淳) 이래로 일부가 울진(蔚珍)에, 23세 김수근(金秀根) 이래로 선산(善山)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영추(金永錘)의 자손들은 예천(醴泉)과 의성(義城)에 많이 살았다.

11세 김영수(金永銖)의 자손들 중에서 12세 김영(金瑛)의 후계는 15세 김양(金樑)의 대를 전후하여 지금의 경기도 파주(坡州)·교하(交河)에 살게 되었고, 다시 17세 김중현(金重鉉)의 대 이후에 전북 정읍(井邑)·순창(淳昌)·담양(潭陽)·고창(高敞) 등지로 산거해갔다.

또한 12세 김번(金 )의 후계(後系)는 대체로 15세 김상헌(金尙憲)·김상용(金尙容)의 대부터 3대에 걸쳐 경기도 양주(楊州)·여주(驪州)·포천(抱川) 등지와 충북 괴산(槐山), 충남 홍성(洪城)·논산(論山)·은진(恩津)·공주(公州)·서천(舒川)·아산(牙山)과 천원(天原)의 목천(木川) 등지, 전북 옥구(沃溝)·정읍(井邑)에 나뉘어 정착했으며 김번(金 )의 동생 김순(金珣)의 후계(後系)는 18세 김필광(金必光)의 대에 일부가 안동(安東)에서 칠곡(漆谷)을 거쳐 창녕(昌寧)의 영산(靈山)에 터를 굳혔던 것을 비롯하여 17세 이후에 영덕(盈德)의 영해(寧海)·밀양(密陽)·영양(英陽)·봉화(奉化)에 살았다.

11세 김극인(金克仁)의 자손들은 19세 김정환(金鼎煥) 이래로 일부가 전북 무주(茂朱)에, 14세 김응순(金應順) 이래로 경북 성주(星州)에, 자리잡았고, 그밖에 안동(安東)을 비롯하여 영덕(盈德)·의성(義城)·칠곡(漆谷)·청도(淸道) 등지에도 살았던 것 같다.

김극인(金克仁)의 동생인 김극의(金克義)와 김극례(金克禮)의 자손(子孫)들은 주로 안동(安東)과 봉화(奉化)에 세거(世居)하였으며 그 중 17세 김광렬(金光烈)의 후계(後系)가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에, 15세 김근청(金謹淸)의 후계(後系)는 김근청(金謹淸)이 해주(海州)로 옮겨간 이후 해주(海州)부근에서 살았다. 김극지(金克智)와 김극신(金克信)의 자손들은 의성(義城)에 세거의 터를 정하였다.

한편 9세 김삼익(金三益)의 후계(後系)는 안동(安東)·예천(醴泉) 등지와 14세 김언기(金彦紀) 이래로 함안(咸安) 등지(等地)에 산거(山居)하였고, 김삼우(金三友)의 후계(後系)는 선대(先代)부터 세거해온 안동(安東)과 16세 김엽(金燁) 이래로 문경(聞慶), 18세 김업(金業) 이래로 삼척(三陟), 18세 김창기(金昌起) 이래로 창녕(昌寧), 15세 김현(金 ) 이래로 예천(醴泉) 등지에 옮겨가 자리 잡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9세 김근신(金謹信)과 김진(金 )의 자손(子孫)들은 안동(安東)에 많이 살았고 일부(一部)만 20세의 대를 전후하여 영양(英陽)의 진보(眞寶) 등지와 영덕(盈德)으로 옮겨가 살았던 것 같다.

또한 9세를 김화(金華)와 김경주(金敬珠)의 후계(後系)가 안동(安東)의 예안(禮安)과 봉화(奉化)의 춘양(春陽)에 세장지지(世葬之地)를 두고 있으므로 이들 지역에 오래 세거한 것 같다.

8세 김정(金鼎)의 자손들은 김정(金鼎) 이래로 충북(忠北) 청주(淸州)를 세거(世居)의 터로 삼아왔으며, 6세 김학(金鶴)의 자손들은 황해도 금천(金川)의 토산(兎山)에서 살다가 13세 김형(金衡)의 대를 전후하여 일부가 강원도 이천(伊川)에 이거한 것 같고 12세 김치(金峙)의 후계(後系)가 안성(安城)을 거쳐 충북 음성(陰城)과 경기도 양주(楊州)에 나뉘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20세 김덕남(金德南)의 대부터 전남 고흥(高興)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으며, 김복형(金復亨) 이래로 강원도 강릉(江陵)에, 15세 김응필(金應弼) 이래로 경북 경산(慶山)의 자인(慈仁)에 살게 되었던 것이 임술보(壬戌譜)에 보인다.

황해도 토산(兎山)에 살았던 자손들은 이후에 해주(海州)·황주(黃州)·송화(松禾)·수안(遂安) 등지로 산거해왔으며 21세 김천수(金千壽)의 후계(後系)는 평남 성천(成川)으로 옮겨가 살았다고 믿어진다.

