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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긍호 민종식 유인석 에 대하여 의병운동을 어떻게 햇는지

민긍호 민종식 유인석에 대하여 의병운동은 어떻게 했는지 알려주세요 님들

숙제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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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ynh0****
작성일2007.06.24 조회수 4,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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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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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도덕 56위,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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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긍호(閔肯鎬)    미상∼1908. 2. 29
   민긍호는 경성(京城)에서 태어난 여흥 민씨의 일족으로서 광무 원년에 진위대에 들어가 강원도 원주(原州) 진위대 고성(高城) 분견대의 정교(正校)였다. 후에 춘천(春川) 분견대에 전입, 광무 4년경 정교의 직에 있었으나, 다음 해 처음으로 특무 정교의 자리에 앉게되자 발탁되어 원주 진위대에 전입되었다. 1907년 8월 5일, 마침 원주 진위대장 홍유형(洪裕馨)이 상경하여 부재중일 때, 충주 수비대 이궁(二宮) 소위 등 19명이 원주 수비대를 해산하기 위하여 온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에 그는,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써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를 거두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하고,
1. 1907년 8월 5일 부하들에게 비상나팔을 불게 하여 약 삼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우선 원주 우편 취급소를 습격하고, 계속해서 일경을 습격하였다. 이 때 순경들이 남산을 넘어 충주로(忠州路)로 퇴각하므로 추격하다가 이궁(二宮) 소위들을 만나 세 시간을 격전하였다.
그 후 민긍호는 의병부대를 많은 소 단위의 의병부대로 편성하였다. 이들 소의병부대는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 일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활약하였다. 이같은 민긍호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부대로는 허준(許俊)·이경삼(李京三)·김만군(金萬軍)·고석이(高石伊)·김군필(金君必)·이한창(李韓昌)·한기석(韓基錫)·한갑복(韓甲復)·윤기영(尹起榮)·이강년(李康秊)·변학기(邊鶴基)·조인환(曺仁煥) 등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강년의 부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8월 5일의 민긍호의 봉기 사실을 보고받은 일본 사령부는 경성 주재 보병 제47연대 소속의 2개 중대와 기관총 4정, 공병 1개 소대로 편성된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8월 10일 원주에 도착하여 의병 진압에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들은 중앙에 다음과 같은 보고문을 올렸다.   "지형을 잘 아는 토민의 비호를 받고 있는 폭도의 첩보 근무는 대단히 민활하여 교묘하게 우리 행동을 정탐하여 은현출몰(隱現出沒)하므로, 지대는 원주 도착 후 그 부근의 소탕에 노력하였으나, 수일간 조금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때 지방민들이 의병들과 협력하여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8월 12일 약 2백명으로 편성된 민긍호의 부대는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 분견소를 포위 공격한 후 이곳 일본 경찰과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때 많은 지방민이 의병부대로 지원해 왔으므로 음죽을 거쳐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는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여주·이천·양근 일대에서 의병들은 크나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군 사령부는 당황하여 대전·수원 주둔의 일군(日軍)을 이천·장호원·여주 방면으로 증강하고, 서울 주둔 일군을 양근·이천 방면으로 증파하였다.
3. 8월 중순 민긍호는 이강년과 같이 충주 공략의 작전계획을 세운 후 22일 행동을 개시하였다. 민긍호 의병 부대는 우측으로 공격하고, 이강년 부대는 좌측으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강릉 방면으로부터 약 2백명의 의병부대가 응원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이강년 부대에 앞서서 23일 오전 11시 30분경부터 충주를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충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이천 북방과 산지동(山地洞)에서도 격전을 벌였다.
4. 9월 7일 약 600명의 민긍호 의병 부대는 2개 부대로 나위어 홍천(洪川)을 습격하여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5. 9얼 10일 약 이백명의 의병이 재차 홍천을 기습하였다. 또 나머지 사백명의 의병은 낭천군아(狼川軍衙)를 기습 공격한 후 그곳 무기고에서 총기, 탄약을 접수하였다.
6. 9월 20일에는 춘천 남방으로 10리되는 정족(鼎足) 부근에서 약 삼백명의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이고,
7. 9월23일에는 횡성군 봉복사(鳳腹寺)에서 약 350명의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여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 후 민긍호 의병부대는
8. 10월 26일 횡성 둔촌(屯村)에서,
9. 11월 27일에는 홍천 서남 양덕원(陽德院)에서,
10. 12월 8일에는 원주 동북 작곡(鵲谷)에서 계속 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1. 1908년 2월 28일 원주 치악산 아래인 강림(講林) 동쪽 약 10리되는 등자치 부근에서 적에게 노출되었다. 적군은 강림에서 출발, 사자산(獅子山), 구룡산(九龍山) 방면으로 우회하여 등자치로 접근하였다. 이 때 민긍호의 부대는 그 10리 지점인 궐덕리(蕨德里)에 잠복하고 있었다. 29일 오전 11시에 접전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민긍호는 사로잡혀 강립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민긍호의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하여 민긍호를 탈환하고자 하였다. 의병 중의 한 사람이,   "우리 대장 민씨는 어디 계신지 소리를 치시오."   하였다. 이에 포박된 민긍호가 도주하자, 일군은 그를 사살하였다. 이때 의병 열한명이 전사하고, 의병진은 북방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 부대는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의병 부대였다. 그는 강원도·충청도·경상도로 전전하면서 전부 백여 회의 대소 전투를 벌여 일군에게 가장 많은 타격을 주었다.    일군의 기록인 "의병 토벌 결과의 개요" 가운데서도 민긍호 의병 부대에 대하여,   "각처에 있어서 약간의 폭도를 넘어뜨리기는 하였으나, 폭도의 출몰이 교묘하여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하다."   라고 하여, 일군들이 그들의 작전 실패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민긍호 의병 부대의 눈부신 활약과 그 전과를 그대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1만 의병의 성대한 행군!]

