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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유인석 장군이 의병으로서 활약한 모습
민비 살해와 단발령의 강제 실시에 따라 폭발된 항일 의병의 활동이 1896년 들어 크게 확대될 때, 가장 대표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이 유인석 부대의 활동이었다. 이 부대는 을미 의병의 상징이라 할 정도로 그 규모나 활동 범위가 컸다. 화서 이항로의 문인 600여 명이 이미 1895년 을미사변 이전에 유인석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는데, 1896년 1월 유인석의 동문 및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충청도 제천에서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이 구성되었다.
일시 영월로 근거지를 옮긴 이후, 유인석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고, 8도 열읍에 격문을 보내어 전 국민의 궐기와 항쟁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당초 의거지인 제천에 입성한 후, 일본군 400명, 관군 및 지방군이 수백 명이나 집결하고 있던 충주성을 공격하여 이를 점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사실은 의병대에게 큰 영향을 주어, 전반적으로 의병 항쟁을 확대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대에, 유인석 의병대의 세력은 천안, 경상도 예천 지방까지 미쳤다. 그러나 일본군이 수안보를 근거로 관군과 합세하여 공격해 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 15일간의 공방전이 진행되었으나, 증강되는 일본군의 전력에 밀려 제천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 후, 3개월간 제천을 근거로하여 부근의 강원, 경상, 충청 일대의 의병과 연결되어 일본군과 항쟁하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단양으로 후퇴하였다가 6월 들어서 서북행을 시작하여 곳곳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며, 8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옛 땅인 서간도에 들어가 뒷일을 기약하였다.
2.학자로서 유인석 장군의 특징
철종 때의 거유(巨儒)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 글을 배우다가 1868년 그가 죽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힘썼다.
3.유인석 기념관의 위치와 기념물
기념관의 위치 : 강원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91
기념물 : 춘천 의암 유인석묘역
2000년 3우러 11일 강원도 기념물 제 74호로 지정되었다.
(유인석 묘있는데 기념관이 있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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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유인석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자·의병장. 자는 여성, 호는 의암. 본관은 고흥,춘천 출생. 어려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김평묵·유중교 등과 교유하여 춘추대의정신에 입각한 존화양이사상을 배웠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때 홍재구 등 경기·강원도 유생 46명과 척양소를 올려 개항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95년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발표되자 의병을 일으켰다. 이춘영 등 의병장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되어 제천·충주·단양을 무대로 활약하다 관군에 패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0년 의화단운동을 피하여 귀국, 서북지역을 돌며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주력하였다. 1907년 고종 퇴위와 한일신협약체결을 계기로 망명을 결심하고,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이범윤 등과 함께 항일세력 통합에 노력하여 10년 13도의군을 결성하여 도총재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국권피탈로 조선이 멸망하고, 일본의 술책으로 13도의군이 와해되자 14년 서간도로 제 3 차 망명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관전현 방취구에서 죽었다.
이정도면 그래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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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