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명성황후,유인석,고종에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한다면?(내공!)
안녕하세요 ^^;
명성황후와, 유인석, 고종 이렇게 세분에 대해서 간단하게 한 5줄정도로
정리할수가 있을까요..?
약간 더 길어두 되구요..
제가 정리하는건 아직 서툴러서... 잘 줄이기가 힘드네요..
많이도와주세요 ^^;;
부탁드릴께요 ^^;;
명성황후와, 유인석, 고종 이렇게 세분에 대해서 간단하게 한 5줄정도로
정리할수가 있을까요..?
약간 더 길어두 되구요..
제가 정리하는건 아직 서툴러서... 잘 줄이기가 힘드네요..
많이도와주세요 ^^;;
부탁드릴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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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채택
모두 그시대를 대표하는인물이다보니 줄이긴줄였지만 너무 양이 많네요 ㅎㅎ
고종 제26대 왕 (재위 1863 ~ 1907)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아들.
1863년 (철종14년) 12월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세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 하였으나, 대정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고종의 설명은 너무 방대하여 요약햇음 정치분야는 안씀)
http://100.daum.net/DIC/detail?id=1078930&sname=
여기에서 보시길...
유인석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자·의병장. 자는 여성, 호는 의암. 본관은 고흥,춘천 출생. 어려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김평묵·유중교 등과 교유하여 춘추대의정신에 입각한 존화양이사상을 배웠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때 홍재구 등 경기·강원도 유생 46명과 척양소를 올려 개항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95년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발표되자 의병을 일으켰다. 이춘영 등 의병장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되어 제천·충주·단양을 무대로 활약하다 관군에 패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0년 의화단운동을 피하여 귀국, 서북지역을 돌며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주력하였다. 1907년 고종 퇴위와 한일신협약체결을 계기로 망명을 결심하고,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이범윤 등과 함께 항일세력 통합에 노력하여 10년 13도의군을 결성하여 도총재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국권피탈로 조선이 멸망하고, 일본의 술책으로 13도의군이 와해되자 14년 서간도로 제 3 차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관전현 방취구에서 죽었다.
명성황후
고종의 비. 본관은 여흥. 민비라고도 한다. 여성부원군 치록의 딸이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수년후부터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 문제로 구부간의 정치적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 뒤 대원군의 정적들과 결탁하여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하야시켰고,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82년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구군인 세력을 규합,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곧 충주목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여 청국에 군사개입을 요청하고 대원군의 납치를 사주하였다. 친청사대의 조류에 개화파가 불만을 품고 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곧 청국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친러정책을 고수하였으며, 95년 4월 일본군대와 정치낭인들에게 살해되었다
고종 제26대 왕 (재위 1863 ~ 1907)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아들.
1863년 (철종14년) 12월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세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 하였으나, 대정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고종의 설명은 너무 방대하여 요약햇음 정치분야는 안씀)
http://100.daum.net/DIC/detail?id=1078930&sname=
여기에서 보시길...
유인석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자·의병장. 자는 여성, 호는 의암. 본관은 고흥,춘천 출생. 어려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김평묵·유중교 등과 교유하여 춘추대의정신에 입각한 존화양이사상을 배웠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때 홍재구 등 경기·강원도 유생 46명과 척양소를 올려 개항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95년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발표되자 의병을 일으켰다. 이춘영 등 의병장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되어 제천·충주·단양을 무대로 활약하다 관군에 패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0년 의화단운동을 피하여 귀국, 서북지역을 돌며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주력하였다. 1907년 고종 퇴위와 한일신협약체결을 계기로 망명을 결심하고,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이범윤 등과 함께 항일세력 통합에 노력하여 10년 13도의군을 결성하여 도총재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국권피탈로 조선이 멸망하고, 일본의 술책으로 13도의군이 와해되자 14년 서간도로 제 3 차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관전현 방취구에서 죽었다.
명성황후
고종의 비. 본관은 여흥. 민비라고도 한다. 여성부원군 치록의 딸이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수년후부터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 문제로 구부간의 정치적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 뒤 대원군의 정적들과 결탁하여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하야시켰고,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82년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구군인 세력을 규합,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곧 충주목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여 청국에 군사개입을 요청하고 대원군의 납치를 사주하였다. 친청사대의 조류에 개화파가 불만을 품고 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곧 청국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친러정책을 고수하였으며, 95년 4월 일본군대와 정치낭인들에게 살해되었다
출처ttp://100.daum.net/DIC/detail?id=1337530&s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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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