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36분. 대천행 기차에 오른다. 그 흔한 KTX가 아니라 서해금빛열차다. 용산에서 익산까지 하루에 단 한 번만 운행하는 귀한 열차다. 그마저도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운행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낡은 느낌마저 나는 새마을호 몇 량을 노랗게 치장해서 연결하고 객실 몇 개와 온돌방, 족욕시설을 갖춘 이벤트 객실로 꾸몄다. 여행 기분을 내려는 사람 말고는 거의 이용할 일이 없는 기차다. 모르긴 해도, 코로나가 발생하기 이전 여행이 자연스러웠던 시절엔 철마다 제법 붐볐을 기차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차 안은 숨이 멎을 만큼 조용하다. 거리 두기 지침에 따라 정원을 제한하고 그것도 띄엄띄엄 앉게 해 고요함을 넘어 냉랭함이 감돌 정도다. 승객이라고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씩씩한 젊은 연인 한 쌍과 기차 운행 사정에 밝아 보이는 비즈니스맨 몇, 무덤덤한 표정의 중년 남녀 몇 정도가 전부다. 들뜬 여행 기분이라곤 없다. 설렘과 기대로 가끔씩 까르르 대는 젊은 커플 말고는 모두 숙연할 뿐이다. 모두가 그만큼 버거운 삶의 무게와 사연을 안고 기차에 몸을 실었겠지만 뜻밖의 무게로 온몸을 짓누르는 정적은 차라리 서글픔에 가까웠다. 그나마 모두가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그것도 하나같이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놓은 터라 서로를 의식할 수 없음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거나 창밖 풍경을 보며 여행하기엔 오히려 좋은 환경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지만 역시 즐거움보다는 씁쓸함이 앞서는 풍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차는 떠난다.
서울을 벗어난 기차가 속력을 내면서 새롭게 펼쳐지는 창밖 풍경에 눈을 빼앗긴다. 긴장감으로 움츠러들었던 몸이 스스로 풀렸다. 철커덕거리는 기차 소음 사이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듯한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그나마 썰렁했던 기차 안에 훈훈함이 감돈다. 적당한 소음은 편안함이 되고 곧 나른함으로 이어진다. 차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기대 까무룩 잠이 들길 여러 번. 도시의 일상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아주 달콤한 잠이었다.
오전 11시. 기차가 대천역에 도착했다. ‘라떼’ 시절의 작고 소박한 기차역을 상상했는데 몰라보게 크고 화려해진 역사가 낯설고 생경했다. 거기에 시국이 시국인지라, 여행객들마저 별로 없어 썰렁함은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렴 어떨까. 가을여행, 그것도 뒤늦은 만추의 여행이 다 그런 거지. 고적하고 쓸쓸함을 찾아온 거 아냐? 그렇게 자문을 하는 사이 머릿속에는 오서산 능선에서 반짝이며 하늘거리는 억새의 춤사위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숨을 멈추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목적지는 오서산이었지만 달리는 기차 안에서 스치듯 바라본 청소역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노란색 모범운전사 유니폼을 입고 택시 안에서 환하게 웃는 배우 송강호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행선지를 잠깐 청소역으로 옮긴다. ‘택시운전사’란 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한 이곳은 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으로 인증샷을 남기려는 젊은 여행객들의 방문이 잦아서인지 나름 깔끔하게 단장해 놓았다. 아담한 대합실에는 벤치가 하나 놓여있고 역사 옆에는 ‘근대역사문화공원’이란 이름으로 옛날의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자그마한 포토 존도 만들어놓았다.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송강호의 조형물과 그가 몰던 초록색 택시의 모형도 마련돼 있다. 거창하게 볼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오서산으로 가는 길이라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곳이다. 그곳에 잠시 들러 교복을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모형 사이에 앉아 셀카라도 한 번 찍으면 유쾌해지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롭게도 청소역 앞에는 실제 택시운전사들이 대기해 있다. 주로 등산객이 이용하는 택시로 오서산 들머리인 성연주차장이나 오서산자연휴양림을 오간다. 청소역 출입문을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젊은 여행객들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길을 나선다.
해마다 이맘때면 억새로 빛나는 오서산은 충남 홍성군 광천읍과 보령시 청소면 일대에 걸쳐있는 해발 790.7m 높이의, 충남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오서산은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서식해 붙여진 이름이다. 서해와 천수만 지척에 있어 예로부터 이 일대를 오가는 배들에게 등대 역할을 해준다 해서 ‘서해의 등대’로 통했다. 바로 이 산의 주능선이 10월말부터 11월까지 억새로 뒤덮인다. 억새가 우거진 능선 길은 약 2㎞로 그리 길지 않지만 서해 바닷바람에 쉴 새 없이 물결치는 억새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특히 노을이 질 무렵에 황금빛으로 물들어 흔들리는 억새의 군무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오서산 정상에서는 억새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억새를 보기 위해 그곳에 오르면 보령9경 중 절반의 비경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오서산 정상과 주 능선에서 바라보는 대천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 죽도와 외연도의 풍경은 말 그대로 비경이고 특히 노을녘의 낙조 풍광은 압권이다.
