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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옥천군의 문화재
dlqh**** 조회수 595 작성일2020.06.01

안녕하세요?

숙제중 우리고장(옥천군)의 문화재를 조사하래요^^

설명은 기본,사진첨부는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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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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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옥천군의 문화재)

1.옥천 용암사 동·서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338호

지 정 일 2002.03.12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청2길 400 (삼청리 산51-4) 용암사

시 대 고려시대

용암사는 신라 진흥왕 13년(552) 때 의신이 세운 사찰이다. 이 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달리 대웅전의 앞이 아니라 사방이 한 눈에 조망되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있다. 석탑이 사방의 조망권이 확보된 위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행했던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천비보사상이란, 탑이나 건물을 건립해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것이다.

같은 모양의 석탑 2기는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자연암반 위에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층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동탑은 4.3m, 서탑은 4.1m로 규모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탑의 경우 2층과 3층 탑신의 몸돌이 결실되어 새로이 보충해 놓은 것이다.

각 부의 양식과 석재의 결구 수법에서 매우 간략화된 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탑은, 현재까지 확인된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하게 쌍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2.옥천 용암사 마애여래입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청2길 400 (삼청리 산51-1)

시 대 통일신라시대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창건한 용암사에 있는 마애불로 방 모양으로 암벽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붉은 바위색이 퍽 인상적인 작품이다.

사찰에서는 마의태자상이라고 하는데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 도공의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전한다.

발을 좌우로 벌리고 연꽃대좌 위에 서 있으며,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가는 코 등이 묘사된 얼굴에는 파격적인 미소에도 불구하고 도식화된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도식적인 표현은 갖다 붙인 듯한 팔과 V자형의 규칙적인 옷주름, 좌우로 힘없이 표현된 옷자락 등 신체의 세부표현에서도 보이고 있어 세련된 통일신라 조각이 형식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세련된 조각기법이 형식화되던 시기에 나타난 도식화된 작품으로 보인다.

3.옥천 이지당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 126 (이백리 33)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1544∼1592)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다. 처음에는 각신마을 앞에 있어서 각신서당이라고 하였다. 그 후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이 고장의 영재를 모아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송시열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문구의 끝인 지(止)를 따서 ‘이지당’이라 서당의 이름을 고치고 현판을 써서 걸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월이 흘러 퇴락한 것을 광무 5년(1901)에 옥천의 금씨·이씨·조씨·안씨 네 문중에서 다시 지은 것이다.

본채와 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앞면 7칸·옆면 1칸의 강당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양쪽 2칸은 거실이다. 누각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높은 단 위에 누마루를 두고 주변에 난간을 둘렀다. 대청에는 조헌이 직접 쓴 ‘각신서당’의 현판을 비롯하여 「이지당기」, 「이지당강학조약」 등이 남아있다.

4.옥천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8길 8 (교동리 320)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61년에 황폐한 향교를 복원하였다. 1966년과 1974년에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14호)과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고직사 등이다.

사당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교화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유안』·『청금록』·『선안』·『교안』 등 조선 후기 옥천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다.

5.옥천 청산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8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교평2길 18 (교평리 26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태조(재위 1392∼1398) 때 지은 후 효종(재위 1649∼1659)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1966년에 수리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인 대성전과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토비를 지급받아 운영하였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소장되었던 책은 모두 흩어지고 잃어버려 거의 없는 상태이다.

6.옥천 두암리 삼층석탑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이원2길 17 (이원리 582-3)

시 대 고려시대

두암마을의 민가 옆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주위에서 고려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당시의 옛 절터임을 알게 되었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을 2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꼭대기의 머리장식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본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아래층 기단에는 각 면마다 3개씩의 안상을 움푹 들어가게 새겼고, 위층 기단에는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에는 한쪽면에 문짝모양을 새겼는데 그 안에 자물쇠도 표현해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다.

2층 기단에 3층 탑신이라는 통일신라의 기본양식을 따르면서도, 아래층 기단이나 지붕돌 등에서 그 전형을 벗어나 있어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탑으로 보인다.

7.옥천 청석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장계1길 57 (장계리 산7-1)

시 대 신라시대

이 다리는 신라 문무왕때인 660년경에 만든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본래는 군북면 증약리 경부선 철도 자리에 있었으나 철도공사로 인하여 증약마을 입구로 옮겼으며, 그 후 수해로 인하여 2001년 4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이 다리가 있던 증약마을은 찰방역이 있었던 곳으로 왕래가 빈번하였다.

