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심리학과 만나다> (6)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가는 누굴까? 세대와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브람스를 꼽을 것이다. 가을만 되면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스산한 바람 속에서, 겨울을 준비하느라 부산한 사람들의 발자국 속에서 그가 만든 선율이 들려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헌법재판소가 들어서 있다. 헌법재판소로 향하는 안국역 2번 출구 사거리에 오래된 찻집 ‘브람스’가 있다. 1985년에 문을 연 곳인데, 말이 찻집이지 전통차도 팔고 술도 판다. 예전에는 출판사들이 종로에 밀집해 있어 여기서 사람도 만나고 음악도 듣곤 했다. 흰 수염이 바람에 휘날리는 브람스의 캐리커처가 걸린 2층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의 음악을 들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 하면 그의 음악을 모르거나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말을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최근에는 이 대사를 타이틀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까지 만들어져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이 말은 본래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제목이다. 이 소설을 토대로 제작되어 1961년에 개봉한 미·불 합작영화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미국에서는 <굿바이 어게인>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이별의 슬픔’이라는 뜻을 가진 <이수(離愁)>라는 다소 생뚱맞은 제목을 달고 개봉되었다.

아나톨리 리트바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순진한 청년의 슬픔과 고독을 그린 작품이다. 실내장식가인 이혼녀 폴라(잉그리드 버그만 분)는 트럭매매를 하는 부유한 신사 로제(이브 몽탕 분)와 5년째 연인 사이지만 결혼하지 않는다. 로제는 바람둥이였다. 로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폴라는 어느 날 의뢰인의 아파트에 갔다가 그 집 아들인 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첫눈에 호감을 느낀 청년은 폴라를 향해 접근한다.

스물네 살 먹은 변호사인 시몽(안소니 퍼킨스 분)은 누구나 아는 흔한 방식으로 음악회 표를 예매해 연상의 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이때 폴라에게 던진 질문이 이것이다.

“Do you like Brahms?”

이 한마디 대사가 영화를 명화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토벤을 좋아하세요?”
“모차르트를 좋아하세요?”

시몽의 대사가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영화의 운명도 브람스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사진_픽사베이

 

아나톨리 리트바크는 아니 프랑수아즈 사강은 수많은 음악가 중 왜 하필 브람스를 선택한 것일까? 베토벤은 워낙 위대하고, 모차르트는 너무 감미로워서? 브람스는 부담스럽지 않고 만만해 보이니까? 아니다. 열정적인 젊은 남자와 원숙한 연상의 여인과의 사랑, 소설과 영화 속 로맨스 주인공들의 사랑을 대입시키기에는 브람스가 가장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브람스가 슈만 부부를 처음 만난 건 1853년 10월 1일이었다. 브람스가 슈만의 집을 찾아간 것이다. 당시 브람스는 스무 살 꽃다운 나이였고, 슈만은 마흔세 살 중년의 나이였다. 슈만 옆에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빛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던 서른네 살의 클라라가 있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슈만 부부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브람스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젊은 천재를 발견한 슈만은 기쁨에 들떠 있었으며, 예사롭지 않은 연주를 접한 클라라는 알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이 만남은 세 사람을 하나의 운명 속으로 몰아넣었다. 브람스의 천재성에 놀란 슈만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브람스를 아끼고 신뢰하며 후원했다. 슈만 덕분에 브람스는 유럽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브람스 역시 이런 슈만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평생 슈만을 스승으로 받들며 존경했다. 클라라를 그토록 사랑했으면서도 세속적 사랑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 스승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브람스와 클라라의 사랑은 정신적 사랑에만 머물렀다. 그만큼 브람스는 신사였다.

 

“나의 사랑하는 클라라.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부드럽게 편지를 쓰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친절과 사랑을 베풀고 싶어요. 너무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말을 시작할 수가 없군요. 흠모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나는 당신을 내 연인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슈만이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이런 열정적인 편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였다. 브람스는 음악이나 생활 면에서 모두 자기관리와 자기절제가 철저하고 엄격했다. 사랑도 그랬다. 그저 클라라를 지켜보며 사랑하는 것에서 만족했다.

오랜 자료 수집과 집필 작업 끝에 『브람스 평전』이라는 탁월한 역작을 펴낸 이성일 작가는 브람스의 이 같은 사랑을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소유함으로써 퇴색되고 변질하는 사랑이 아니라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아름다움으로 간직되는 사랑이다.

 

슈만은 제자 브람스와 아내 클라라의 사랑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슈만은 브람스에 대한 믿음과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클라라의 사랑과 헌신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고 자책했다. 그만큼 브람스와 클라라 두 사람을 온전히 신뢰했다.

