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긍호 민종식 유인석에 대하여 의병운동은 어떻게 했는지 알려주세요 님들
숙제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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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보면 이때 지방민들이 의병들과 협력하여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1만 의병의 성대한 행군!]
- 대규모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선생 -
민종식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고 그 와중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치욕적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하여 국치를 설욕하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늑결되어 국망의 위기가 닥쳐오자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우선 을사 5적과 이토오를 비롯한 일제 침략자들을 처단하자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무장투쟁을 통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달성하려고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3월 충청도 정산에서 안병찬 등 유생들과 함께 600여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봉기의 첫 기치를 올렸다.
첫 봉기 후 홍주성을 쳤으나 실패하고 공주관아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던 중 충청도 합천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후 처남 이용규 등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906년 5월 충청도 홍산에서 재봉기하면서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이어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천읍․남포읍성 등을 장악한 뒤, 5월 19일 홍주 장날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1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는 화포를 앞세워 홍주성의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였고, 드디어 홍주성 탈환이라는 큰 전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홍주성에 입성한 뒤 의병부대는 인근의 지방 유생들과 주민들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10여 일간 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5월 31일 새벽, 결국 홍주성을 내어주었다.
이후에도 정산 일대에서 의병을 모으고 예산에 거주하던 처남 이남규의 도움을 받아 재차 의병 봉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11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이남규 등이 피체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주로 피신해 있다가 11월 20일 붙잡히고 말았다.
성명 : 방인철 (方仁喆)
생존기간 :
출생지 : 미상
운동계열 : 의병
서훈내역 : 애족장(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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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유인석(柳麟錫)의병장이 이끄는
제천의진(堤川義陣)에 소속되어 포군(砲軍)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11월(음력)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등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한 후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충북 제천에서 진용을 재편성하였다.
방인철은 이때 의진에 참여하여 포군으로 활동하였다.
유인석의 의병부대는 중군 이춘영, 선봉장 김백선(金伯善) 그리고
유격장 이강년(李康秊)의 예하부대가 연합한 의진으로,
별동대까지 합하면 10,000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제천의진은 1896년 2월 중부지방의 요충지인 충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쳤고
또한 수안보와 가흥(佳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군의 재공격으로 의진은 충주성에서 후퇴하여 중국 요동으로 건너가
장기항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단양에서 진영을 정비한 뒤
원주를 거쳐 평안도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이들은 압록강 초산에 도착할 때까지 곳곳에서 처절한 혈전을 겪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방인철은 1896년 7월 강계에서 적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체포되어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2007.06.24.
저는 전개만....
전개: ①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
* 일제(日帝)의 침략(侵略)에 맞서 일어남.
* 을미사변(乙未死變), 단별령(斷髮令)이 원인 →을미의병(乙未義兵)
②1905년 을사의병(乙巳義兵)
*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계기로 더욱 의병(義兵)이 거세어짐 →을사의병(乙巳義兵)
③1907년 군대해산(軍隊解散) 및 군의병(軍義兵)조직
* 군대해산(軍隊解散 ) 이후 해산된 군인(軍人)들과 합세하여 조직적으로 일본군(日本
軍)과 전투.
* 의병(義兵)의 전투력 향상 →정미의병(丁未義兵)
④1910년 강제합병(强制合兵)
* 나라(國)를 빼앗긴 후 일제(日帝)의 탄압(彈壓)이 심해지자, 국외(國外)(간도(間島)
[젠다오]와 연해주(沿海州)로 망명(亡命)하여 독립군(獨立軍)으로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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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5.
의병들이 사용한 무기 : 일본군은 소총과 기관총까지 가진 데 비해 의병의 무기는
곤봉,도끼,낫,곡괭이 등과 화승총을 사용하기도 했다.
의병들의 작전: 그 지역의 지형을 잘 알기 때문에 전쟁의 기술이나 전략을 알지
못하고 무기도 부족했지만,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는 싸움이 많았다.
의병들의 신분, 직업: 공부하던 선비, 일반 농민이나 중소 상민 그리고 천민까지
출신 성분이나 지역을 따지지 않고 백성 모두가 일어나 싸웠다.
대표적인 의병장
갑산 - 홍범도
인제 - 이강년
춘천 - 이소응
제천 - 유인석
평해 - 신돌석
여주 - 민긍호
홍성 - 민종식
진주 - 노응규
태인 - 최익현,임병찬
광주 - 안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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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9.