그리하여 1930년경,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중면(中面), 화성군(華城郡) 정남면(正南面)·동탄면(東灘面), 김포군(金浦郡)·대곶면(大串面), 강화군(江華郡) 길상면(吉祥面)·하점면(河岾面), 강원도 명주군(溟州郡) 강동면(江東面), 충북 청원군(淸原郡)·괴산군(槐山郡)·음성군(陰城郡) 일원, 충남 연기군(燕岐郡) 일원, 논산군(論山郡) 상월면(上月面),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천원군(天原郡) 일원, 전북 순창군(淳昌郡) 풍산면(豊山面), 고창군(高敞郡) 공음면(孔音面), 전남 고흥군(高興郡) 도양읍(道陽邑), 경북 달성군(達成郡) 성서면(城西面), 의성(義城)·안동(安東)·청송(靑松)·영양(英陽)·예천군(醴泉郡) 일원, 경남 함안군(咸安郡) 칠서면(漆西面), 함양군(咸陽郡) 안의면(安義面), 창녕군(昌寧郡) 일원,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대성면(大成面), 평북 귀성(龜城)·박천(博川)·용천군(龍川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6.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씨족사(氏族史)의 개요(槪要)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는 고려 태조 때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始祖)로 하는 성씨(姓氏)이다.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손자(孫子)라는 김숙승(金叔承)을 시조(始祖)로 하는 구(舊) 안동(安東) 김씨(金氏)가 있어 본관(本貫)이 같으면서 시조(始祖)를 달리한다.

김선평(金宣平)은 후삼국시대에 고창군(古昌郡)(안동(安東)의 신라말 이름)의 성주(城主)였다. 후삼국시대는 후백제가 고려와 쟁패를 겨루고 있었으며,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지방의 호족들이 성주(城主)·장군(將軍)을 자칭하며 행세하고 있었다.

930년(경순왕 4년, 고려 태조 13년)에 있었던 고창군(古昌郡)에서의 싸움은 수세에 있는 왕건의 고려를 후백제에 비해 우세한 위치에 서게 하는 결정적인 싸움이었다. 고창(古昌)싸움이후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을 포섭,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

이 고창(古昌)싸움에서 태조 왕건측이 승리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 고창군(古昌郡)의 성주(城主)였던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이었다. 이 공에 의해 김선평(金宣平)은 아부공신(亞父功臣), 권행(權幸)과 장길(張吉)은 공신(功臣)이 되고 세사람 모두 공신당벽상(功臣堂壁上)에 도화(圖畵)되었다. 왕건은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 권행(權幸)·장길(張吉)을 대상(大相)의 위계에 올려주고 고창군(古昌郡)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은 각각(各各) 안동 김씨(安東 金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안동장씨(安東張氏)의 시조(始祖)가 된다. 세 성씨(姓氏)는 이후(以後) 계속 안동(安東)의 대표적(代表的)인 성씨(姓氏)로, 곧 안동(安東)의 지방(地方)세력(勢力)의 향민(鄕民)을 실질적(實質的)으로 지배하면서 그 세력(勢力)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안동(安東)(신(新))김씨(金氏)가 한반도의 대표적인 벌족으로 성장한 것은 조선 초기 10세 김계행(金係行)이 조정에 출사를 시발로 하여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등을 지내며 (後에 贈吏曹判書) 문호를 열고 유언(遺言)으로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吾家有淸白) 즉 내집에 보물은 없다. 다만 보물이 있다면 청백뿐이다 라는, 가훈(家訓) 시를 남기면서 학통(學統)을 종손(從孫) 김영(金瑛)이 잇고 그 아우 김번(金 )의 증손(曾孫)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金尙容)은 병자호란 때 순국한 충신이고 그 동생 김상헌(金尙憲)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서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은 충절로 뒤이어 많은 문무신과 학자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순조조 이후는 이른바 안동 김씨(安東 金氏)세도정치를 한 시기였다. 11살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게 되고, 선왕(先王)인 정조의 고명(顧命)을 받은 김조순(金祖淳)이 국정을 총괄하게 되면서 안동 김씨(安東 金氏) 50여년간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시조 김선평(金宣平) 이하의 세계(世系)는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다. 안동 김씨(安東 金氏)에서는 공수부정(公須副正)을 지낸 김습돈(金習敦)을 1세조(世祖)로 기세(起世)하고 있다. 안동(安東)(신(新))김씨(金氏)는 10세조 김계권(金係權)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로 분파(分派)되었는데, 그 후손에서 다시 김영전(金永銓)의 후손이 감찰공파(監察公派), 김영균(金永勻)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김영추(金永錘)의 후손이 부사공파(副使公派), 김영수(金永銖)의 후손이 장령공파(掌令公派)로 세분되었다. 감찰공(監察公) 김영전(金永銓)의 후손(後孫) 김홍(金弘)·김등(金登)·김응(金응)의 후손에서 다시 분파(分派)되었는데, 이 이하는 생략한다.

10세조 김계행(金係行)의 후손(後孫)은 정헌공파(定獻公派)로 분파(分派)되었는데, 그 후손(後孫)에서 다시 김극인(金克仁)의 후손(後孫)이 참봉공파(參奉公派), 김극의(金克義)의 후손(後孫)이 진사공파(進士公派), 김극례(金克禮)의 후손(後孫)이 생원공파(生員公派), 김극지(金克智)의 후손(後孫)이 학생공파(學生公派), 김극신(金克信)의 후손(後孫)이 군수공파(郡守公派)로 나누어졌다.

