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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의병 유인석의 생애와 업적과 활동을...
ek31**** 조회수 2,709 작성일2019.06.03
의병 유인석의 생애와 업적과 활동을 알려주세요 내공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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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유인석

을미의병 최고 지도자, 호좌 의병진을 이끌다

[ 柳麟錫 ]

출생 - 사망

1842.1.27. ~ 1915.1.29.

화서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

의암 유인석(柳麟錫, 1842. 1. 27~1915. 1. 29)선생은 1842년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의암(毅菴), 자는 여성(汝聖),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인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간 선생은 이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가 당대의 거유(巨儒) 화서 이항로와 일찍이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입양되던 그 해에 화서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화서 문하에는 임규직, 이인구, 이준, 김평묵, 유중교 등의 인물들이 운집해 있었기 때문에 선생으로서는 최고의 학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선생은 훗날 화서학통을 이어받는 김평묵, 유중교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선생은 일찍부터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존화양이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유림의 대변자로서 조정에 소환된 스승 이항로를 따라 상경, 한 달 가량 서울에 머물면서 혼란한 시국상과 어지러운 민심을 직시하고 위정척사 사상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그 뒤 쇄국정책을 견지하던 대원군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1876년 일제의 강압으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양국 대표들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선생을 비롯한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은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다. 결국 이들의 요구는 묵살되어 조약은 체결되고 말았지만, 이 상소는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제천에서 의병항쟁 준비를 시작하다

1893년 선생은 제천 장담으로 이사했다. 양가의 재당숙인 유중교가 1888년 춘천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와 제자를 양성하던 중 1893년 작고하자, 선생은 유중교가 닦아 놓은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얼마 뒤 선생은 바로 이곳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이 무렵 일제는 청일전쟁을 개시하는 한편 김홍집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한국의 내정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함으로써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갑오개혁이라 불리는 이때의 개혁 중에서도 전통적인 의복제도를 서양식 복제로 개정한 의제개혁은 유생들을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했다. 또한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제는 그들이 한국 침략정책을 수행해 가는데 큰 걸림돌로 여겼던 명성왕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는 1895년 11월 17일을 기해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을 바꿈과 동시에 성인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다. 바로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의병항쟁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선생의 의병항쟁은, 제2차 의제개혁 직후 '변고'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895년 5월 2, 3일 양일간에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이 행사는 이후 11월 거의 직전까지 대개 10일의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는 곧 의병항쟁의 준비단계였으며 후일의 거의에서도 여기에 참석한 인물들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문인들의 거의로 시작된 호좌 의병진

선생의 호좌 의병진은 먼저 문인들의 거의에서 유래한다. 즉 선생의 문인들인 이춘영과 안승우가 1896년 1월 12일 김백선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을 축출하였다. 이것이 호좌 의병진의 발단인 것이다. 이들은 곧이어 제천에서 서상렬, 이필희, 신지수, 이범직 등의 호응을 얻어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이필희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렬을 군사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1월 22일 단양에서 공주병참 소속의 관군과 일본군 혼성부대와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혼성부대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자 서상렬과 이춘영은 죽령을 넘어 풍기로 들어갔고, 안승우는 영동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전력의 분산을 막고자 전령을 보내 이들을 모두 영월로 모이게 했다.

영월에서 회합한 이필희 이하 이춘영, 서상렬, 안승우 등은 의병장이 되어 줄 것을 선생에게 간청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복수보형(復讐保形: 국모의 원수를 갚고 의리를 지킨다)'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되었다. 선생은 의병대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여 사기를 고무하였다.