- 대규모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선생 -

 

 

민종식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고 그 와중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치욕적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하여 국치를 설욕하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늑결되어 국망의 위기가 닥쳐오자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우선 을사 5적과 이토오를 비롯한 일제 침략자들을 처단하자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무장투쟁을 통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달성하려고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3월 충청도 정산에서 안병찬 등 유생들과 함께 600여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봉기의 첫 기치를 올렸다.

 

첫 봉기 후 홍주성을 쳤으나 실패하고 공주관아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던 중 충청도 합천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후 처남 이용규 등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906년 5월 충청도 홍산에서 재봉기하면서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이어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천읍․남포읍성 등을 장악한 뒤, 5월 19일 홍주 장날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1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는 화포를 앞세워 홍주성의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였고, 드디어 홍주성 탈환이라는 큰 전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홍주성에 입성한 뒤 의병부대는 인근의 지방 유생들과 주민들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10여 일간 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5월 31일 새벽, 결국 홍주성을 내어주었다.

 

이후에도 정산 일대에서 의병을 모으고 예산에 거주하던 처남 이남규의 도움을 받아 재차 의병 봉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11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이남규 등이 피체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주로 피신해 있다가 11월 20일 붙잡히고 말았다.

 

성명      : 방인철 (方仁喆)

생존기간 :

출생지    : 미상

운동계열 : 의병

서훈내역 : 애족장(2000)

-----------------------------

 

1896년 유인석(柳麟錫)의병장이 이끄는

제천의진(堤川義陣)에 소속되어 포군(砲軍)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11월(음력)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등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한 후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충북 제천에서 진용을 재편성하였다.

방인철은 이때 의진에 참여하여 포군으로 활동하였다.

 

유인석의 의병부대는 중군 이춘영, 선봉장 김백선(金伯善) 그리고

유격장 이강년(李康秊)의 예하부대가 연합한 의진으로,

별동대까지 합하면 10,000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제천의진은 1896년 2월 중부지방의 요충지인 충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쳤고

또한 수안보와 가흥(佳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군의 재공격으로 의진은 충주성에서 후퇴하여 중국 요동으로 건너가

장기항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단양에서 진영을 정비한 뒤

원주를 거쳐 평안도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이들은 압록강 초산에 도착할 때까지 곳곳에서 처절한 혈전을 겪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방인철은 1896년 7월 강계에서 적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체포되어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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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개만....

전개: ①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

         * 일제()의 침략(侵略)에 맞서 일어남.

         * 을미사변(乙未死變), 단별령()이 원인 →을미의병(乙未義兵)

       ②1905년 을사의병(乙巳義兵)

         *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계기로 더욱 의병(義兵)이 거세어짐 →을사의병(乙巳義兵)

         ③1907년 군대해산() 및 군의병(軍義兵)조직

         * 군대해산( ) 이후 해산된 군인(軍人)들과 합세하여 조직적으로 일본군(日本

            軍)과 전투.