9세조 김삼익(金三益)의 후손(後孫)은 어담공파(漁潭公派)로 나누어졌다. 김삼우(金三友)에게는 네 아들이 있는데, 김맹귀(金孟龜)의 후손(後孫)이 계공랑공파(啓公郞公派), 김중귀(金仲龜)의 후손(後孫)이 중파(仲派), 김숙귀(金叔龜)의 후손(後孫)이 숙파(叔派)이고, 김계귀(金季龜)의 후손(後孫)이 등암공파(藤菴公派)이다.

계공랑공파(啓公郞公派)는 다시 김시좌(金時佐)의 후손(後孫)이 참봉공파(參奉公派), 김시량(金時亮)의 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김시우(金時佑)·김이려(金以礪)의 후손(後孫)이 각각 생원공파(生員公派)로 나누어졌다. 등암공파(藤菴公派)는 김엄(金淹)의 후손(後孫)이 습독공파(習讀公派), 김창(金 )의 후손이 첨사공파(僉使公派), 김락(金洛)의 후손(後孫)이 항재공파(恒齋公派), 김치림(金致林)의 후손(後孫)이 목사공파(牧使公派)이다. 김언적(金彦迪)의 후손(後孫)이 참봉공파(參奉公派), 김준(金浚)의 후손(後孫)이 국헌공파(菊軒公派), 김수정(金遂晶)의 후손(後孫)이 학생공파(學生公派)이다.

6세조 김처상(金處商)의 후손(後孫)은 호장공파(戶長公派)이다. 7세조 김지철(金之哲)의 후손(後孫)이 다시 현감공파(縣監公派)로 분파(分派)되었다. 김원수(金元水)의 후손(後孫)은 사헌공파(司憲公派)이며, 5세조 김열(金烈)의 후손(後孫)이 사과공파(司果公派)이다.

시중공파(侍中公派)에 대(對)하여

-신 안동 김씨의 6세 판관공파(判官公派) 김용(金龍)

-신 안동 김씨의 6세 시중공파(侍中公派) 김학(金鶴)

2세조인 김여중(金呂重)의 후손(後孫)은 선군공파(選軍公派)인데, 그 4세손인 김용(金龍)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 김학(金鶴)의 후손(後孫)이 시중공파(侍中公派)로 나누어졌다.

안동 김씨(安東 金氏)의 인물로 조선조(朝鮮朝) 중기(中期) 이전(以前)에 관직에 나아간 자로는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김계행(金係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김치(金峙), 강원도(江原道)관찰사(觀察使)를 지낸 김영(金瑛), 승지(承旨)를 지낸 김중청(金中淸) 등이 있을 뿐으로, 명문벌족으로는 자리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안동김씨(安東金氏)가문(家門)이 중앙무대에서 명문(名門)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조선조(朝鮮朝) 중엽(中葉), 광해군 때 김극효(金克孝)가 좌의정(左議政) 정유길(鄭惟吉)(東萊鄭氏)의 사위가 되면서부터다. 정유길(鄭惟吉)의 한 딸은 광해군(光海君)의 장인인 유백신(柳白新) 문화 류씨(文化 柳氏)에게 시집가 김극효(金克孝)는 유백신(柳白新)과는 동서간이 된다.

조선조(朝鮮朝)에 안김(安金)은 15명의 정승, 35명의 판서, 6명의 대제학, 3명의 왕비를 내어 최고가문으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러나 때로는 당쟁의 와중에서 서인(西人) 노론(老論)에 속했던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몇 차례의 사화(士禍)에서 내쫓겨 김수항(金壽恒)·김창집(金昌集) 부자가 사약을 받는 등 영화와 비운이 엇갈리기도 하였다.

김극효(金克孝)의 아들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나란히 정승에 올랐다. 선원(仙源)은 선조 2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이어 병조좌랑(兵曹佐郞), 정언(正言), 수찬(修撰), 응교(應敎) 등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서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예조(禮曹)·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있었다. 1632년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자 거듭 사임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족(王族)을 시종하고 강화(江華)로 피난하다가 다음해 강화성(江華城)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글씨에 뛰어났고 시조(時調)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 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9편, 그밖에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이 있다.

김상헌(金尙憲)은 대표적인 청백리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난에 청(淸)과의 강화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심양(瀋陽)에 잡혀가 6년간 유폐생활을 하기도 했던 충절(忠節)의 신하로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선조 2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광해군즉위(光海君卽位)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정언(正言),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예조(禮曹)·공조(工曹)·형조(刑曹)·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로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는데 다음해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淸)나라에서 명(明)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出兵)을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다음해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1642년 의주(義州)에 돌아왔으나, 명(明)나라와 밀무역을 하다가 청(淸)나라에 잡혀갔던 이계(李 )가 조선이 명(明)을 숭배하고 청(淸)을 배척한다고 고해바쳐 최명길(崔鳴吉)·이경여(李敬與) 등과 함께 다시 심양(瀋陽)에 잡혀갔다. 1645년 석방되어 귀국 후 좌의정(左議政),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등을 역임했다. 숭명파(崇明派)로 절의(節義)가 있어 당시 사림(士林)들의 신망을 받았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수항(金壽恒)·김창집(金昌集) 부자는 현종∼숙종연간의 당쟁기간 중 모두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오르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당쟁으로 죽게 된 인물이다.

