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뎐’ 비인간, 인간에게 인간성을 되묻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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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10.23. 오후 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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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 새로고침]




<구미호뎐>(티브이엔)은 한국 민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판타지 로맨스물이다. <도깨비> <호텔 델루나>의 계보를 잇는 작품으로, 아름다운 영상과 참신한 세계관이 흥미를 돋운다. 발상을 전환해 늘 여자로 재현되던 구미호를 남자로 설정했다. 그것도 요괴가 아닌 ‘백두대간의 산신’으로 지위를 높였다. 생소하지 않냐고? 어차피 개연성과 설득력은 이동욱의 얼굴에서 나온다. <도깨비>에서 저승사자로 출연한 후, 이동욱의 ‘비인간적인 잘생김’에 주목한 사람들이 쓰임을 정확히 찾아주고자 기획한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기본 장르는 판타지 로맨스이지만, 회마다 호러, 액션, 코미디가 적절히 가미된다. 여자 주인공 지아(조보아)가 ‘도시 괴담’을 다루는 티브이 프로그램 피디라는 설정은 기이한 사건들을 끼워 넣기 좋게 만든다. 실종, 살인, 조난 등의 사건에 샤머니즘, 과거사 등을 엮는 솜씨가 뛰어나다. 남자 주인공 이연(이동욱)이 요괴들과 벌이는 액션도 화려하다. 특히 동생 이랑(김범)과 벌이는 속도감 넘치는 액션은 배경음악과 더불어 영화 <트와일라잇>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하기야 멋진 비인간 남성이 인간 여성을 사랑하고, 그를 해코지하려는 비인간 남성과 싸운다는 설정이 <트와일라잇>의 구도 아니던가. 요컨대 이연에겐 ‘구미호’라는 설정 외에, <도깨비>의 ‘저승사자’와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 이미지가 두루 섞여 있다. 드라마의 웃음은 주로 ‘내세출입국관리소’로 대변되는 근대화된 저승이 맡는다. 드라마는 웹툰 <신과 함께>를 인용하지만, 그보다 신선한 묘사가 많다. 이승과 저승을 꿰뚫어 보는 탈의파(김정난)의 안정된 면모가 세계관을 잘 이해시킨다. 또한 이연과 이랑의 티격태격을 비롯한 웹소설적인 대사들이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가 담긴 드라마를 너무 어둡지 않도록 해준다.

드라마에는 두 개의 큰 수수께끼가 있다. 600년 전 아음의 죽음과 21년 전 지아 부모의 실종이다. 지아는 아음의 환생으로, 둘 다 놀랍도록 강인한 캐릭터다. 지아는 9살에 교통사고로 부모가 실종되는 기이한 일을 겪는다. 부모로 둔갑한 여우의 공격을 받지만, 똑똑한 대처로 살아남는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 외로운 세상에서 버티며 홀로 자랐다. 보통사람들은 괴담을 ‘안 믿지만 무서워’한다. 그러나 지아는 ‘믿지만 안 무서워’한다. 그는 자료를 모으고 공부하면서 신비한 세계의 일원인 양 살아간다. 실종된 부모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이연을 시험하기 위해 자기 몸을 날리고, 감히 그의 목에 마취제를 박아넣는다. “나는 너를 기다렸어”라는 말과 함께. <도깨비>의 소녀에 비해 얼마나 능동적인 인간 여자인가! 그는 용감할 뿐 아니라, 이타적이다. 노인으로 둔갑한 장승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고, 호기심 많은 여고생을 격려해주며, 자신을 괴롭힌 자매 귀신의 원한을 풀어줄 만치 오지랖이 넓다.



아음도 ‘백두대간의 산신’을 애완견 취급할 정도로 패기 넘치는 소녀였다. 버려진 공주로 활을 연마했는데, 임금 노릇을 하는 이무기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사람으로 둔갑한 이무기’라는 알리바이가 있지만, 강력한 ‘살부의 모티브’가 있다. 딸로서 아버지를, 백성으로서 임금을 죽이겠다는 급진적인 욕망이 살아 있다. 한편 아음과 지아에게 이무기의 조각이 깃들어 있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흔히 이런 서사의 여주인공들은 ‘순수한 희생제물’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스스로 악당과 맞서 싸운 전사이자 악당의 조각을 품은 ‘오염되고 분열된 존재’라는 설정은 여주인공의 입체성을 더욱 높인다.

이연과 이랑의 신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인간세계에서 부자로 살고 있지만, 직업이 없다. 둔갑한 여우인 구신주가 수의사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연의 집사이자 가사도우미 노릇도 하는 구신주는 이연을 ‘고귀한 혈통’이라 부른다.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이 교수라는 전문직이었고, <도깨비>의 김신이 재산관리인을 둔 자본가였던 것에 비해, <구미호뎐>의 이연은 숫제 귀족이다. 이는 갈수록 노동이 천시받고, 계층이동이 불가능해진 세습자본주의의 상황을 반영한다. <어바웃 어 보이>(2002)가 개봉했을 때만 해도 ‘먹고살 걱정 없는 백수’를 딱히 선망하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직업적 성취를 중시하는 산업시대의 가치관이 사라졌다. 펜트하우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미드’를 보는 무위도식의 삶을 최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한편 이랑은 안온함에 만족하지 못하는 ‘위험한 상류층’을 상징한다. ‘형제 콤플렉스’를 운운하며 악동처럼 사고를 치는 이랑은 흡사 엇나간 재벌 3세를 연상시킨다. 이연과 이랑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시청자들의 정서 속에 ‘귀족 같은 초엘리트’를 선망하며, 큰 범죄를 저지르는 상류층만 문제 삼는 ‘가재, 붕어, 개구리’의 관념이 녹아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다만 이랑의 행위 중 동물을 학대하는 인간들을 응징하는 것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산불로 뭇짐승들을 태워 죽인 인간들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는 설명도 생태 파괴적인 문명을 반성하게 한다. 한편 드라마는 1950년대 섬마을의 집단 이주와 식인, 추락사로 이어진 친족 간 아동 성폭행, 묵형의 흔적으로 암시되는 ‘묘청의 난’ 등을 풀어놓는데, 이런 밑밥들을 통해 조명되는 것은 인간의 잔혹함과 탐욕이다. 이무기가 절대 악인 양 등장하지만, 이무기에게 산 제물을 바쳐가며 수백년간 수명을 연장해온 인간의 끔찍함이 이무기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왜 구미호는 이런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이 되고 싶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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