         * 의병(義兵)의 전투력 향상 →정미의병(丁未義兵)

         ④1910년 강제합병(兵)

         * 나라(國)를 빼앗긴 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국외(國外)(간도()

           [젠다오]와 연해주(沿)로 망명()하여 독립군(獨立軍)으로 활동함

출처공부잘하는 아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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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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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들이 사용한 무기 : 일본군은 소총과 기관총까지 가진 데 비해 의병의 무기는
곤봉,도끼,낫,곡괭이 등과 화승총을 사용하기도 했다.

의병들의 작전: 그 지역의 지형을 잘 알기 때문에 전쟁의 기술이나 전략을 알지
못하고 무기도 부족했지만,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는 싸움이 많았다.

의병들의 신분, 직업: 공부하던 선비, 일반 농민이나 중소 상민 그리고 천민까지
출신 성분이나 지역을 따지지 않고 백성 모두가 일어나 싸웠다.

대표적인 의병장
갑산 - 홍범도
인제 - 이강년
춘천 - 이소응
제천 - 유인석
평해 - 신돌석
여주 - 민긍호
홍성 - 민종식
진주 - 노응규
태인 - 최익현,임병찬
광주 - 안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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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긍호 : 조선 후기의 학자·의병장.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민종식 : 한말의 의병장. 을사조약 체결 이후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유인석 :

조선 후기의 학자·의병장.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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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째 답변
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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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긍호(閔肯鎬)
   
미상∼1908. 2. 29
 
   민긍호는 경성(京城)에서 태어난
 
 여흥 민씨의 일족으로서 광무 원년
 
에 진위대에 들어가 강원도 원주
 
(原州) 진위대 고성(高城) 분견대의
 
정교(正校)였다. 후에 춘천(春川) 분
 
견대에 전입, 광무 4년경 정교의 직
 
에 있었으나, 다음 해 처음으로 특
 
무 정교의 자리에 앉게되자 발탁되
 
어 원주 진위대에 전입되었다.
 
1907년 8월 5일, 마침 원주 진위대
 
장 홍유형(洪裕馨)이 상경하여 부재
 
중일 때, 충주 수비대 이궁(二宮) 소
 
위 등 19명이 원주 수비대를 해산하
 
기 위하여 온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에 그는,"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써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를 거두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하고,
 
1. 1907년 8월 5일 부하들에게 비
 
상나팔을 불게 하여 약 삼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우선 원주 우편 취급
 
소를 습격하고, 계속해서 일경을 습
 
격하였다. 이 때 순경들이 남산을
 
넘어 충주로(忠州路)로 퇴각하므로
 
추격하다가 이궁(二宮) 소위들을 만
 
나 세 시간을 격전하였다.
 
그 후 민긍호는 의병부대를 많은 소
 
단위의 의병부대로 편성하였다. 이
 
들 소의병부대는 제천·죽산·장호원·
 
여주·홍천 등지 일대에서 유격전으
 
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활약하
 
였다. 이같은 민긍호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강원도·충
 
청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부
 
대로는 허준(許俊)·이경삼(李京三)·
 
김만군(金萬軍)·고석이(高石伊)·김
 
군필(金君必)·이한창(李韓昌)·한기
 
석(韓基錫)·한갑복(韓甲復)·윤기영
 
(尹起榮)·이강년(李康秊)·변학기
 
(邊鶴基)·조인환(曺仁煥) 등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강년의 부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8
 
월 5일의 민긍호의 봉기 사실을 보
 
고받은 일본 사령부는 경성 주재 보
 
병 제47연대 소속의 2개 중대와 기
 
관총 4정, 공병 1개 소대로 편성된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8월 10
 
일 원주에 도착하여 의병 진압에 나
 
섰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
 
들은 중앙에 다음과 같은 보고문을
 
올렸다.   "지형을 잘 아는 토민의
 
비호를 받고 있는 폭도의 첩보 근무
 
는 대단히 민활하여 교묘하게 우리
 
행동을 정탐하여 은현출몰(隱現出
 
沒)하므로, 지대는 원주 도착 후 그
 
부근의 소탕에 노력하였으나, 수일
 
간 조금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때 지방민들이 의
 
병들과 협력하여 항일구국운동을 전
 
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8월 12일 약 2백명으로 편성된
 
민긍호의 부대는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 분견소를 포위 공격한 후 이곳
 
일본 경찰과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
 
기를 접수하였다. 이때 많은 지방민
 
이 의병부대로 지원해 왔으므로 음
 
죽을 거쳐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는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리
 
하여 여주·이천·양근 일대에서 의병
 
들은 크나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
 
다.
 