김수항(金壽恒)은 인조 24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1년 알성문과(謁聖文科), 165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 교리(校理)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659년 승지(承旨)가 되었다. 다음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西人)으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남인(南人)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의 3년설(年說)을 누르고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서인(西人)이 승리하게 했다. 1661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고,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거쳐 1672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이어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다음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효종비(孝宗妃)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김수흥(金壽興)과 함께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으나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1675년 왕(王)의 부름으로 다시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남인(南人)에 대한 강경·온건파로 서인(西人)이 분열되자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에 소속되었는데,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재집권하자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사(賜死)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김창집(金昌集)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진도(珍島)의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산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정국이 바뀌자 복관(復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예조참판(禮曹參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호조(戶曹)·이조(吏曹)·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1705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다음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우의정(右議政), 이어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1712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숙종 말년 세자(世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다가 소론(少論)에게 탄핵받았고, 숙종이 죽은 뒤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맡았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老論)의 대신(大臣)들과 합의, 왕세제(王世弟)(영조)의 책봉을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했다. 1721년(경종1) 다시 세제(世弟)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상소하여 시행케 했으나, 조태억(趙泰億) 등의 반대로 대리청정의 결정이 철회되자 치사(致仕)했다. 이어 소론(少論)의 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老論)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 일대 옥사(獄事)(신임사화(申壬士禍))가 일어나자 거제도(巨濟島)에 안치(安置), 다음해 사사(賜死)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관작이 복구되고, 후에 영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김이소(金履素)는 영조 40년 충량정시문과(忠良庭試文科)에 급제, 관직에 나아가 정조 16년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좌의정,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김이교(金履喬)는 정조 1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대사헌(大司憲), 도승지(都承旨),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이조판서(吏曹判書)·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공조(工曹)·형조(刑曹)·공조(工曹)·예조(禮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1831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는데 이때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이 모두 공석중이므로 한때 국정을 도맡아 책임졌다.

김조순(金祖淳)은 김창집(金昌集)의 현손(玄孫)이다. 정조의 고명(顧命)을 받아 순조 즉위 후 국정을 총괄했고 총융사(摠戎使),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순조 2년 딸이 순조비(純祖妃)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철종 대의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도정치의 기초를 마련했다. 문장(文章)에 능하고 죽화(竹畵)를 잘 그렸다. 정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등장(登場)할 때까지 안동김씨가(安東金氏家)에서는 김조근(金祖根)의 딸 헌종비(헌종비), 김문근(金汶根)의 딸 철종비(철종비)를 배출하면서 10촌 안팎의 현재(現在), 조카가 국정(國政)을 장악했으니 김조순(金祖淳)의 아들 김좌근(金左根)을 비롯하여 김흥근(金興根), 김병국(金炳國), 김병학(金炳學), 김병시(金炳始) 등이 돌아가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김조근(金祖根)은 음보(蔭補)로 광주부판관(廣州府判官)을 거쳐 헌종 3년 일약 승지(承旨)에 승진, 딸이 헌종(憲宗)의 비(妃)로 책봉(冊封)되자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올랐다. 이어 어영대장(御營大將), 호위대장(扈衛大將), 주사대장(舟師大將) 등을 역임(歷任), 당시 새로 대두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勢力)과 함께 왕실(王室)의 외척(外戚)으로서 쌍벽을 이루었다.

김문근(金汶根)은 헌종 7년 음보(蔭補)로 가감역(假監役)이 된 뒤 현감(縣監)을 지내고, 철종 2년 그의 딸이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자, 임금의 장인으로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었다. 그후 금위대장(禁衛大將), 총융사(摠戎使), 훈련대장(訓鍊大將) 등의 요직(要職)을 지냈으며 돈녕부사(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김좌근(金左根)은 안동 김씨(安東 金氏)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중추적(中樞的) 인물(人物)로서 음보(蔭補)로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이 되었다. 1839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1842년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사헌(大司憲),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우참찬(右參贊), 금위대장(禁衛大將),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852년 우의정(右議政)을 지내고, 다음해부터 1863년까지 영의정(領議政)에 세 번 보직되어, 세도(勢道)를 누렸다. 1862년 이정청(釐整廳)이 설치(設置)되자,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며, 1868년 삼군부(三軍府)가 설치되자 영삼군부사(領三軍府使)가 되었다.

김흥근(金興根)은 철종 2년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다음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864년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 때 지실록사(知實錄事)가 되고 다음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서 치사(致仕)했다.

김병학(金炳學)은 철종 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후 고종 2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서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조두순(趙斗淳) 등과 함께 산집소총재관(算輯所總裁官)이 되어 '대전회통(大典會通)'을 각각 완성했다. 보수파의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천주교(天主敎) 탄압(彈壓)을 적극(積極) 주장했고, 영의정(領議政)을 거쳐 1875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의 체결을 극력(極力) 반대(反對)했다.