의병대장으로 취임, 충주성을 공격하다

호좌 의병진은 거의 초기에 안승우, 이필희, 이춘영 등이 모집한 지평 의병 400여명을 주축으로 하고 화서연원을 중심으로 한, 각 지역단위의 소규모 의병진들이 연결 되어 연합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의병대장에 취임한 선생은 제천으로 회군해 곧바로 충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선생은 당시 친일 개화파 관리로 알려진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 등 이른바 토왜(土倭)들을 참수, 친일개화정책을 펼치던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호서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는 관찰부가 있는 곳이고 더욱이 그곳에는 관군이 400명, 일본군이 수백 명, 지방군이 400명이나 집결해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면 호서를 장악함은 물론 뒤로 영남과 호남을 배경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의병진은 1896년 2월 16일 의외로 쉽게 충주성을 장악하였다. 승지 우기정과 이호승이 각각 3천명, 5백명의 병력을 원조해 와 군사수는 일본군과 관군측에 비해 우세하였다. 하지만 실제 총을 가진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하여 신식 병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의병진이 전력면에서는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기습공격을 감행 하자, 그 기세에 눌린 관군과 일본군은 항전을 포기하고 탈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충주성에 입성한 선생은 먼저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는 한편,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표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또한 의병진의 세력을 확장 시키기 위해 서상렬, 원용정, 홍선표 등을 영남으로, 이범직을 호서로 파견하여 각지의 민병을 모으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상렬은 안동, 예천, 봉화, 순흥, 풍기, 영천 등지의 의병진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상주에 있는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 하였고, 이범직은 삭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백성의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하였다.

한편, 충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성의 외곽을 포위, 의병진의 보급로를 차단시킨 채 공성작전을 펼쳤다. 그 뒤 의병진은 계속되는 접전으로 전력이 소모된 데다가 보급로를 차단당해 물자조달에 어려움이 커 더 이상 충주성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의 의병진은 3월 4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환군하였다.

중국 요녕성 신빈현 평정 사진에 위치한 선생의 기념원. 이곳은 을미의병 최고 지도자였던 선생과 여성의병장 윤희순 선생 가족을 비롯, 45가구가 집단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벌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중앙내각의 의병해산 시도를 피해 서북행 결심

선생의 호좌 의병진이 제천에 집결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이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문경의 이강년, 영춘의 권호선, 원주의 한동직, 횡성의 이명로 등의 의병장들이 각기 일군을 거느리고 선생 의병진에 합류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의병진은 이후 5월 26일 제천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수안보, 가흥, 음성, 단양 등지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활발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격장에 임명된 이강년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한편 이즈음 중앙의 정국에서는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친러내각이 조직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새 내각은 그 동안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코자 단발령을 철회하는 한편, 각 지방으로 선유위원(宣諭委員)을 파견해 의병을 해산시켰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군은 남한산성 의병진을 격파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선생의 호좌 의병진에 압박을 가해 왔다. 단발령 이 철회되고 을미사변의 원흉격인 김홍집 이하 친일파들이 축출된 지금에는 거의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정부가 망국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특히 일제 침략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의병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관군은 마침내 5월 26일 선생의 의병진에 대해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의병들은 용전분투 하였으나 전력 열세로 결국 제천성을 내어주고 말았다. 선생의 의병진은 제천전투에서 실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그로 말미암아 공세를 취하던 입장에서 이후로는 줄곧 수세로 몰리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최후의 거점이던 제천성마저 상실한 선생의 의병진은 일단 단양에 모여 전열을 수습하였다. 그 동안의 항전에서 인력과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항쟁을 펼쳐 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선생은 서북행을 결심하였다.

서간도로 망명, 눈물을 머금고 의병 해산

선생의 의병진은 단양을 떠나 풍기, 영춘, 충주, 음성, 괴산, 원주 등지를 전전하며 간간히 관군 및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고, 6월 10일에는 원주 강천(康川)에서 드디어 서북행의 장도에 올랐다. 그 후 영월, 평창정선, 강릉, 대화를 거치고, 양구, 회양, 평강, 소금강, 안변, 영흥을 지나는 동안 소토장이었던 서상렬이 전사하는 등 갖은 고초를 다 겪은 뒤, 마침내 서북지방에 당도하여 양덕, 맹산, 덕천 등지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도처에서 관찰사, 군수가 의병진을 압박하였다. 때문에 군사를 더 이상 주둔시킬 수가 없어 당초의 계획대로 재기항쟁을 도모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청(淸)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고, 이것이 여의치 못하면 일제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재기항쟁을 준비할 생각으로 서간도 망명을 떠났다. 그리하여 선생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을 계속하여 영변, 운산을 거쳐 8월 23일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여기서 재차 친일 개화파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발표한 뒤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懷仁縣)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의 지방관리는 의병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입국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이에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9월 28일 혼강(琿江)변에서 그때까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이곳까지 따라온 219명의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선생의 을미의병 항쟁은 종식되었고, 이후 보다 장기적인 형태의 항일투쟁으로 그 방향을 전환시켜 가게 된다.

