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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유인석(柳麟錫, 1842. 1. 27~1915. 1. 29)선생은 1842년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의암(毅菴), 자는 여성(汝聖),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인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간 선생은 이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가 당대의 거유(巨儒) 화서 이항로와 일찍이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입양되던 그 해에 화서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화서 문하에는 임규직, 이인구, 이준, 김평묵, 유중교 등의 인물들이 운집해 있었기 때문에 선생으로서는 최고의 학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선생은 훗날 화서학통을 이어받는 김평묵, 유중교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선생은 일찍부터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존화양이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유림의 대변자로서 조정에 소환된 스승 이항로를 따라 상경, 한 달 가량 서울에 머물면서 혼란한 시국상과 어지러운 민심을 직시하고 위정척사 사상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그 뒤 쇄국정책을 견지하던 대원군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1876년 일제의 강압으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양국 대표들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선생을 비롯한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은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다. 결국 이들의 요구는 묵살되어 조약은 체결되고 말았지만, 이 상소는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201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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