김병시(金炳始)는 철종 6년 정시문과(庭試文科)를 거쳐 관직에 나아갔다.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대원군(大院君)이 재집정(再執政)했을 때 지삼군부사(知三軍府使)가 되었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 등의 개화파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청(淸)나라의 세력(勢力)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몰아내고 수구파 중심(中心)의 내각(內閣)을 조직, 외무아문독변(外務衙門督辨)이 되어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이탈리아·영국(英國)·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했다.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1894년의 동학혁명(東學革命) 때 청일양군(淸日兩軍)의 개입을 극력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나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사임(辭任)하고, 뒤에 중추원(中樞院) 의장(議長)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왕(王)과 왕세자(王世子)가 러시아 공관(公館)으로 들어간 직후 친로파(親露派) 중심의 내각(內閣)이 조직(組織)되어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수구파로서 끝까지 개국(開國)을 반대(反對)했고, 1895년의 단발령(斷髮令)에도 특진관(特進官)으로 있으면서 반대(反對)했다.

김병연(金炳淵)은 방랑(放浪)시인(詩人) 김삿갓으로 알려진 인물(人物)이다.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의 손자이다. 1811년(순조 11년) 평안도(平安道) 지방(地方)에서 홍경래 등이 중심(中心)이 된 농민(農民)반란(叛亂)이 일어났을 때 그의 조부(祖父)가 반란군(叛亂軍)에 항복(降伏)하여 가문(家門)이 적몰(籍沒)되었다. 이에 굴욕을 느껴 벼슬을 단념하였으며, 삿갓을 쓰고 죽장(竹杖)을 짚고 방랑생활(放浪生活)을 하였다. 풍자·해학으로 퇴폐(頹廢)해가는 세상(世上)을 개탄(慨歎), 저주·조소하는 기발한 시구(詩句)를 가는 곳마다 쏟아놓으며 세월(歲月)을 보냈다. 많은 한시(漢詩)가 구전(口傳)되고 있다.

한말(韓末), 일제(日帝)하의 인물(人物)로는 김옥균(金玉均)과 김좌진(金佐鎭)을 들 수 있다.

김옥균(金玉均)은 고종(高宗) 9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옥당승지(玉堂承旨)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일본(日本)에 건너가 제도와 문물을 시찰하고,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뒤에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부사 김만식(金晩植) 일행(一行)의 고문(顧問)으로 일본(日本)에 들어가 활약(活躍)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과 협력(協力)하여 독립당(獨立黨)을 조직(組織)하고, 국정(國政)을 개혁(改革)하여 낡은 폐습(弊習)을 타파(打破), 곧 '개화'하려고 하였다. 일본(日本)의 지지를 배경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조직(組織),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이 되었다. 청나라 주둔군의 방해로 3일만에 일이 실패(失敗)로 돌아가자 일본(日本)으로 망명, 이와타(암전주작(岩田周作))라 변명하고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10년을 지냈다. 그 후 청나라 세력(勢力)으로 뜻을 이루어보려고 상해로 건너갔으나 1894년 3월 28일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살해(殺害)되었다. 조정(朝政)에서는 반역죄(反逆罪)로 몰아 양화진에서 시체(屍體)를 찢는 극형(極刑)에 처하였으나, 이듬해에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죄명을 벗고 관직이 회복되었다. 순종 때에는 규장각(奎章閣) 대제학(大提學)에 추증을 받고 관리(管理)를 보내서 제사지내는 대우까지 받았다.

김좌진(金佐鎭)은 홍성에 사립호명교(私立湖明校)를 설립,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었다. 청년 학우회 회원, '한성일보(漢城日報)'이사로 있다가 3·1운동 때 만주(滿洲)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組織)하고 총사령이 되었다. 사관연성부(士官鍊成部)를 설치(設置)하여 독립군(獨立軍) 간부를 양성했다. 1920년 9월 청산리작전에서 이범석(李範奭), 나중소(羅仲昭) 등(等)과 함께 일본군(日本軍)을 대파(大破)하였고, 1925년 6월 호림(虎林)에서 다시 재기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925년 김혁(金赫)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여 총사령이 되었으며, 1927년 중국(中國) 구국(救國)군사령관(軍司令官) 양우일(楊宇一)과 함께 공동전선(共同戰線)을 펴기로 하고 한중(韓中)연합군(聯合軍)을 조직(組織)하였으나, 군벌(軍閥) 장작림(張作霖)의 탄압(彈壓)으로 실패(失敗)하였다.

1930년 정신(鄭信), 민무(閔武), 이붕해(李鵬海) 등(等)과 함게 한족(韓族) 총연합회(總聯合會)를 조직(組織)하고 수석에 취임했으나 1930년 1월 자객(刺客)에 의해 살해(殺害)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을 받았다.

