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 옥천읍의 문화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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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의 문화재)
1.옥천 용암사 동ㆍ서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338호
지 정 일 2002.03.12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청2길 400 (삼청리 산51-1) 용암사
시 대 고려시대
용암사는 신라 진흥왕 13년(552) 때 의신이 세운 사찰이다. 이 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달리 대웅전의 앞이 아니라 사방이 한 눈에 조망되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있다. 석탑이 사방의 조망권이 확보된 위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행했던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천비보사상이란, 탑이나 건물을 건립해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것이다.
같은 모양의 석탑 2기는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자연암반 위에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층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동탑은 4.3m, 서탑은 4.1m로 규모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탑의 경우 2층과 3층 탑신의 몸돌이 결실되어 새로이 보충해 놓은 것이다.
각 부의 양식과 석재의 결구 수법에서 매우 간략화된 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탑은, 현재까지 확인된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하게 쌍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2.옥천 용암사 마애여래입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청2길 400 (삼청리 산51-1) 용암사
시 대 통일신라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창건한 용암사에 있는 마애불로 방 모양으로 암벽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붉은 바위색이 퍽 인상적인 작품이다.
사찰에서는 마의태자상이라고 하는데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 도공의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전한다.
발을 좌우로 벌리고 연꽃대좌 위에 서 있으며,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가는 코 등이 묘사된 얼굴에는 파격적인 미소에도 불구하고 도식화된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도식적인 표현은 갖다 붙인 듯한 팔과 V자형의 규칙적인 옷주름, 좌우로 힘없이 표현된 옷자락 등 신체의 세부표현에서도 보이고 있어 세련된 통일신라 조각이 형식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세련된 조각기법이 형식화되던 시기에 나타난 도식화된 작품으로 보인다.
3.옥천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8길 8-5 (교동리 320)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61년에 황폐한 향교를 복원하였다. 1966년과 1974년에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14호)과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고직사 등이다.
사당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교화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유안』·『청금록』·『선안』·『교안』 등 조선 후기 옥천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다.
4.옥천 옥주사마소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지 정 일 1987.03.3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67-6 (상계리 57-2)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옥천지방에 속한 사마소이다.
조선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쓴 「의창중수기」에 의하면 이 건물은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저장해 두던 의창건물을 뜯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앞면 4칸에 툇마루를 두고, 그 뒤로 오른쪽에는 마루, 왼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내부에는 관성사마안, 향약계안, 옥천군향계규약 등 조선시대 문인들의 면모를 알려주는 여러 편의 문서들이 있다.
5.옥천 용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지 정 일 1998.11.20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청2길 400 (삼청리 산51-1) 용암사
시 대 조선시대
용암사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장령산에 있는 사찰로, 법주사의 말사이다.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라고 이름지었으나,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용바위가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대웅전 안에는 불상과 5종의 탱화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 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불상은 이전의 연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80년 불상을 열어 보았을 때 속에서 ‘순치 8년 신묘년(효종 2년, 1651)’에 만들어진 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이 불상이 조선 효종 2년(1651)에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으며, 다라니경에 인쇄된 내용으로 보아 경상도 문경의 오정사에서 만들어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6.옥천 척화비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6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성왕로 1074 (삼양리 산4-4)
시 대 조선시대
척화비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세력을 배척할 것을 온 백성에게 경고하고자 서울과 전국 교통 요충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이 척화비는 원래 땅에 묻히었다가 후에 산 기슭으로 자리를 옮겨 이곳에 남게 되었다.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각 면이 많이 파손된 모습이다.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의지를 적고 있다.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으로,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고, 현재는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7.옥천 육영수 생가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
지 정 일 2002.04.26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113-6 (교동리 313)
시 대 조선시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925년 11월 29일에 태어난 장소이다.
현재 건물은 없지만 1600년대 김정승 이후 송정승 및 민정승이 거주하여 삼정승의 집이라 불리던 가옥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민정승의 자손 민대감에게서 1920년 매입하였다고 한다.
6,047㎡의 대지 위에 1970년 초에 개축된 관리사·사당 등만 남아 있으며, 주변은 울창한 산림이 형성되어 있고 본채·사랑채·별당 등 10여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터만 남아 있으며 주변은 연못과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배치는 대문을 들어서면 넓직한 사랑채 터가 있고 그 뒤에 안채 터가 있으며, 청기와 지붕의 사당과 별당 터가 있다. 그리고 주위에는 관리인과 고용인들이 기거하던 부속건물이 있으며 사랑채 터 동쪽에는 연못이 있다.
육영수 여사는 옥천지방의 독농가 육종관의 2녀로 출생하였으며, 이름있는 문벌이었고 우리나라 전통적인 부덕을 갖춘 현대여성이었다. 특히 불우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와 희생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600년대 김정승 이후 정승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전형적인 양식의 건축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곳이며,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곳으로 가치있는 자료이다.
8.옥천 죽향리사지 삼층석탑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1호
지 정 일 2002.10.21
소 재 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1길 26 (문정리 83)
시 대 고려시대
이 탑은 죽향리 탑선골의 절터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죽향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겼다. 소형의 석탑이지만 단층의 기단부 위에 3층의 탑신부와 복발, 보주로 이루어진 상륜부를 갖추고 있어 거의 원래의 형태에 가깝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건물 모퉁이에 세운 기둥인 우주와 쓰러지지 않도록 받치는 기둥인 탱주가 표현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고, 기단갑석의 윗면에는 1단의 돌출부를 두어 탑신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1층의 몸돌에는 각 면마다 우주를 그대로 본떠 새겼으며 전면에는 문짝을 음각으로 표현하였다. 2,3층의 몸돌에는 우주가 표현되지 않았고 3층에는 신주를 모셔두는 감실이 마련되었다.
탑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매우 마르고 길쭉한 모습으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크기는 전체높이 291cm, 기단 폭 92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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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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