 일군 사령부는 당황하여 대전·수원
 
주둔의 일군(日軍)을 이천·장호원·
 
여주 방면으로 증강하고, 서울 주둔
 
일군을 양근·이천 방면으로 증파하
 
였다.
 
3. 8월 중순 민긍호는 이강년과 같
 
이 충주 공략의 작전계획을 세운 후
 
22일 행동을 개시하였다. 민긍호 의
 
병 부대는 우측으로 공격하고, 이강
 
년 부대는 좌측으로 공격하기로 하
 
였다. 그리고 강릉 방면으로부터 약
 
2백명의 의병부대가 응원하였다. 민
 
긍호 의병부대는 이강년 부대에 앞
 
서서 23일 오전 11시 30분경부터
 
충주를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충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이천 북방과 산지동(山地洞)
 
에서도 격전을 벌였다.
 
4. 9월 7일 약 600명의 민긍호 의
 
병 부대는 2개 부대로 나위어 홍천
 
(洪川)을 습격하여 적에게 많은 피
 
해를 입히고,
 
5. 9얼 10일 약 이백명의 의병이 재
 
차 홍천을 기습하였다. 또 나머지
 
사백명의 의병은 낭천군아(狼川軍
 
衙)를 기습 공격한 후 그곳 무기고
 
에서 총기, 탄약을 접수하였다.
 
6. 9월 20일에는 춘천 남방으로 10
 
리되는 정족(鼎足) 부근에서 약 삼
 
백명의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
 
이고,
 
7. 9월23일에는 횡성군 봉복사(鳳
 
腹寺)에서 약 350명의 의병들이 일
 
군과 격전을 벌여 커다란 타격을 주
 
었다.
 
그 후 민긍호 의병부대는
 
8. 10월 26일 횡성 둔촌(屯村)에
 
서,
 
9. 11월 27일에는 홍천 서남 양덕
 
원(陽德院)에서,
 
10. 12월 8일에는 원주 동북 작곡
 
(鵲谷)에서 계속 격전을 벌여 용맹
 
을 떨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1. 1908년 2월 28일 원주 치악산
 
아래인 강림(講林) 동쪽 약 10리되
 
는 등자치 부근에서 적에게 노출되
 
었다. 적군은 강림에서 출발, 사자
 
산(獅子山), 구룡산(九龍山) 방면으
 
로 우회하여 등자치로 접근하였다.
 
이 때 민긍호의 부대는 그 10리 지
 
점인 궐덕리(蕨德里)에 잠복하고 있
 
었다. 29일 오전 11시에 접전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의병 20여 명
 
이 사살되고, 민긍호는 사로잡혀 강
 
립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민긍호
 
의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하여
 
민긍호를 탈환하고자 하였다. 의병
 
중의 한 사람이,   "우리 대장 민씨
 
는 어디 계신지 소리를 치시오."  
 
하였다. 이에 포박된 민긍호가 도주
 
하자, 일군은 그를 사살하였다. 이
 
때 의병 열한명이 전사하고, 의병진
 
은 북방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
 
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 부대는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
 
이 큰 의병 부대였다. 그는 강원도·
 
충청도·경상도로 전전하면서 전부
 
백여 회의 대소 전투를 벌여 일군에
 
게 가장 많은 타격을 주었다.    일
 
군의 기록인 "의병 토벌 결과의 개
 
요" 가운데서도 민긍호 의병 부대에
 
대하여,   "각처에 있어서 약간의 폭
 
도를 넘어뜨리기는 하였으나, 폭도
 
의 출몰이 교묘하여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하다."   라고 하여, 일
 
군들이 그들의 작전 실패를 자인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민긍호 의
 
병 부대의 눈부신 활약과 그 전과를
 
그대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주는 사
 
실이라 하겠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
 
領章)을 추서하였다
 

[1만 의병의 성대한 행군!]

