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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변사사건, 성폭행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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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변사사건, 성폭행의혹
  • 정윤석
  • 승인 2014.05.26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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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사체 정액 검출···“성교에 의한 것” VS “사체 이물질”

1987년 8월 29일 한 여름, 용인의 오대양 공장에서 32명이 집단 변사체로 발견됐다. 이중 여성이 28명이었다. 여자 변사체 중 12명에게서 정액으로 판단되는 물질이 검출됐다. 검찰은 1987년과 1991년 두 차례의 조사에서 동일하게 ‘집단 자살’로 결론 내렸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성 변사체에서 정액이 검출될 수 있느냐의 질문에서 오대양 사건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 문제는 타살의혹과 마찬가지로 오대양 사건 최대 의혹 중의 하나다. 형사상 공소시효는 있지만 여론과 언론에 공소시효는 없다. 이런 점에서 여성 사체에서 발견됐다는 정액과 관련한 문제를 1988년 12월 1일부터 1989년 3월 23일까지 오대양 사건을 조사한 ‘제5공화국에있어서의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회’(이하 5공 특위)의 보고서와 당시 기사를 통해 재조명해본다.

부검의 최상규, 서재관 박사 소견 “성교에 의한 것”

▲ 5공 특위 오대양사건 조사 소위원회 위원장 김현 의원의 질문과
그에 대한 최상규 부검의의 답변
 

5공 특위 오대양사건 조사 소위원회 위원장 김현 의원은 1988년 12월 1일부터 1989년 3월 23일까지 오대양 사건을 조사하면서 부검의에게 질의한다. 내용은 “(오대양 여성사체)시체 12명에 대한 (정자)양성 반응은 성교에 의한 것이라고 믿어도 좋은가?”였다. 최상규 부검의의 답변은 “그것은 믿어도 됨”이었다(보고서 424페이지). 당시 오대양 사건 관련 부검의는 부검팀장 서재관 박사, 최상규 박사, 황적준 박사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내로라하는 법의학자들이었다.

오대양 사건 당시 부검팀장이었던 서재관 박사도 “사체가 부패할 때 검출되는 성분과 정액에서 추출된 성분은 화학반응 자체가 달라 명확히 구분된다”며 “당시 검사를 실시한 여자 12명 모두에게서 양성 반응이 나타난 점으로 볼 때 이들이 최소한 숨지기 3~7일 이내에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보였다(한겨레 1991년 7월 18일자 신문).

▲ 집단 성관계 의혹을 제기한 경향신문 1991년 7월 14일자 기사

경향신문도 1991년 7월 14일 기사에서 “집단 성관계를 가졌다면 최소한 6~7명의 또다른 남자가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에 따라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에는 수명의 관련자가 더 있으며 범행장소도 시체가 발견된 구내식당 천장이 아닌 제 2의 장소에서 저질렀을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검팀장을 비롯, 부검의들이 성폭행 의혹을 제기했으나 이는 검찰에 의해 영향력있는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1991년 8월 17일자 기사에서 “검찰은 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나 일부 법의학자들이 박 씨 등의 몸 안에서 검출된 체액이 정액임을 분명히 밝혔는데도 법의학자 개인의 주장으로 간주, 체내 분비물임을 강조하는 등 타살을 뒷받침하는 사실은 가급적 회피하고 집단 자살 사건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집단 변사로 발견된 여성들, 그것도 12명의 몸에서 정액양성반응이 나왔는데도 이에 대한 정밀한 수사는 뒷전으로 밀렸다는 지적이다. 안타깝게도 사체 32구는 일괄적으로 사건 발생 이틀만에 화장처리 된다. 화장될 당시 사망 날짜는 8월 27일로 거짓 기재된 채였다.

▲ 여신도 질내 정액 검출 문제를 제기한 동아일보 1991년 7월 16일자 기사

5공 특위 보고서에서는 정액문제와 관련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어떻게 자식이 어머니를 죽이고, 자식들이 있는 곳에서 난교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는 남미에서 발생했던 인민사원사건보다도 더 처참한 변사사건으로 있을 수 없는 타락상이지만 이 부분에 대한 당국의 수사가 미흡하였고 더군다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측의 주장에 의하면 지난 7년 동안 SMtest 법에 의한 정액반응조사에서 한번도 이상이 없었고, 특히 공인된 기관장 명의로 발급된 부검서를 (검찰은)특별한 자료도 제시치 않고 부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공 특위 보고서, 376페이지).

“사망한 12명의 여인의 정액양성반응은 성교를 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로서 이는 나머지 조사를 하였을 시, 전원이 다 양성반응을 보여 성교사실이 확인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박순자 등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자가 발견되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현장에서 남자가 박순자 아들 2명, 이경수, 김OO 등이었으나 특히 김OO이는 의사 당시 사정(정액배출)으로 보아 남자 3인이 여자 28명과의 난교를 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이들 중 17명이 가족관계로서 난교는 더욱 불가능하다”(384페이지).