이 돌다리는 높이 1.75m, 너비 2.2m, 길이 9.83m이며, 다리의 구조는 양쪽 개울가를 돌로 쌓고 개울 바닥에 넓직한 돌을 깔은 다음 사각형의 돌기둥을 2개씩 세워 그 위에 넓고 긴 널돌을 얹어 길바닥을 만들었다.

8.옥천 옥주사마소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지 정 일 1987.03.3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67-6 (상계리 57-2)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옥천지방에 속한 사마소이다.

조선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쓴 「의창중수기」에 의하면 이 건물은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저장해 두던 의창건물을 뜯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앞면 4칸에 툇마루를 두고, 그 뒤로 오른쪽에는 마루, 왼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내부에는 관성사마안, 향약계안, 옥천군향계규약 등 조선시대 문인들의 면모를 알려주는 여러 편의 문서들이 있다.

9.옥천 경현당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지 정 일 1987.03.3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3길 88-17 (용방리 53)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지방의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서당 건물이다. 조선 숙종 23년(1677)에 교육을 실시하는 경현당과 제사를 지내는 용문영당을 함께 세웠으나 용문영당은 허물어져 없어졌다.

경현당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오른쪽에는 마루, 왼쪽에는 온돌방이 있는 매우 소박한 구성의 집이다. 온돌방 북쪽 벽에는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는 감실을 두었다. 그 외 당내에는『시안』,『용문서당계좌목』 2개의 문서가 보존되어 있다.

10.옥천 조헌 신도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지 정 일 1996.01.05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농1길 69 (도농리 926-1)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조헌은 명종 20년(1565) 성균관에 입학하여 2년 후인 1567년 병과에 급제하였다. 그후 호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옥천군 안읍 밤티로 들어가 제자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600여명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하였으나 충청도순찰사의 방해로 해산당하여, 불과 700여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였고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전투를 벌여 끝까지 분전하다가 칠백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비에는 선생의 이 같은 생애와 최후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에 대하여 자세히 적고 있다. 인조 27년(1649)에 세운 비로,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11.옥천 경율당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지 정 일 1998.06.26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종미3길 120 (종미리 523)

시 대 조선시대

경율당은 조선 영조 12년(1736)에 용궁 전씨의 시조인 전섭의 47대손인 전후회가 세웠다. 율곡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여 자신의 호를 경율이라 하고, 서당 이름도 경율당이라 했다. 후손들의 학문 연수와 인격 수양의 장소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됐다.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고 4면 모두 마루가 있어 전형적인 서당의 구조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마루 끝에 있는 기와에 ‘옹정30년을유’라는 글이 있어 1730년대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해마다 전씨 문중의 제사를 지내는데 이용되고 있다.

12.옥천 용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지 정 일 1998.11.20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청2길 400 (삼청리 산51-4)

시 대 조선시대

용암사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장령산에 있는 사찰로, 법주사의 말사이다.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라고 이름지었으나,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용바위가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대웅전 안에는 불상과 5종의 탱화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 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불상은 이전의 연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80년 불상을 열어 보았을 때 속에서 ‘순치 8년 신묘년(효종 2년, 1651)’에 만들어진 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이 불상이 조선 효종 2년(1651)에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으며, 다라니경에 인쇄된 내용으로 보아 경상도 문경의 오정사에서 만들어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13.옥천 척화비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6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산4-4

시 대 조선시대

척화비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세력을 배척할 것을 온 백성에게 경고하고자 서울과 전국 교통 요충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이 척화비는 원래 땅에 묻히었다가 후에 산 기슭으로 자리를 옮겨 이곳에 남게 되었다.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각 면이 많이 파손된 모습이다.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의지를 적고 있다.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으로,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고, 현재는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14.옥천 후율당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도이길 42 (도이리 18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헌(1544∼1592)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조헌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김경백 등과 의병 1,600여명을 모집하고 승병인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충청도 순찰사인 윤극형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되어 700여명으로 금산전투에 참전했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솟을대문과 돌로 쌓은 담장이 둘러져 있고, 뜰에는 금산전투에서 그를 대신하여 죽으려 했던 그의 아들 조완기의 효자각이 서 있다.

