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위에서 활음으로 울리는 시의 에포케epoch
그것은 속도와 힘으로 가득한 것이다. 놀리고 싶은 것들이 생길 때는 그 뒤에서 따라 했는지도 모른다. 가령 희망이거나 가능성. 아니면 상관없어 이런 말들
굴뚝을 돌아 다른 구멍을 찾아 헤맸는지도. 거짓을 믿어주는 승리자의 배려이고. 세무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박수 치며 수박을 깨는 것도 괜찮지 싶다
- 「들판 위의 챔피언」 부분
형성하는 표면일 뿐, 보존과 진행은 풍부해지시며, 시든 풀을 들고 웃고, 묻고, 물어뜯고, 정지하고 시든 풀을 두고 가면, 거기는 어떻게 되는 거고,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데, 누구의 짓인지 의논을 내리는 모의실험의 양상과 다시 거절의 구조가 시작된다 해도, 안 된다는 것은 밀폐의 수사가 아니다
- 「클래식」 부분
읽다 보면 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의미소의 파편들. 순진하게 따라가다 보면 끝내 길을 잃고야 마는 낯선 세계가 펼쳐진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조재룡에 따르면 이러한 무연(無緣)의 외관을 가진 문장들은 서로 교섭하며 ‘이상한 교신’을 흘려보내는 ‘트랜스의 가능태’이다. 조재룡은 “작품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무엇이 아니라, 시집 전반에서 다른 작품들과 모종의 교류를 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 파편화된 문장과 의미가 서로 교섭하고 새롭게 짜이는 ‘트랜스로직’에 따라 다시 제자리를 찾아나가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 시집의 서시인 「들판 위의 챔피언」에서 “속도와 힘으로 가득한” “그것”도, “굴뚝을 돌아 다른 구멍을 찾아 헤”매는 주체도, 미지의 대상이자 무한의 가능성으로 존재하지만, 시인은 하등 “상관없”어 한다. 이지아는 머금고 있던 본질을 깨뜨려, 날것 그대로를 드러내는 데 집중할 뿐이다. 또한 「클래식」에서 볼 수 있듯 “안 된다는 것은 밀폐의 수사가 아니”라거나 “형성하는 표면일 뿐, 보존과 진행은 풍부”하다는 식의 이질적인 추상의 문장으로 채워가는 작업을 통해 판단 중지(에포케)의 상태에서 더욱 풍요롭고 활달해진 시의 경지를 보여준다.
모양 없는 흔적들이 이루어내는 부조리극
컨테이너 타고 기차 타고 창고를 털어, 마을버스 타고 손잡이에 기대 코 골기. 기대는 모든 것은 사귀는 것 같아. 같이 줄 서기. 대구에서 두 시간 동안 맛집을 찾아서, 이건가. 여기다. 우리가 찾던 곳. 신발장에 있는 신발들을 섞어놓는다. 슬리퍼를 찾는 동안 장화를 확인하기. 너는 핸드폰을 들고 멀리 간다. 여보세요. 출장이야. 출장은 일하러 멀리 가는 길. 나도 보고 싶지. 여긴 끝장이 아닌 길.
- 「벙커」 부분
홍학 저 친구는 인간들에 중독됐어.
클립 인간 없인 안 되겠지.
홍학 하지만 이제 그만 인간의 자리는 끝났으면 좋겠어.
클립 절대 권력이네. 오랫동안.
홍학 이 자연계에서.
클립 물러나야지.
홍학 (모직 코트에서 떨어진 단추를 보여주며) 어, 이게 여기.
클립 나도 한번 만져볼 수 있나
홍학 참 예쁘군.
클립 빛나네.
홍학 구멍은
클립 고백인가
홍학 여백이네.
- 「반인류를 향한 태양과 파동과 극시」 부분
이 시집의 또 다른 특징은 각기 다른 위치와 입장에 선 주체들이 대화하고 엇나가는 부조리극이 넓게 포진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소 희극적이고 엉뚱해 보이는 상황에서 본질에 대한 질문을 추구하려는 이지아의 시도는 무대와 관객을 분리해 감정 이입을 중단시키고 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힘을 갖게 하려 했던 브레이트의 ‘소격 효과’에 충실한 듯 보인다. 대사와 지시문의 조합인 극시처럼 읽히거나(「벙커」), 혹은 극시로 조합된 장시(「반인류를 향한 태양과 파동의 극시」) 등을 따라 읽다 보면 공들여 지은 집을 단번에 허물어버리듯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시적 요소들이 모양 없이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체 시집이 교차하여 그려내는 궤적은 진리의 달을 겨냥하는 손가락의 한 방식일 수도 있겠다.
현실을 뒤집어 진실을 보아내는 당찬 시인의 출사표
어둠은 의자도 없이
잠시 머물 숙소에 커튼을 단다
남겨진 봄을 그리워하면서
마차를 끄는 아이와 헛간을 치우는 아버지의 대화가
어느 한밤의 농구공처럼
떨리고 굳건해지고
다음 주는 상황이 더 나빠지고
지진과 화산도 일어나지만, 자연의 재앙이 한밤의 축복으로 들린다
아무도 우리를 둥지 속에 넣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보여줄 수 없지만, 수염이 없는 턱을 만진다
- 「어느 한밤의 농구공에 대한 믿음」 부분
이렇듯 집요하게 구성과 체계에서 벗어나 무한히 변화해나가는 여정을 담은 이지아의 첫 시집은 시인의 창작에 대한 입장 자체를 대변한다. 농구공 같은 일상적 소재들의 리듬 속에서 전혀 다른 감각을 길어내는 시인은, “날것 그대로의 싸움을 견인해내는 전복의 힘”(조재룡)으로 본질을 관통해내고야 만다. 끝내 이 만만찮은 여정을 통과해낸 당신이 마주할 카타르시스의 세계는, 인간이 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바로 “그것”이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