선생이 219명의 의병을 해산했던 장소. (만주 환인현 사첨자)

의병해산 후 선생은 한인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 오도구로 가 정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1897년) 3월에는 고종황제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했으나 곧 이곳으로 되돌아 왔다. 이 무렵 선생의 문인사우들도 적당한 수의처(守義處)를 물색, 대거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에 선생은 이들과 함께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忍痛含寃 迫不得已)"라고 하면서 항일투쟁의 의지를 다져갔다.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제자 양성

1900년 7월 선생은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귀국하였다. 중국 북부지역이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되자 선생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선생은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이 지역 주민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게 된다. 즉 선생은 산두재(山斗齋, 평산), 숭화재(崇華齋, 개천), 흥도서사(興道書社, 은율), 옥산재(玉山齋, 용천)를 중심으로 철산, 안주, 선천, 평양, 용강, 해주 등지를 부단히 왕래하면서 제자들을 기르고, 또 향음례와 강습례를 수시로 열어 존화양이에 입각한 항일투쟁의식을 고취시켰던 것이다.

그 후 선생은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그를 이은 ‘정미7조약’을 계기로 드디어 연해주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1908년 7월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선생은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것이다. 2차에 걸친 서간도 망명 이후 세 번째 국외 망명이었으며, 이후로 선생은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배 안에서 선생은 자신의 비장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경술국치에 반대하는 서명운동 개진

연해주로 간 선생은 이상설 , 이범윤 등과 함께 노령 내의 분산된 항일세력을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10년 6월 10일 연해주 추풍(秋風) 재피거우에서 '십삼도의군'이 편성되었다. 선생에게 있어 '십삼도의군도총재'란 직위는 1896년 거의 이후 이때까지 전개해온 항일투쟁의 결과로 주어진 것으로, 이것이 선생의 항일투쟁의 대단원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군이 미처 항일무력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조국은 일제에게 병탄되고 말았다.

선생의 말년 거주지였던 만주 방취구(현재 관전현 보달원향 소고령지 제1소조 여우골)에 위치한 비석. 비석에는 "이조말기 조선유림 종장 저명의병장 유인석 호 의암, 만년에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1915년 3월 14일 병사. 향년 73세(…)공은 세상에서 ‘수화종신’을 실천하였다. 관전 만족자치현 민족사무위원회 사지판공실 1994년 5월 일 세움"이라고 되어 있다.

경술국치의 비보가 전해지자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은 신한촌(新韓村)의 한민학교에 모여 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성명회라는 회명은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聲彼之罪 明我之寃)'는 뜻이다. 그 총대에는 선생이 추대되었고 당일로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여 조국 광복의 그날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즉시 합병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중국, 러시아 인근에 산재한 주요 독립운동가가 망라된 8,624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의 서명을 받았다. 선생이 서두에 오른 이 서명록은, 열강에게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천명하고 그 지지와 후원을 요청하는 [성명회 선언서]의 부본으로 첨부되어 각국 정부 및 신문사에 발송되었다.

이 무렵 일제는 연해주 일대가 점차 항일투쟁의 본거지로 변해가자 러시아에 대해 이 문제를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러시아 당국도 할 수없이 이상설, 이범윤, 김좌두, 이규풍 등의 항일운동가들을 일시 체포 투옥하게 되었다. 이처럼 연해주의 형세가 급변하자 선생은 다시 최후의 망명지가 된 서간도로 이거할 결심을 하였다.

1913년 2월 선생은 서간도로 가는 도중 포시에트(木花村)에 잠시 머물면서 중화론적 화이관에 입각해 동서양의 문물제도 등을 문답체의 형식으로 논술한 유명한 [우주문답]을 저술, 간행하였다. 그리고 1914년 3월 선생은 봉천성의 서풍현으로 옮겨 세 번째 서간도 망명 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는 마지막 여행을 떠나 관전현의 방취구(芳翠溝)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1915년 1월 29일, 74세를 일기로 병사하여 파란 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895 충북 제천에서 거의, 의병장으로 활동

1905~1908 일제에 대항, 의병항쟁을 격문으로 독려

1910 연해주 지역 13도의군 도총재, 성명회 회장

[네이버 지식백과] 의암 유인석 [柳麟錫] - 을미의병 최고 지도자, 호좌 의병진을 이끌다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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