이곳에는 광해군 3년(1621) 판각한 『항의신편』125매와 『유림시판』10매, 선조가 내렸다는 『조서』1매를 보관하고 있다.

15.옥천 조헌 묘소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4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산63-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학자이며 의병장인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묘소이다.

명종 22년(156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는 국가 정책에 있어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았으며, 특히 일본과의 친교정책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에 후율정사를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데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을 공격하는데 앞장 섰으며,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700명의 군사로 수만의 왜적과 싸우다 전원 전사하였다. 그 후 선생의 제자들이 700의사들의 유해를 거두어 한곳에 합장하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별도로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하였으나 인조 14년(1636)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16.옥천 양신정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29호

지 정 일 1978.12.1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옥천동이로 788-29 (금암리 76)

시 대 조선시대

양신정은 조선 중기 문신인 송정 전팽령(1480∼1560)이 관직을 떠나 있을 때 글도 가르치고 독서도 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전송정’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인종 1년(1545)에 세워진 건물이며, 소세양의 「양신정기」에 그 당시의 기록이 남아 전해 오고 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12년(1620)에 다시 지었으나, 영조 9년(1733)에 무너져 없어졌다. 지금의 정자는 순조 28년(182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목담호숫가에 서 있는 목조기와집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서쪽 한칸은 온돌로 되어 있고, 주위에는 나지막한 흙돌담이 둘러져 있으며, 소나무숲이 이곳을 둘러싸고 있다.

17.옥천 석탄리 고인돌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47호

지 정 일 1975.08.20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안터1길 36 (석탄리 685-2)

시 대 청동기시대

고인돌(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양식 중 하나로, 주검을 땅 위에 두는 탁자식(북방식)과 땅 아래에 두는 바둑판식(남방식), 그리고 주검을 지하에 묻고 그 위에 덮개돌만을 덮는 개석식의 세 종류가 있다.

옥천 석탄리 고인돌은 탁자식 고인돌로, 4면에 널돌을 세우고 그 위로 길고 평평한 덮개돌을 얹은 모습이었는데, 현재는 앞뒷면 널돌은 사라지고 양쪽면에만 널돌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갈돌대, 돌쩌귀, 돌칼, 돌화살촉, 그물추, 구멍쪼으개, 여성을 나타낸 얼굴조각, 토기 등 이다. 주로 식생활에 관련된 유물이 많아 묻힌 사람은 여자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18.옥천 독락정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지 정 일 1998.06.26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연주길 170 (연주리 617)

시 대 조선시대

독락정은 조선 선조 40년(1607) 절충 장군 중추부사의 벼슬을 지낸 주몽득이 세운 정자이다.

주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선비들이 모여 지내던 정자의 구실을 하다가, 후대에 와서는 유생들의 학문 연구 장소로 이용되었다. 영조 48년(1772)에 고쳐 지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건물 규모는 앞면 2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정면에는 당시 군수였던 심후의 ‘독락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마루에는 송근수의 율시기문을 비롯하여 10여점의 기문액자가 걸려 있다.

19.옥천 덕양서당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4호

지 정 일 1998.06.26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덕1길 95-5 (도덕리 46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인평대군의 사부를 지낸 유식(1586∼1650)이 세운 서당이다.

유식은 시조 유검필의 24대손으로 학력이 높았고 대학자였다. 덕양서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충과 효를 가르쳤으며, 고종 32년(1895) 수리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덕양서당’이라고 쓴 현판은 송근수의 친필이고, 송병선의 ‘서당기’가 대청에 걸려 있다.

20.옥천 백운리 고가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60호

지 정 일 2007.09.07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길 49 (백운리 163-4)

시 대 조선시대

백운리고가는 명문와를 통해 도광 22년(1842)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참판이 기거했다하여 참판집으로 불리던 집이다. 해방 후 밀성박씨 통덕랑 휘석자파에서 매입하여 안채는 사당으로 사용하고 사랑채는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기와의 제작 수법과 기술이 뛰어나고, 툇마루 청판은 오래된 고식기법으로 조선시대의 치목기법이 역력히 나타나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아울러, 건축 가구법이 축조 당시의 목조기술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일부의 변형 기단과 일부 부재 교체를 제외하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건축 연구자료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

202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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