클라라는 어땠을까? 그는 슈만을 더 사랑했을까 아니면 브람스를 더 사랑했을까?

“클라라의 일생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그것은 슈만과 함께한 시절이었지, 브람스와 보낸 시간은 아니었다. …… 클라라는 나중에 죽으면 슈만이 있는 곳에 함께 묻힐 것이고, 또 항상 슈만을 바라보는 형태의 기념비를 세워 달라고 말했다. 죽어서도 슈만만 바라보겠다는 것. 즉 여인 클라라의 사랑의 대상은 오로지 슈만이었지 브람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본에 있는 슈만과 클라라의 무덤에 세워진 기념비, 즉 늘 클라라가 슈만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놓은 그 기념비를 보고 있으면, 이내 브람스가 더 애처롭게 느껴진다. …… 브람스와 클라라는 결혼해서 함께 살지 않았어도 서로서로 완전히 소유했다고 믿는다. 역설적이지만 그들은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완전히 소유했다. 그 완전한 소유는 한계가 있는 육체적 소유가 아니고 무쇠보다도 강한 정신적 소유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성일 작가의 분석대로 두 사람은 이성과 예술의 힘으로 그들만의 사랑을 완성했다.

 

1856년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 클라라는 세계 곳곳으로 활발한 연주 여행을 다니며 명성을 얻었고, 슈만과 브람스의 음악을 해석하는 데 있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권위자로 활동했다. 브람스는 친구로서 동료로서 변함없이 클라라 옆을 지켰다. 클라라가 경제적으로 힘겨워할 때 티 나지 않게 도움을 준 것도 브람스였다. 음악 교육에 매진하던 그녀는 1896년 5월 20일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향년 77세였다.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접하고 달려왔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브람스는 자신의 삶이 멈춰버린 듯 비통해했다. 클라라의 죽음 이후 브람스의 건강은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간암으로 거동이 어려울 만큼 병세가 나빠진 그는 이듬해 4월 3일 빈의 아파트에서 클라라의 뒤를 따랐다. 평생 한 여인에게만 순정을 바친 우직한 천재 음악가는 그렇게 64년의 독신 생활을 마감했다.

 

짝사랑. 어떤 이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랑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한다. 상대방은 전혀 알지 못하는데 나 혼자만 마음속으로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거나 키워가는 것, 상대방이 알고는 있으나 이를 받아줄 상황이 아니라서 혹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 애를 태우는 것, 상대방도 나에게 호감은 있으나 나만큼 간절하지 않아 완전히 쌍방향이 되지 못한 채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이 모두를 짝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 어떤 형태든 사랑하는 쪽에서는 애절함, 안타까움, 절박함, 그리움이 뒤범벅되게 마련이며, 심할 경우 깊은 고독과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상대방을 향해 불일 듯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을 애써 조절하고 억누른 채 태연히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절실하다.

짝사랑할 때도 둘이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이 분비된다. 하지만 슬픔을 느낄 경우, 노르아드레날린과 같은 호르몬도 분비된다. 그러니까 짝사랑을 하게 되면 기쁨을 주는 호르몬과 고통을 주는 호르몬이 동시에 분비되는 셈이다. 그러니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는가? 매일 천당과 지옥 또는 냉탕과 온탕을 교대로 드나드는 기분일 것이다.

 

사진_픽셀

 

짝사랑의 대상이 되는 쪽은 어떨까? 그 역시 괴롭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는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할 생각도 없는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그러나 이때 짝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좀 더 지혜롭게 처신하는 게 좋다. 자칫 동정심이나 연민으로 달래거나 포용하려다가 상대방에게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매정하게 대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면 뜻하지 않은 반감을 불러올 수도 있다. 나아가 상대방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채 불한당이나 스토커 취급을 한다면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사랑을 잘하는 데도 지혜와 요령이 필요하지만, 사랑을 잘 받거나 피해 가는 데도 그만큼의 지혜와 요령이 필요하다.

짝사랑이 가장 잘 유지되고, 아름답게 이어지다가, 숭고하게 마무리된 사례를 찾으라면 아마도 브람스와 클라라의 경우가 아닐까? 짝사랑은 참으로 어렵고 힘겹고 고독한 법이다.

