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순히 금을 넘기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에서 허락한 마약, 게임 '문명5'에 등장하는 간디의 대사로 알려진 밈(Meme)이다. 물레를 돌리는 그 간디, 맞다. 그러나 게임 세계 속 그는 걸핏하면 핵미사일을 만들고, 국가 간 협상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일삼는 폭력적 모습을 보인다. 비폭력주의자가 아니라 폭력 그 자체인 'be폭력주의자'다.

문명5의 '패왕 간디' 탄생기는 이렇다. 간디 캐릭터의 폭력성 수치는 실존 인물의 사상처럼 최저값인 1이다. 그런데 플레이 도중 폭력성 값에 –2 효과가 적용되는 상황이 있다. 1에 –2가 더해지면, 그 값이 –1이어야 한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음수(–)를 인식하지 않고 한 바퀴 돌아 최대치인 255로 반영됐다. 패왕이 탄생했다. '폭력적 간디'라는 모순은 사람들에게 큰 재미를 주었다.

"순순히 금을 넘기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문명5 패왕 간디'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유명한 밈이다.
"순순히 금을 넘기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문명5 패왕 간디'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유명한 밈이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다. 첫째도 둘째도 사랑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로 알려진 말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다. 게임 속 간디의 말을 빌려 바꾸자면, "순순히 예수를 믿으면 지옥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필코 구원하겠다는 의지보다는, 반드시 지옥에 보내겠다는 위협의 의미가 더 짙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전하는 일을 '복음 전도'라고 한다. 때로는 거리의 과격한 전도자를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느끼지만, 1에서 255까지 적극성의 차이가 있을 뿐, 메시지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꼭 지옥에 보내야만 하는 하나님이 정녕 사랑의 신이 맞는지, 심각한 도전을 던진다. 어쩌면 그리스도교 역시 '패왕 예수'라는 모순을 전하고 있는 것 아닐까?

사실, 성서는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 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복음의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 로마제국이 '다른 나라'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분명 정치적 의미가 있다. 현실과 분리될 수 없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 세계가 아니라, 로마로 대표되는 폭력 통치의 종식, 곧 새로운 세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태복음은 같은 메시지를 '하나님나라'가 아닌 '하늘나라', '천국'으로 표현한다(마 2:17). 그러나 하늘나라는 저승이 아니라, 차마 '하나님'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던 공동체의 우회적 표현이다. 그리고 우회적 표현인 천국 역시도 사후 세계가 아니라, 제국과 대조되는 세상, 땅의 질서의 대안이 되는 새 질서의 은유다. 예수님의 복음은 폭력과 지배로 이룩한 세상이 물러가고 참된 정의와 평화의 세상이 도래함을 선언하는 기쁜 소식이다.

그 나라는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는 우리 잘못을 하나하나 고백하는 뉘우침보다 크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다가오는 새 세상에 걸맞게 지배와 폭력을 털어 버리며 사랑과 평화로 삶을 조정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믿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변화로 세상을 초대하는 사람들이다. 그 초대를 '선교'라고 한다.

초대교회가 피할 수 없는 치명적 질문이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하던데, 도대체 어디에 왔느냐?'라는 도전이다. 초대교회는 오늘날 전도자와 같이 '죽음 이후'라는 손쉬운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먼 미래로 회피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교회'를 가리켰다. 그 속에서 그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말했다. 그 대답의 대가는 무척 컸다.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보여야 했다.

초대교회는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 다른, 모든 지배와 폭력이 단념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했다. 신분·성·재산에 차별 없이 모두 한 몸이 되었다. 그렇게 서로 무차별적으로 사랑하여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설령 죽음 이후를 말하더라도, 그들은 사후 세계보다 '몸의 부활'을 이야기했으며, 죽음 이후에도 그들이 살던 세상의 회복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그 세상을 현실로부터 아주 멀리 보내 버렸다. 복음은 삶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문제가 되었다. 물론 사후 세계가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서 역시도 죽음 이후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언젠가 사랑과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오시리라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반드시 하늘과 땅이 하나 될 때가 온다는 희망, 그 희망으로 현실을 살아 내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후 세계를 향한 믿음이 마냥 보잘것없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천국과 지옥이 간절할 때가 있다. 선량한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맞을 때, 죽음 이후 그 사람이 생전에 받지 못한 보상을 받기를 바란다. 또한, 누군가를 지옥과 같은 삶으로 내몬 악인이 죽는 날까지 심판을 받지 않는 모습을 본다면, 죽음 이후 상응하는 심판이 있기를 바란다. 유예된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사랑과 정의의 마음이 있다면, 유예된 사랑과 정의가 반드시 실현되리라 믿는다면, 그 아름다운 마음을 죽음 이후로만 미뤄 두지 않도록 하자. 오늘을 사랑과 정의로 살아가면서 세상 속 지옥을 조금씩 걷어 내자.

이것이 우리가 세상으로 보냄 받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영혼들을 지옥에 보내는 하늘의 패왕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랑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 유혈 사태 가득한 옛 세상에, 평화와 사랑의 새 세상이 다가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자. 오늘 우리의 삶으로.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이룹시다.
주님의 사랑을 나눕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대한성공회 감사 성찬례 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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