7.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순(淳)

○근(根)

○병(炳)

○규(圭)

○진(鎭)

○한(漢)

○동(東)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현(顯)

○년(年)

○일(鎰)

○구(求)

○모(模)

○연(然)

○배(培)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선(銑)

○원(源)

○영(榮)

○사(思)

○준(埈)

○선(善)

○택(澤)

43세

44세

45세

○식(植)

○환(煥)

○철(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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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등과(登科)·음사인명(蔭仕人名)

조선조(朝鮮朝)

문과(文科)

김계행(金係行)(대간(大諫))

김영(金瑛)(한림(翰林))

김번(金 璠)(부정(副正))

김정준(金廷準)(학유(學諭))

김상준(金尙雋)(형참(刑參))

김상용(金尙容)(우상(右相))

김상헌(金尙憲)(좌상(左相))

김광욱(金光煜)(제학(提學))

김중청(金中淸)(승지(承旨))

김광현(金光炫)(이참(吏參))

김주우(金柱宇)(지평(持平))

김광혁(金光爀)(승지(承旨))

김수익(金壽翼)(참의(參議))

김여기(金汝器)

김중일(金重鎰)(승지(承旨))

김명원(金鳴遠)(직정(直靜))

김진원(金震遠)(경력(經歷))

김수항(金壽恒)(영상(領相))

김수흥(金壽興)(영상(領相))

김수능(金壽能)(현감(縣監))

김수항(金壽恒) 영의정 시(諡=文忠)

김창협(金昌協)(예판(禮判))

김성시(金盛始)(현감(縣監))

김창집(金昌集)(영상(領相))

김시걸(金時傑)(전백(全伯))

김성적(金盛 )(이의(吏議))

김창직(金昌直)(수찬(修撰))

김한운(金翰運)(지평(持平))

김제겸(金濟謙)(승지(承旨))

김천서(金天 )(첨정(僉正))

김우갑(金禹甲)(승정(承正))

김광찬(金光燦)(부학(副學))

김범갑(金范甲)(현감(縣監))

김선행(金善行)(참판(參判))

김문행(金文行)(대간(大諫))

김응순(金應淳)(판서(判書))

김면행(金勉行)(참판(參判))

김이헌(金履獻)

김이희(金履禧)(참판(參判))

김보순(金普淳)(대헌(大憲))

김노순(金魯淳)(참판(參判))

김장행(金章行)(봉첨(奉僉))

김이소(金履素)(우상(右相))

김이신(金履信)(옥당(玉堂))

김문순(金文淳)(판서(判書))

김약행(金若行)(승지(承旨))

김제행(金悌行)(승지(承旨))

김이정(金履正)(참판(參判))

김이용(金履鏞)(교리(校理))

김방행(金方行)(대성(大成))

김이성(金履成)(참판(參判))

김이후(金履厚)(집의(執義))

김이익(金履翼)(판서(判書))

김조순(金祖淳)(이판(吏判))

김유기(金裕己)

김이선(金履善)(좌랑(佐郞))

김희순(金羲淳)(이판(吏判))

김이교(金履喬)(우상(右相))

김이재(金履載)(이판(吏判))

김달순(金達淳)(우상(右相))

김근순(金近淳)(부학(副學))

김이영(金履永)(충백(忠伯))

김매순(金邁淳)(참판(參判))

김이도(金履度)(이판(吏判))

김이양(金履陽)(이판(吏判))

김이수(金履秀)(정랑(正郞))

김명순(金明淳)(참판(參判))

김영순(金英淳)(판서(判書))

김학순(金學淳)(이판(吏判))

김난순(金蘭淳)(이판(吏判))

김우순(金愚淳)(참판(參判))

김석순(金錫淳)(승지(承旨))

김양순(金陽淳)(참판(參判))

김기순(金琦淳)(승지(承旨))

김첩근(金 根)(이판(吏判))

김시근(金蓍根)(판서(判書))

김교슨(金敎根)(판서(判書))

김흥근(金興根)(이의(吏議))

김원근(金元根)(이참(吏參))

김좌근(金左根)(영상(領相))

김홍근(金弘根)(좌상(左相))

김흥근(金興根)(좌상(左相))

김보근(金輔根)(이판(吏判))

김양근(金養根)(형참(刑參))

김성근(金盛根)(참판(參判))

김수근(金洙根)(이판(吏判))

김양근(金穰根)(판서(判書))

김대근(金大根)(이판(吏判))

김덕근(金德根)(직각(直閣))

김신근(金愼根)(승지(承旨))

김만근(金萬根)(참판(參判))

김윤근(金胤根)(이의(吏議))

김우근(金羽根)(응집(應執))

김재근(金在根)(이참(吏參))

김면근(金勉根)(승지(承旨))

김성근(金聲根)(이판(吏判))

김학진(金鶴鎭)(판서(判書)

김철근(金哲根)(판서(判書))

김종근(金宗根)(자헌(資憲))

김병조(金炳朝)(이판(吏判))

김병교(金炳喬)(이판(吏判))

김병익(金炳翼)(찬성(贊成))

김병연(金炳淵)

김병소(金炳韶)(직각(直閣))

김병규(金炳奎)(참판(參判))

김병학(金炳學)(영상(領相))

김병국(金炳國)(좌상(左相))

