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타이밍, 결정적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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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탁월한 제품은 시기가 중요
기회는 결정적인 순간에 빛 발해
때로는 우연히 얻는 듯 보이지만
모든 것은 ‘준비된 기다림’ 덕분


중국 전국시대의 이름난 재상이던 강태공은 훌륭한 주군이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그래서 능력을 펼칠 절호의 기회가 올 때까지 긴긴 세월을 강에서 낚시를 했다. 근대의 일본을 만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힘을 키우기까지 자신보다 뛰어난 무장들 아래에서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사람들이 보통 강태공과 도쿠가와의 이야기를 말머리에 꺼내는 이유는 인내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직관적 판단력에 더 관심이 있다. 지금이 바로 자신이 일어서야 할 때인 줄 어떻게 감지했을까?

아무리 꿈꾸던 사람도 내 여건이 허락지 않을 때 만나다 보면 놓치게 되고, 탁월한 제품도 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은 시절에 출시되면 실패하고 만다. 참신한 아이디어라 할지라도 누군가 나보다 한발 앞서 흥행시켜 버리면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시라. 아마도 당신의 인생은 딱 그 시절에 때마침 나타난 사람들과 엮여 있을 것이고, 그때 눈앞에 주어졌던 기회들을 잡거나 놓친 결과로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운도 타이밍이고, 직업운도 타이밍, 그리고 사업성공의 비결도 타이밍에 있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타이밍은 아주 특별한 순간을 뜻하는데, 그리스어로는 카이로스이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인데, 머리카락이 모두 앞으로 쏟아져 내려와 있고 뒷머리는 모두 벗겨져 있다. 그는 어깨에도 날개가 달려 있고, 두 발에도 날개가 붙어 있어 쏜살같이 재빠르게 착지했다가 누군가 미처 잡을 새도 없이 ‘휙’하고 사라지는 존재이다. 사람들은 한 박자 늦게 깨닫고 이미 돌아선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이라도 잡아보려 애쓰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카이로스는 뒷대머리이기 때문이다. 카이로스를 나한테 머물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다. 얼른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낚아채어 그의 얼굴을 드러나게 한 후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일이다.

기회는 영어로 우연(chance)과 같은 단어로 쓰인다. 타이밍은 기회의 뜻을 지니지만, 우연과는 조금 다르다. 우연이란 마치 주사위를 던지는 것처럼 전후를 예측할 수 없이 여러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비결정적인 순간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타이밍은 그렇게 사방팔방의 가능성을 다 포괄하는 순간은 아닌 듯하다. 가령 강태공과 도쿠가와가 지난한 세월을 견뎌내어 기다린 것은 비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저 우연히 잘 풀릴 것을 기대하며 마냥 긴 시간을 허송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프랑스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앞에 붙는 유명한 수식어가 바로 ‘결정적 순간’이다. 1952년에 브레송은 20년 동안 찍은 사진 126장을 선별하여 ‘재빠른 이미지’라는 책을 냈는데, 여기에 쓴 서문에 ‘결정적 순간’이라는 두 단어가 등장한다. 브레송은 어느 장소를 보면 직관적으로 어떤 구성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사람이었고, 종종 상상 속의 장면이 실제로 벌어지기까지 기다렸다가 카메라로 찍곤 했다. 가령 인적 드문 기차역의 음침해 보이는 계단에 비둘기 떼가 모여 있다고 하자. 누군가 그곳을 통과한다면 새들은 어느 방향으로 제각각 날아오르게 될까? 혹은 비가 많이 내려 길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면, 물웅덩이를 건너가는 사람은 어떤 뛰는 동작을 취하게 될까? 그런 순간들을 찍기 위해 브레송은 근처에서 몇 시간이고 잠복했다는 일화가 있다.

온종일 돌아다녔어도 만족할 만한 사진을 얻지 못하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무얼 보자마자 바로 들이대듯 셔터를 눌렀는데 놀랄 만큼 결과가 괜찮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모든 게 우연히 얻는 행운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준비된 기다림 덕분이 아닐까. 브레송이 평소에 프레임 안에 넣을 구도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어떤 순간이 왔을 때 직관적으로 ‘찰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와 함께해온 삶을 돌아보며 브레송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난 평생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랐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타이밍도 결국엔 그런 것이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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