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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유인석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hund**** 조회수 6,509 작성일2003.10.24
의병장 유인석에 대해 알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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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인 석(1863-1939)



가. 성장과정

유인석 선생은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과 어머니 고령 신(申)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 족숙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간 선생은 이후 양가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위정척사사상의 원류인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891년과 1893년에 김평묵과 유중교가 죽자, 이항로―김평묵―유중교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정통도맥을 승계하게 됨으로써 학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1893년 선생은 향리인 가정을 떠나 제천 장담(충북 제원군 봉양면 장담리)으로 이사하였다. 양가의 재당숙인 유중교가 1888년 춘천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와 강학을 하며 제자를 양성하던 중 1893년 작고하자, 선생은 유중교가 닦아 놓은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 이거해 온 것이었다. 선생은 바로 이곳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나. 업적

○ 항일의병 활동

일제는 청일전쟁을 개시하는 한편 김홍집을 총리로 하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한국의 내정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함으로써,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갑오개혁이라 불리는 이때의 개혁 중에서도 전통적인 의복제도를 서양식 복제로 개정한 의제개혁은 유생들을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제는 그들이 한국 침략정책을 수행해 가는데, 큰 걸림돌로 여겼던 명성황후 민비를 무참히 시해하는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1895년 11월 17일을 기해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을 바꿈과 동시에 성인 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다. 바로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의병항쟁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선생의 의병항쟁은, 제2차 의제개혁 직후 '변고'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895년 윤 5월 2·3일 양일 간에 원근의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이 행사는 이후 11월 거의 직전까지 대개 10일의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는 곧 의병항쟁의 준비단계였으며, 후일의 거의에서도 여기에 참석한 인물들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제천에서 서상렬, 이필희, 신지수, 이범직등의 호응을 얻어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이필희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렬을 군사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1월 22일 단양에서 공주병참 소속의 관군과 일본군 혼성부대와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혼성부대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자, 서상렬과 이춘영은 죽령을 넘어 풍기로 들어갔고, 안승우는 영동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전력의 분산을 막고자 전령을 보내 이들을 모두 영월로 모이게 했다.

영월에서 회합한 이필희 이하 이춘영, 서상렬, 안승우 등은 거수, 발정을 포기하고 의병장이 되어 줄 것을 선생에게 간청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복수보형(국모의 원수를 갚고 의리를 지킨다)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되었다. 선생은 의병대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격고팔도열읍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의병대장에 취임한 선생은 제천으로 회군해 곧바로 충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선생은 당시 친일 개화파 관리로 알려진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등 이른바 토왜들을 참수, 친일개화정책을 펼치던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호서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는 관찰부가 있는 곳이고, 더욱이 그곳에는 관군이 400명, 일본군이 수백 명, 지방군이 400명이나 집결해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면 호서를 장악함은 물론 뒤로 영남과 호남을 배경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의병진은 1896년 2월 16일 의외로 쉽게 충주성을 장악하였다. 승지 우기정과 이호승이 각각 3천 명, 5백 명의 병력을 원조해 와 군사 수는 일본군과 관군 측에 비해 우세하였다. 하지만 실제 총을 가진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하여 신식 병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의병진이 전력면에서는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그 기세에 눌린 관군과 일본군은 항전을 포기하고 탈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충주성에 입성한 선생은 먼저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는 한편, [격고내외백관]을 발표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또한 의병진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서상렬, 원용정 홍선표 등을 영남으로, 이범직을 호서로 각각 소모사로 파견하여 각 지의 민병을 모으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상렬은 안동, 예천, 봉화, 순흥, 풍기, 영천 등지의 의병진과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상주 태봉)의 일본군 병참 기지를 공격하였고, 이범직은 삭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백성의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하였다.

한편, 충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성의 외곽을 포위, 의병진의 보급로를 차단시킨 채 공성작전을 펼쳤다. 그 뒤 의병진은 계속되는 접전으로 전력이 소모된 데다가 보급로를 차단 당해 물자조달에 어려움이 커 더 이상 충주성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의 의병진은 3월 4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환군하고 말았다.

선생이 충주·제천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병항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중앙의 정국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을미사변 이래로 친일내각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고종 황제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군이 지방으로 출동한 틈을 타,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김홍집의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이범진, 이완용, 윤치호 등을 중심으로 친러내각이 조직되었다. 새 내각은 그 동안,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단발령을 철회하는 한편, 각 지방으로 선유위원을 파견해 의병을 해산시켰다.

중앙에서 파견된 선유사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은 남한산성 의병진을 격파한 뒤, 그 여세를 몰아 선생의 호좌의병진에 압박을 가해 왔다. 단발령이 철회되고, 을미사변의 원흉격인 김홍집 이하 친일파들이 축출된 지금에는 거의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정부가 망국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특히 일제 침략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의병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장기렴의 관군은 마침내, 5월 26일 선생의 의병진에 대해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의병들은 용전분투하였으나, 전력 열세로 결국 제천성을 내어주고 말았다. 이 날의 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와 그의 제자인 홍사구가 전사해 의병진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선생의 의병진은 제천전투에서 실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그로 말미암아 공세를 취하던 입장에서 이후로는 줄 곧 수세로 몰리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최후의 거점이던 제천성마저 상실한 선생의 의병진은 일단 단양에 모여 전열을 수습하였다. 그 동안의 항전에서 인력과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항쟁을 펼쳐 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선생은 서북행을 결심하였다.

선생의 의병진은 단양을 떠나 풍기, 영춘, 충주, 음성, 괴산, 원주 등지를 전전하며 간간이 관군 및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고, 6월 10일에는 원주 강천에서 드디어 서북행의 장도에 올랐다. 그 후 영월, 평창, 정선, 강릉, 대화를 거치고, 양구, 회양, 평강, 소금강, 안변, 영흥을 지나는 동안 소토장, 서상렬이 전사하는 등 갖은 고초를 다 겪은 뒤, 마침내 서북지방에 당도하여 양덕, 맹산, 덕천 등지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도처에서 관찰사, 군수가 의병진을 압박하였다. 때문에 군사를 더 이상 주둔시킬 수가 없어 당초의 계획대로 재기항쟁을 도모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청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고, 이것이 여의치 못하면 일제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재기 항쟁을 준비할 생각으로 서간도 망명을 떠났다. 그리하여 선생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을 계속하여 영변, 운산을 거쳐 8월 23일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여기서 재차 친일·개화파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발표한 뒤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선생의 을미의병 항쟁은 종식되었고, 이후 보다 장기적인 형태의 항일투쟁으로 그 방향을 전환시켜 가게 된다.

200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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