김병집(金炳潗)(참판(參判))

김병운(金炳雲)(판서(判書))

김병익(金炳翊)(판서(判書))

김병구(金炳球)(문학(文學))

김병육(金炳陸)(승선(丞宣))

김병시(金炳始)(좌상(左相))

김병덕(金炳德)(좌상(左相))

김정균(金鼎均)(이참(吏參))

김응균(金應均)(판서(判書))

김성균(金性均)(예참(禮參))

김세균(金世均)(호참(戶參))

김경균(金敬均)(이참(吏參))

김영균(金永均)(호참(戶參))

김옥균(金玉均)(참판(參判))

김명규(金明圭)(판서(判書))

김응규(金應圭)(교리(校理))

김정규(金定圭)(참판(參判))

김석규(金錫圭)(호참(戶參))

김상규(金商圭)(참판(參判))

김승규(金昇圭)(이참(吏參))

김정규(金貞圭)(이참(吏參))

김흥규(金興圭)(예참(禮參))

김홍규(金弘圭)(참판(參判))

김용규(金用圭)(참판(參判))

김종규(金宗圭)(예참(禮參))

김용규(金用圭)(참판(參判))

김덕규(金德圭)(판서(判書))

김용규(金容圭)(승선(承宣))

김경규(金敬圭)(호참(戶參))

김년규(金年圭)(승지(承旨))

김성규(金成圭)(승지(承旨))

김병억(金炳億)(승지(承旨))

김병수(金炳秀)(예참(禮參))

김병직(金炳稷)(대성(大成))

김병우(金炳禹)(승지(承旨))

김병식(金炳軾)(승지(承旨))

김병년(金炳年)(승지(承旨))

김병옹(金炳翁)(교리(校理))

김병길(金炳吉)(승지(承旨))

김병옥(金炳玉)(승지(承旨))

김학진(金鶴鎭)(이판(吏判))

김석진(金奭鎭)(판서(判書))

김경진(金敬鎭)(참판(參判))

김명진(金明鎭)(판서(判書))

김낙진(金樂鎭)(승지(承旨))

김가진(金嘉鎭)(판서(判書))

김익진(金翊鎭)(판서(判書))

김종한(金宗漢)(판서(判書))

김준한(金駿漢)(승지(承旨))

김복한(金福漢)(승지(承旨))

김덕한(金德漢)(승지(承旨))

김장한(金章漢)(정언(正言))

무과(武科)

김시태(金時泰)(병사(兵使))

김이환(金履煥)(영장(營將))

김익순(金益淳)(방어사(防禦使))

음사인명(蔭仕人名)

김선평(金宣平)(태사(太師))

김습돈(金習敦)(부정(副正))

김여기(金呂基)(호장(戶長))

김남수(金南秀)(호장(戶長))

김희(金熙)(주부(主簿))

김자(金資)(주부(主簿))

김근중(金斤重)(판사(判事))

김득남(金得南)(전농정(典農正))

김혁(金革)(봉예랑(奉禮郞))

김삼근(金三近)(현감(縣監))

김계권(金係權)(판관(判官))

김영수(金永銖)(장령(掌令))

김생해(金生海)(군수(郡守))

김대효(金大孝)(현령(縣令))

김항일(金恒一) 가산대부

김한유(金漢有) 진한성좌윤

김광찬(金光燦)(동추(同樞))

김수증(金壽增)(도정(都正))

김창국(金昌國)(부사(府使))

김치겸(金致謙)(정랑(正郞))

김이탁(金履鐸)(목사(牧使))

김면순(金勉淳)(참봉(參奉))

김병유(金炳儒)(현감(縣監))

김정진(金鼎鎭)(참봉(參奉))

김이수(金履壽) 숭정대부(崇政大夫)

김성행(金省行)(증찬성(贈贊成))

김이장(金履長)(목사(牧使))

김복순(金復淳)(목사(牧使))

김영근(金泳根)(판서(判書))

김병준(金炳駿)(참판(參判))

김문규(金文圭)(참봉(參奉))

김이순(金 淳)(증찬성(贈贊成))

김문근(金汶根)(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달행(金達行)(증이판(贈吏判))

김이중(金履中)(서윤(庶尹))

김조순(金祖淳)(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탄행(金坦行)(목사(牧使))

김지순(金芝淳)(목사(牧使))

김조근(金祖根)(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원행(金元行)(이참(吏參)·시(諡) : 문순(文純))

김이안(金履安)(찬선(贊善))

김호근(金浩根)(군수(郡守))

김창옹(金昌翁)(진영(進榮)·시(諡) : 문강(文康))

김양겸(金養謙)(군수(郡守))

김범행(金範行)(군수(郡守))

김이현(金履鉉)(부사(府使))

김병창(金炳昌)(집의(執義))

김용규(金用圭)(군수(郡守))

김원규(金元圭)(참봉(參奉))

김창업(金昌業)(교관(敎官))

김신겸(金信謙)(교관(敎官))

김양행(金亮行)(형참(刑參)·시(諡) : 문간(文簡))

김이구(金履九)(군수(郡守))

김직순(金直淳)(지평(持平))

