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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유인석 의병 일으킨 이유...
kjj0**** 조회수 1,086 작성일2016.04.22
유인석 의병 일으킨 이유가 뭐예요? (사진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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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제천의병은 크게 두 번 봉기했다. 전기에 일어난 의병은 위정척사 사상의 연장선에 있어 '척사의병' 또는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나 '을미의병'이라 부른다. 양평에서 포군들을 이끌고 내려온 젊은 선비들은 영월에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주장하던 유인석에게 의병장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처변삼사란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의병을 일으키는 것, 망명하는 것, 자결하는 것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유인석은 오십대로 다른 의병장에 견주어 나이가 많고 상중이라는 이유로 사양하다 결국 의병장을 수락해 호좌의진(湖左義陳)을 만들었다. 호좌의진은 호서(충청도)지역 왼쪽에 있는 의병이란 뜻이다.

유인석은 복수보형(復讎保形)을 내걸고 8도에 격문을 띄웠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전통을 보존하자는 뜻이다. 의병장으로 취임한 그는 항일의병 전투를 일으켜 단양군수 권숙, 청풍군수 서상기 등 친일개화파 관리들부터 참수했다. 이후 제천의병은 관찰사 세 명과 여섯 명의 군수를 처단했다.

일개 의병부대가 친일파 관료들의 목을 자르며 국가권력에 맞선 것이다. 제천의병은 친일파 처단이 옳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해 다른 의병들과 갈등이 빚기도 했다. 전기 제천의병은 1896년 남산전투를 마지막으로 제천지역을 토벌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의병장에게 씌워진 내란죄

후기 제천의병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폐위를 계기로 봉기했다. 당시 원주에 있던 민긍호가 의병을 일으켰다. 민긍호는 중앙정부의 의견을 따르던 신식군인으로 의병을 진압하려던 사람이었다. 나라가 무너지고 군대가 해산되는데 반발해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군인들이 봉기하면서 신식총이 보급됐다. 비가 오면 쏠 수 없는 화승총으로 애를 먹었던 의병은 신식총을 받아 활동하기 위해 40여 개의 진을 새로 만들었다.

전국의 의병이 제천으로 모였다. 첫 전투는 모래내 지역에서 발발했다. 일본군 1개 소대를 잡기 위해 수천 명 의병이 달려들었다. 일본 정규군과 맞서 군사 5명을 죽이고 1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기록이 있다. 첫 전투에서 이룬 상당한 성과였다. 이전 전투기록을 보면 의병은 군사체계나 작전이 없어 분대 단위 일본군 공격에도 수백 명이 대항했으나 이기기 힘들었다고 한다. 1908년 전후에 전국 10만여 의병 중 약 1만5천 명이 목숨을 빼앗겼으나 같은 기간 일본군 전사자는 100명을 넘지 않았다.

한말 의병들은 도적떼로 몰리면서도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쳤다. 나라가 없어지자 후기 의병 대부분은 쓸쓸히 죽거나 자결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일본군에 잡혀 재판을 받았다. 조선의 사법권을 쥐고 있던 일본은 의병에게 강도죄, 강도살인죄, 살인교사죄 등의 혐의를 씌워 처형했다. 의병장 이강년은 내란죄로 처형됐다.

201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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