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의 순간] ○○○○○○… 한글, 진주알로 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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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11.05. 오전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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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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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00년/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조선일보 100년 한글특별전 ‘ㄱ의 순간’ 참여 작가 인터뷰] ④ 작가 고산금

지난 30일 서울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난 고산금 작가가 신작 ‘조선일보 1950년 6월 25일’ 앞에서 핀셋으로 인공 진주를 들어보이고 있다. 뒤편에 보이는 당일 조선일보 인쇄본도 함께 전시된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보이지 않는다. 보여도 읽을 수 없다. 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산금(54) 작가는 신문지에서 활자를 모두 걷어내, 활자가 있던 모든 자리에 인공 진주를 붙인다. 그것은 일종의 점자(點字)처럼 보인다.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참여하는 고 작가는 일간지 한 면을 골라 글자와 이미지를 모두 제거한 뒤, 그 자리에 지름 4㎜ 인공 진주를 올리는 작업을 20년간 해오고 있다. 한글을 숨김으로써 오히려 한글에 골몰하게 한다. 이를테면 이번 전시 출품작 ‘조선일보 1950년 6월 25일’은 제목처럼 당일 발행된 조선일보 신문을 활용한 것이다. “의미를 물질화한다. 지움으로써 집중하고 유추하게 한다.” 전시는 11월 12일부터 내년 2월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린다.

이 작업은 작가가 실제로 겪은 실명(失明)의 경험과도 관련 깊다. 미국 뉴욕에서 생활하던 1999년, 정확한 원인조차 모른 채 그는 6개월간 암흑 속에 놓여 있었다. “눈이 멀자 정작 궁금한 건 ‘나’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TV 세 대를 방에 갖다 놓고 뉴스를 들었다. 충족되지 않았다. 소리는 사라져 버리니까.” 천만다행 시력이 돌아왔다. “이후 내 욕망의 대상은 문자가 됐다”고 했다. 부조(浮彫)를 하느라 온갖 재료를 모아두던 그는 집에서 우연히 인공 진주 더미를 발견했고, 이듬해 남북 정상회담 기사가 실린 뉴욕타임스 1면을 시작으로 법전, 소설, 노랫말 등 세상의 온갖 기록물을 진주로 대체하고 있다.

이상 시인의 시 '오감도'가 양각되도록 볼펜으로 판화지를 빼곡히 칠해놓은 신작 '오감도'. 고산금 작가는 "길을 찾기 위해 어두운 바닥을 훑는 느낌으로 제작했다"고 말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또 다른 출품작 ‘오감도’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독해 불가의 지점을 드러낸다. 이상 시인의 난해시가 양각된 종이를 판화지 밑에 받쳐놓고 볼펜으로 판화지 위를 가득 칠해 어둠 속에서 글자를 드러낸 것이다. “'오감도'에는 영어·한글·한문, 심지어 숫자까지 등장한다. 당대의 언어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글자임에도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부호라는 점이 흥미롭다.”

읽을 수 없는 그 언어를 사람들이 간혹 손으로 만진다. “진주를 떼가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런다고 의미를 손에 넣을 수 없다.

[정상혁 기자 tim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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