김인근(金仁根)(집의(執義))

김병우(金炳愚)(참의(參議))

김봉규(金奉圭)(군수(郡守))

김간행(金簡行)(현령(縣令))

김이석(金履錫)(목사(牧使))

김연근(金淵根)(판서(判書))

김병주(金炳疇)(창녕위(昌寧尉))

김도균(金道均)(참봉(參奉))

김극효(金克孝)(도정(都正))

김상용(金尙容)(견문(見文)·시(諡) : 문충(文忠))

김수창(金壽昌)(군수(郡守))

김성주(金盛宙)(현령(縣令))

김시망(金時望)(참봉(參奉))

김덕순(金德淳)(참봉(參奉))

김복근(金復根)(첨정(僉正))

김병문(金炳文)(군수(郡守))

김대균(金大均)(현령(縣令))

김수인(金壽仁)(부사(府使))

김수민(金壽民)(현감(縣監))

김수빈(金壽賓)(군수(郡守))

김성익(金盛益)(지평(持平))

김시발(金時發)(좌랑(佐郞))

김시철(金時哲)(도정(都正))

김시술(金時述)(증이판(贈吏判))

김헌행(金憲行)(판관(判官))

김한순(金漢淳)(참판(參判))

김현근(金賢根)(동녕위(東寧尉))

김병삼(金炳三)(참봉(參奉))

김시눌(金時訥)(현감(縣監))

김낙행(金樂行)(좌랑(佐郞))

김이위(金履褘)(목사(牧使))

김형순(金亨淳)(서윤(庶尹))

김준근(金寯根)(목사(牧使))

김응규(金應圭)(군수(郡守))

김유순(金有淳)(부사(府使))

김인근(金寅根)(도정(都正))

김영규(金泳圭)(참봉(參奉))

김광용(金光 )(증판서(贈判書))

김윤한(金潤漢)(증승지(贈承旨))

김섭동(金涉東)(증통정(贈通政))

김필웅(金弼雄)(증통정(贈通政))

김익한(金翊漢)(증이참(贈吏參))

김수동(金秀東)(증조봉(贈朝奉))

김상동(金尙東)(통훈(通訓))

김문현(金文顯)(증승지(贈承旨))

김석현(金錫顯)(가선(嘉善))

김광년(金光年)(통정(通政))

김종기(金鍾基)(감찰(監察))

김두한(金斗漢)(증통정(贈通政))

김성주(金聖周)(증통훈(贈通訓))

김성하(金聖夏)(증자헌(贈資憲))

김경수(金慶秀)(증통정(贈通政))

김필인(金弼仁)(증참판(贈參判))

김수곤(金壽坤)(증자헌(贈資憲))

김창국(金昌國)(증통정(贈通政))

김명현(金明顯)(증참판(贈參判))

김경년(金景年)(증자헌(贈資憲))

김석진(金錫鎭)(증통훈(贈通訓))

김순보(金舜輔)(증승지(贈承旨))

김익동(金益東)(증가선(贈嘉善))

김이현(金理顯)(가선(嘉善))

김경두(金京斗)(군사(郡事))

김이한(金履漢)(증통정(贈通政))

김낙동(金洛東)(증참판(贈參判))

김윤동(金潤東)(증가선(贈嘉善))

김채현(金采顯)(가선(嘉善))

김여현(金麗顯)(도정(都正))

김대현(金大顯)(가선(嘉善))

김규현(金圭顯)(가선(嘉善))

김희한(金喜漢)(증참판(贈參判))

김영동(金英東)(증자헌(贈資憲))

김연현(金延顯)(증통훈(贈通訓))

김찬현(金贊顯)(증통정(贈通政))

김성태(金性泰)(참봉(參奉))

김태선(金泰善)(참봉(參奉))

김회진(金會鎭)(증참의(贈參議))

김복한(金福漢)(증승지(贈承旨))

김용동(金龍東)(증가선(贈嘉善))

김의현(金義顯)(참봉(參奉))

김응한(金應漢)(증가선(贈嘉善))

김석동(金碩東)(증공참(贈工參))

김인동(金仁東)(증공참(贈工參))

김환현(金煥顯)(증가선(贈嘉善))

김성대(金聖大)(증자헌(贈資憲))

김경채(金慶彩)(증참의(贈參議))

김은진(金殷鎭)(증병참(贈兵參))

김영한(金榮漢)(증승지(贈承旨))

김치동(金治東)(증가선(贈嘉善))

김철현(金澈顯)(통정(通政))

김일현(金一顯)(참봉(參奉))

김승기(金升基)(참봉(參奉)) 등 - 이하 중략 -

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은열의 둘째 아들 숙승(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안동’과 고려 태사(太師) 선평(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9.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집성촌(集成村)

- 경기도 고양군 중면 일원

- 충남 논산군 일원

- 경기도 화성군 정남몀, 동탄면 일원

- 전북 순창군 풍산면 일원

-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일원

- 경북 예천군 일원

- 충북 청원군, 괴산군, 음성군 일원

- 경남 함안군 칠서면 일원

10.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에는 총 15,068가구 47,70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2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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