 

- 대규모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선생

 

- 민종식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 자

 

행되고 그 와중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치욕적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하여 국치를 설욕하고 명성황후

 

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였

 

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늑결

 

되어 국망의 위기가 닥쳐오자 본격

 

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우선 을

 

사 5적과 이토오를 비롯한 일제 침

 

략자들을 처단하자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무장투쟁을 통하여 일

 

본군을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달성하

 

려고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리

 

하여 1906년 3월 충청도 정산에서

 

안병찬 등 유생들과 함께 600여명

 

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봉기의 첫

 

기치를 올렸다.

 

첫 봉기 후 홍주성을 쳤으나 실패하

 

고 공주관아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

 

하던 중 충청도 합천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후

 

처남 이용규 등의 적극적인 후원으

 

로 1906년 5월 충청도 홍산에서 재

 

봉기하면서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이어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천읍․남

 

포읍성 등을 장악한 뒤, 5월 19일

 

홍주 장날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1

 

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는 화포

 

를 앞세워 홍주성의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였고, 드디어 홍주성 탈환이

 

라는 큰 전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홍주성에 입성한 뒤 의병부대는 인근의 지방 유생들과 주민들의 헌신

 

적인 지원을 받으며 10여 일간 일본

 

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우

 

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반격

 

을 받아 5월 31일 새벽, 결국 홍주

 

성을 내어주었다.

 

 

이후에도 정산 일대에서 의병을 모

 

으고 예산에 거주하던 처남 이남규

 

의 도움을 받아 재차 의병 봉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11

 

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의 습

 

격을 받아 이남규 등이 피체됨에 따

 

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주로 피신

 

해 있다가 11월 20일 붙잡히고 말았

 

다.

 

성명      : 방인철 (方仁喆)

 

생존기간 :

 

출생지    : 미상

 

운동계열 : 의병

 

서훈내역 : 애족장(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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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유인석(柳麟錫)의병장이 이

 

끄는

 

제천의진(堤川義陣)에 소속되어 포

 

군(砲軍)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11월(음력)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등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강원

 

도 원주에서 거의한 후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충북

 

제천에서 진용을 재편성하였다.

 

방인철은 이때 의진에 참여하여 포

 

군으로 활동하였다.

 

유인석의 의병부대는 중군 이춘영,

 

선봉장 김백선(金伯善) 그리고

 

유격장 이강년(李康秊)의 예하부대

 

가 연합한 의진으로,

 

별동대까지 합하면 10,000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제천의진은 1896년 2월 중부지방의

 

요충지인 충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쳤고

 

또한 수안보와 가흥(佳興)에 주둔하

 

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적군의 재공격으로 의진은

 

충주성에서 후퇴하여 중국 요동으로

 

건너가

 

장기항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단양

 

에서 진영을 정비한 뒤

 

원주를 거쳐 평안도 방면으로 북상

 

하였다.

 

이들은 압록강 초산에 도착할 때까

 

지 곳곳에서 처절한 혈전을 겪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방인철은 1896년 7월

 

강계에서 적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체포되어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전개:①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

 

* 일제()의 침략(侵略)에 맞서 

 

일어남.

 

         * 을미사변(乙未死變), 단별

 

령()이 원인 →을미의병(乙未

 

義兵)

 

       ②1905년 을사의병(乙巳義兵)

 

         *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계

 

기로 더욱 의병(義兵)이 거세어짐

 

→을사의병(乙巳義兵)

 

         ③1907년 군대해산(

 

) 및 군의병(軍義兵)조직

 

         * 군대해산( ) 이후

 

해산된 군인(軍人)들과 합세하여 조

 

직적으로 일본군(日本軍)과 전투.

 

 * 의병(義兵)의 전투력 향상 →

 

정미의병(丁未義兵)

 

④1910년 강제합병(兵)

 

 * 나라(國)를 빼앗긴 후 일제()

 

의 탄압()이 심해지자, 국외(國

 

外)(간도()

 

           [젠다오]와 연해주(沿)

 

로 망명()하여 독립군(獨立軍)

 

으로 활동함

 

의병(義兵)들의

 

신분과 직업: 양반,농민,군인뿐만

 

아니라 노비,상인,승려,천민 등 다

 

양한 신분()과 직업

 

                    ()을 가진 사람

 

들이 모두 의병(義兵) 활동에 참여

 

함. 

                    

의병(義兵)들이

 

사용한 무기: (의병(義兵)곤봉, 도

 

끼, 낫, 곡괭이 등과 화승총

 

(군대해산이후 의병(義兵)들이    

 

쓰게 되었다.)을 사용함. 

 

(일본군(日本軍)소총, 기관총 등을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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