가족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반수 이상임에도 12명의 여성들의 몸에서 정액으로 보이는 성분이 검출됐다. 5공 특위는 결국 변사체로 발견된 사람들 간의 성관계가 아니라 외부에서 개입한 사람들과의 성관계 설을 제기했다.

부검의 황적준 박사 “정자 테스트 법 오류 많다, 정량분석했어야”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오대양 변사체 부검에 참여했던 황적준 교수(현 고려대 명예교수)는 “애시드포스포타제(AP)는 주로 정액 속에 많이 포함돼 있으나 다른 세포에도 일부 존재하고 있으며, 또 시체가 부패할 경우에도 이 물질이 나온다는 학계 보고도 있었다”면서 “이 검사 결과 양성반응이 나왔다고 해서 이들이 반드시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으며, 정량 분석 등 다른 검사와 병행해야 성관계 유무를 정확히 가릴 수 있다”고 반박했다.(한겨레 1991년 7월 18일자 신문).

황 교수는 남자가 사정할 때 정액 내에 AP라는 액체가 포함되는데 여성의 질내에서 성관계없이 AP가 검출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성관계에 의한 정액이냐, 아니면 여성 질내에서 발생한 물질이냐를 구별하려면 AP의 양을 테스트하는 정량분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에서 AP의 양을 테스트하는 정량분석을 하지 않고 정액 성분이냐 아니냐만 분석하는 정성분석만 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따라 황 교수는 여성의 몸에서 나온 성분을 정액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반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한 황 박사조차도 12명만 검사한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실수라는 것을 인정했다. 여성 몸에서 검출된 액체가 정액이 아니라고 판단한 황적준 부검의는 김현 위원장이 “여자 시체가 28명인데 왜 12명만 부검했으며, 정액 검사를 하였는가?”라고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제가 부검할 당시 성행위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생각 못했고, 검사가 채취를 하자고 하여, 12명만 부검하였음. 정액 검사 의뢰는 최상규 박사에게 의뢰를 하여 정자라고 최 박사는 하였으나 나는 논리적인 타당성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음. 28명 다 부검하여야 하는데 12명만 한 것은 내 실수였음”이라고 답한다.

검찰은 여성의 몸에서 정액양성반응검사와 관련 “시약의 농도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다”고 판단하고 남자의 정액이라 하더라도 정액이 최고 10일 뒤까지 나타나는 점을 감안할 때 변사사건 오래 전에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한겨레 1991년 8월 20일).

그러나 문제는 여성의 몸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변사체 중 남자가 4인이었는데 그 중 김 모 씨의 몸에서 정액배출이 있었다는 점이다. 논란이 있지만 여성 12명의 몸에서 정액으로 보이는 물체가, 그것도 정액 양성반응 테스트를 한 12명에게서 100% 동일하게 발견됐고 남자 1인의 몸에서 사정한 것으로 보이는 정액이 검출됐다. 도대체 검찰은 당시 이런 의혹을 왜 명쾌히 해결하지 못한 것일까?

당시 부검이 좀더 세밀하게 이뤄졌고 시신이 서둘러 화장되지만 않았어도 조금더 명확한 사인 규명에 접근했을 일이다.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가지 의문은 ‘약물’이다. 스스로 자살을 용인했을 가능성을 열어놨을 경우, 이들이 목을 졸리는 순간에 어떻게 본능적으로 아무런 항거를 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박순자의 경우 항거의 흔적 때문에 ‘자살’을 용인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약물설의 경우, 모두다 약물을 하고 박순자의 경우 가장 먼저 살해됐기 때문에, 즉 약물의 효과가 온 몸에 퍼지기 전 살해 됐기 때문에 항거흔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약물과 관련 이경수/ 박순자의 첫째 아들에 대해서만 약물 검사 결과가 나오는 점 또한 아쉽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검출 견해가 5공 특위 보고서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 약물 검출 견해에 대해서는 독성 약물에 대한 검출이 없었다고 보고서는 증언한다.

▲ 박노해 씨는 사형구형, 유병언은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고 보도한
한겨례 1991년 8월 20일자 신문
▲ 오대양 사건은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마찬가지로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사진은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당시 오대양 사건과 함께 화성연쇄 살인 사건도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화성연쇄 살인사건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10명의 여성이 차례로 살해됐으나 범인은 잡히지 않은 미해결 살인사건이다. 이를 영화화한 <살인의 추억>을 보면 화성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살인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경찰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국사범 검거였다. 1980년대가 그랬다. 오대양 사건 당시 한겨레 기사에도 이런 모습이 은연중 엿보인다. 오대양 사건에 대한 기사 옆에 ‘박노해 씨 사형선고’라는 기사가 함께 등장하고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강력계 형사들도 "이렇게 무서운 장면은 본 적이 없었다"던 그 사건, 취재 기자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건이 조종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던 그 사건은 사상범과 시국 사범에 대해서는 서슬 퍼랬던 5공화국과 그 연장선상에 있던 6공화국에 의해 기괴하고 미스테리한 영구 미제사건으로 우리 사회에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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