오서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다. 거리가 짧지만 힘든 코스도 있고 반면 길지만 비교적 순탄한 코스도 있다. 또 정상으로 가는 길의 풍경이 멋진 곳이 있고, 고개를 쳐들고 산꼭대기만 바라보며 숨을 헐떡여야만 하는 코스도 있다. 하지만 산 정상에서 만나는 멋진 풍광과 벅찬 감동에 비하면 어느 길도 감내 못할 수고스러움은 아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방법은 보통 셋. 성연주차장에서 출발해 성골과 시루봉을 거쳐 정상에 오르는 코스와 용못과 신암터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2개의 코스가 있고, 오서산자연휴양림 안으로 들어가 월정사와 능선 쉼터를 거쳐 정상까지 가는 코스가 있다. 그 가운데 휴양림에서 월정사를 지나 정상으로 가는 길이 비교적 수월한 코스로 통한다. 약 2.7km 코스로 정상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다만 단축 코스인 만큼 경사가 제법 가파른 구간도 있다. 성연주차장에서 출발하는 두 개의 코스는 각각 3.6km, 4.3km의 거리로 정상까지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억새를 보기 위해 오서산 정상에 오를 경우 하산 시간을 잘 계산해 다녀오는 것도 노하우다. 억새와 서해바다 그리고 천수만의 풍광은 노을이 붉게 물들 때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을이 지면 곧 어두워진다는 의미이므로 하산 시간에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오서산자연휴양림 매표소를 지나 월정사와 능선 쉼터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길을 택한다. 산행에 약한 초행급 여행자들이 주로 택하는 코스라는 귀띔을 듣고 정한 코스다. 휴양림 매표소에서 월정사까지 가는 구간은 평탄하다. 산길로 접어들어 약 0.6km 정도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월정사는 흔히 생각하는 사찰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아주 작은 절이다. 아마도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 때문에 더욱 작아 보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작고 소박한 모습의 절은 오히려 정겨움을 준다. 사찰 입구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약 200m 구간 곳곳에 쌓여진 무수한 돌탑들도 인상적이다. 산 중턱에 있는 임도를 지나 오르게 되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크고 작은 바위들 틈새로 난 산길은 수시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게 만들 정도로 험하다. 도대체 억새는 언제 나타나는 거야? 오서산의 억새는 9부 능선에 가야 있다는 걸 알고 왔음에도 자꾸 스스로를 채근하게 만드는 산길. 가장 무난하다는 길을 잡아 시작한 산행이 이 정도일 줄이야. 평소 하지 않던 운동 탓을 하며, 천근만근의 무게가 느껴지는 두 다리를 힘겹게 옮겨놓는다. 서해안 최고의 억새 명소를 만나는 길이 그리 쉬울 리 없다. 그렇게 가까스로 다가선 오서산의 정상. 하나 둘씩 살짝살짝 모습을 드러내던 억새가 거대한 무리를 지어 쿵, 하고 나타난다. 순간 숨이 멎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억새가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오서산 정상의 억새밭이 서해바다로 내려앉는 태양의 빛을 받아 찬란한 빛을 뿌려댄다. 산 정상을 가득 메운 억새 군락의 광활하고 황홀한 풍경은 말을 잊지 못할 만큼 눈부시다. 억새의 흔들림으로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고요함 속에서 잠시 세상을 내려놓고 나를 잊는다. 잠시 후, 눈을 들어 내려다보는 서해바다는 차령산맥이 서쪽으로 달려간 금북정맥의 최고봉에 내가 서 있음을 일깨워준다. 눈 아래로 펼쳐지는 대천해수욕장과 무창포해수욕장, 죽도와 외연도 등 보령의 비경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담는다. 서해의 태양은 점점 더 바다와 가까워지고 억새의 찬란한 빛도 서서히 황금색으로 물들어간다.
▶그곳에 가면 또 다른 보령이 보인다
다시 아침. 어제 만난 억새의 바다에서 겨우 빠져 나와 내가 알지 못하는 보령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바다가 좋아 대천과 무창포를 드나들었고, 숲의 품이 좋아 오서산과 성주산을 찾은 정도의 여행 경력이라면 보령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고 봐야 한다. 생각해보니 그 뻔한 관광지 말고 가슴속에 짙게 각인된 보령의 모습은 없었다. 순간, 뭔가 새롭고 특별한 보령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생각해낸 곳이 천북면이었다. 왠지 낯설고 버거웠던 미지의 땅 천북. 그곳엔 어떤 특별함이 있을까. 열린 마음으로 그곳에 안겨보기로 했다.