민긍호 : 조선 후기의 학자·의병장.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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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 한말의 의병장. 을사조약 체결 이후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진도(珍島)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유인석 :
조선 후기의 학자·의병장.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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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2.
[1만 의병의 성대한 행군!]
- 대규모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선생
- 민종식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 자
행되고 그 와중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치욕적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하여 국치를 설욕하고 명성황후
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하였
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늑결
되어 국망의 위기가 닥쳐오자 본격
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우선 을
사 5적과 이토오를 비롯한 일제 침
략자들을 처단하자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무장투쟁을 통하여 일
본군을 몰아내고 국권회복을 달성하
려고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리
하여 1906년 3월 충청도 정산에서
안병찬 등 유생들과 함께 600여명
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봉기의 첫
기치를 올렸다.
첫 봉기 후 홍주성을 쳤으나 실패하
고 공주관아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
하던 중 충청도 합천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후
처남 이용규 등의 적극적인 후원으
로 1906년 5월 충청도 홍산에서 재
봉기하면서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이어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천읍․남
포읍성 등을 장악한 뒤, 5월 19일
홍주 장날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1
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는 화포
를 앞세워 홍주성의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였고, 드디어 홍주성 탈환이
라는 큰 전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홍주성에 입성한 뒤 의병부대는 인근의 지방 유생들과 주민들의 헌신
적인 지원을 받으며 10여 일간 일본
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우
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반격
을 받아 5월 31일 새벽, 결국 홍주
성을 내어주었다.
이후에도 정산 일대에서 의병을 모
으고 예산에 거주하던 처남 이남규
의 도움을 받아 재차 의병 봉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11
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의 습
격을 받아 이남규 등이 피체됨에 따
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주로 피신
해 있다가 11월 20일 붙잡히고 말았
다.
성명 : 방인철 (方仁喆)
생존기간 :
출생지 : 미상
운동계열 : 의병
서훈내역 : 애족장(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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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유인석(柳麟錫)의병장이 이
끄는
제천의진(堤川義陣)에 소속되어 포
군(砲軍)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11월(음력)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등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강원
도 원주에서 거의한 후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충북
제천에서 진용을 재편성하였다.
방인철은 이때 의진에 참여하여 포
군으로 활동하였다.
유인석의 의병부대는 중군 이춘영,
선봉장 김백선(金伯善) 그리고
유격장 이강년(李康秊)의 예하부대
가 연합한 의진으로,
별동대까지 합하면 10,000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제천의진은 1896년 2월 중부지방의
요충지인 충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쳤고
또한 수안보와 가흥(佳興)에 주둔하
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적군의 재공격으로 의진은
충주성에서 후퇴하여 중국 요동으로
건너가
장기항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단양
에서 진영을 정비한 뒤
원주를 거쳐 평안도 방면으로 북상
하였다.
이들은 압록강 초산에 도착할 때까
지 곳곳에서 처절한 혈전을 겪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방인철은 1896년 7월
강계에서 적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체포되어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전개:①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
* 일제(日帝)의 침략(侵略)에 맞서
일어남.
* 을미사변(乙未死變), 단별
령(斷髮令)이 원인 →을미의병(乙未
義兵)
②1905년 을사의병(乙巳義兵)
*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계
기로 더욱 의병(義兵)이 거세어짐
→을사의병(乙巳義兵)
③1907년 군대해산(軍隊解
散) 및 군의병(軍義兵)조직
* 군대해산(軍隊解散 ) 이후
해산된 군인(軍人)들과 합세하여 조
직적으로 일본군(日本軍)과 전투.
* 의병(義兵)의 전투력 향상 →
정미의병(丁未義兵)
④1910년 강제합병(强制合兵)
* 나라(國)를 빼앗긴 후 일제(日帝)
의 탄압(彈壓)이 심해지자, 국외(國
外)(간도(間島)
[젠다오]와 연해주(沿海州)
로 망명(亡命)하여 독립군(獨立軍)
으로 활동함
의병(義兵)들의
신분과 직업: 양반,농민,군인뿐만
아니라 노비,상인,승려,천민 등 다
양한 신분(身分)과 직업
(職業)을 가진 사람
들이 모두 의병(義兵) 활동에 참여
함.
의병(義兵)들이
사용한 무기: (의병(義兵)곤봉, 도
끼, 낫, 곡괭이 등과 화승총
(군대해산이후 의병(義兵)들이
쓰게 되었다.)을 사용함.
(일본군(日本軍)소총, 기관총 등을
사용함.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2007.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