 

브람스의 음악은 그의 철저하고 엄격했던 삶과 사랑만큼이나 깊고 넓다. 근면하고 성실했던 그의 기질이 배인 음악은 빈틈없이 정교하고 튼튼하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고뇌와 우수 같은 게 담겨 있다. 새싹이 돋아나는 봄보다는 낙엽이 나뒹구는 가을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이유다. 몇 가지 까닭이 있다. 그의 고향인 함부르크는 항구 도시다. 사람들이 오갈 때는 왁자지껄하지만, 모두 떠나고 나면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안개 낀 항구는 낮에도 스산하고 밤이 되면 더욱 을씨년스럽다. 침울하면서도 왠지 음울한 분위기 속에 성장한 그로서는 본인도 모르게 그 같은 정서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집안 사정으로 어렸을 때부터 숱한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음악이 없었더라면, 그의 영원한 연인이자 뮤즈인 클라라가 없었더라면 그는 슈만의 뒤를 따랐을지도 모른다. 살 이유도 낙도 없었으므로.

브람스는 생전에 4개의 교향곡을 썼다. 1876년에는 20여 년에 걸쳐 작곡한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되었다. 1854년에 함부르크에서 처음 쓰기 시작한 이 곡은 거장 베토벤을 의식해 수정과 퇴고를 거듭하느라 완성이 늦어졌다. 베토벤의 뒤를 잇는 교향곡을 완성하고 싶다는 그의 강렬한 소망 때문이었다.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이 곡을 베토벤의 열 번째 교향곡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내면적이고 사색적인 그의 교향곡은 이후 작곡한 다른 세 곡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교향곡 제3번’ 3악장은 영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명곡들은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대학 축전 서곡’, ‘피아노 협주곡’, ‘비극적 서곡’, ‘현악 5중주곡’, ‘독일 레퀴엠’, ‘알토 랩소디’ 등 다양하다.

 

그러나 나는 우수와 고뇌에 가득 찬 그의 다른 명곡들보다 경쾌하고 빠른 리듬의 ‘헝가리 춤곡’을 즐겨 듣는다. 브람스는 1853년, 슈만 부부를 만나기 전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의 반주를 맡아 연주 여행을 떠난다. 이때 그는 헝가리를 방문했다가 집시들 사이에 전해오던 민속 음악에 매료된다. 이후 꾸준히 헝가리 집시 음악을 채집하고 연구하던 그는 1868년 제1, 2집을 출판한 데 이어 1880년 제3, 4집을 출판함으로써 모두 21곡의 헝가리 춤곡을 완성했다. 이 춤곡은 헝가리에 정착한 집시들의 음악을 브람스의 시각으로 해석한 곡으로 각각 2~3분에서 길어야 5분 정도 길이로 구성되었다. 피아노 연탄곡(連彈曲, 한 대의 건반 악기를 두 사람이 함께 치며 연주하기 위하여 만든 곡)으로 먼저 발표되었다가 나중에 관현악을 위한 곡으로 편곡되기도 했고, 일부는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되기도 했다.

중요한 건 ‘헝가리 춤곡’이 만들어져 연주된 시기가 브람스가 클라라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졌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제1, 2집의 초연은 1868년 11월 1일, 한 개인적 사교모임에서 브람스와 클라라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제3, 4집 역시 1880년 5월 3일, 브람스와 클라라에 의해 개인적 사교모임에서 초연되었다. 이국적 정서의 흥겨운 이 곡은 브람스의 자유로운 영혼과 내면에 담긴 발랄한 상상력이 클라라를 향한 사랑과 만나 불꽃을 일으키는 느낌이다. 따라서 브람스의 어느 음악에서도 접하기 힘든 경쾌함과 명랑함이 차고 넘친다.

그래서 어떤 연주회에서는 이 곡을 연주하며 지휘자가 춤을 추기도 하고, 일부러 유머러스한 동작을 취하기도 한다. 한 의자에 앉은 두 연주자가 파안대소하는 얼굴로 춤추듯 신나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광경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만큼 대중들이 좋아하는 곡이다.

 

그런데 ‘헝가리 춤곡’을 여러 번, 수십 번 듣다 보면 점점 숙연해지면서 눈물이 나온다. 흥겨움과 경쾌함 속에 숨겨진 브람스의 진한 고독과 슬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한이 가슴 깊이 밀려드는 까닭이다. 그는 이 곡을 클라라와 함께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빠르게 진행되는 음악 속에 시간이 정지돼 버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집시(Gypsy)는 동유럽에 주로 거주하는 인도아리아계의 유랑민족을 일컫는 영어 표현이다. 지금도 낮은 교육 수준, 높은 실직률과 범죄율 등으로 헝가리인들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소수 민족의 대명사인 집시는 정주하지 않는 방랑, 자유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 지구별 나라의 영원한 이방인을 상징한다. 21곡의 ‘헝가리 춤곡’을 만들어 연주하던 브람스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 영원한 자유, 낭만, 해방 그리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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