보령의 서북단에 위치한 천북면은 홍성호를 사이에 두고 홍성과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안면도를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 그 유명한 천북 굴단지가 있다. 천북면 장은리 바닷가 마을에 70여 개의 굴 요리 식당들이 모여 단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제는 흔해진 겨울 별미 ‘굴 구이’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뽀얗게 살이 차오른 자연산 천북 굴을 맛보기 위해 수많은 미식가들이 그곳을 찾는다. ‘굴’하면 통영을 손꼽는 요즘이지만 진짜 굴 맛을 아는 사람들은 천북 굴을 최고로 친다. 예전부터 이곳 천북 지역에서 나는 굴은 크기가 굵고 맛이 진하며 향이 좋기로 유명했다. 홍성방조제가 생기기 이전, 이 지역은 ‘굴밭’이라 불릴 정도로 굴이 많이 났다. 당시 갯벌에서 굴을 캐던 아낙들이 추운 겨울이 오면 모닥불에 모여 앉아 허기진 배를 채울 겸 굴을 구워 먹었는데 그 굴 구이 맛이 소문이 나며 하나둘 굴 구이 식당이 생겨나게 됐고 지금의 천북 굴단지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제철 굴이 나오기 시작하는 11월부터 2월까지 천북 굴단지는 굴 구이를 맛보기 위해 찾아오는 여행객들로 붐빈다. 처음 만나는 천북 굴단지는 제철 대목을 앞두고 서서히 분주해지는 느낌이다. 12월이 되면 ‘천북 굴축제’가 열리고 방문객이 급증한다고 하니 서둘러 천북의 제철 굴을 맛보는 것도 좋겠다.
보령방조제를 건너면 고즈넉한 풍경의 포구를 만난다. 오천항이다.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다. 드라마로 친숙해진 까닭인지 포구는 아늑하고 정겹다. 무엇보다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항구 특유의 비릿함도 없어 방파제에 철퍼덕 주저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봐도 충분히 좋다. 항구 옆 오천항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충청수영성이 있다. 조선시대 때 쌓은 석성으로,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서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는 역할을 했다. 또 바다와 어우러진 수려한 경관으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특히 성내 정자인 영보정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빼어나다. 그러나 아름다운 역사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곳은 병인박해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며, 1866년 갈매못성지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카 등 5명의 성인이 서울에서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고 이송되었던 곳이다. 이들 성인들은 이곳 충청수영 장교청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바닷가 모래사장인 갈마진두(갈매못성지)로 가서 순교하였다. 현재 충청수영성에서 성인들이 순교했던 갈매못성지까지 천주교 성지 순례길이 조성되어 있다. 전국 유일의 바닷가 성지인 갈매못성지에는 순교자기념비와 기념관, 사제관, 수녀원 등이 건립되어 있고, 한 해 4~5만 명 정도의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현재는 시설 개선 공사 중이라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보령의 시간은 바다와 함께 흐른다
한낮을 조금 넘긴 시간. 보령의 바다를 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보령에 와서 바다를 안 보고 갈 순 없다. 바닷길이 갈라지는 걸로 유명한 무창포해수욕장으로 향한다. 갈라지는 바닷길은 물때를 잘 맞춰야 하지만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언제고 가능한 일. 무창포의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새하얀 백사장을 무심하게 걸어보는 것도 좋다. 무창포해수욕장은 서해안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해수욕장이다. 1928년의 일이니 무려 100년 가까이 됐다. 바다는 여전히 신비스럽고 아름답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바다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 가을의 끝자락으로 접어든 지금 해수욕은 어렵겠지만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하거나 바닷길을 걷는 건 가능하다. 바닷길은 매월 음력 보름날과 그믐날을 전후로 두세 차례 열린다.
오후 5시반. 대천 바다에 노을이 내린다. 파란 바다는 검게 물들고 하늘은 붉게 타오른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바다 풍경은 바라만 봐도 좋다. 눈부셨던 만추의 하루가 다시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곧 떠나야 할 때다.
▷힐링 스페이스
-성주산자연휴양림과 편백나무숲
위치 충남 보령시 성주면 먹방계곡길 28
▷역사의 숨결
-성주사지
위치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보령의 핫플
-우유창고
위치 충남 보령시 보령시 천북면 홍보로 574
[글과 사진 이상호(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55호 (20.11.2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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