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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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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tjdw****
작성일2006.12.30 조회수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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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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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용암사 쌍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338호  

지 정 일 2002.03.12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용암사

시 대 고려시대

 

용암사는 신라 진흥왕 13년(552) 때 의신이 세운 사찰이다. 이 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달리 대웅전의 앞이 아니라 사방이 한 눈에 조망되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있다. 석탑이 사방의 조망권이 확보된 위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행했던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천비보사상이란, 탑이나 건물을 건립해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것이다.

 

같은 모양의 석탑 2기는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자연암반 위에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층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동탑은 4.3m, 서탑은 4.1m로 규모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탑의 경우 2층과 3층 탑신의 몸돌이 결실되어 새로이 보충해 놓은 것이다.

 

각 부의 양식과 석재의 결구 수법에서 매우 간략화된 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탑은, 현재까지 확인된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하게 쌍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2.용암시 마애불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산51-1

시 대 통일신라시대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창건한 용암사에 있는 마애불로 방 모양으로 암벽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붉은 바위색이 퍽 인상적인 작품이다.

 

사찰에서는 마의태자상이라고 하는데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 도공의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전한다.

 

발을 좌우로 벌리고 연꽃대좌 위에 서 있으며,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가는 코 등이 묘사된 얼굴에는 파격적인 미소에도 불구하고 도식화된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도식적인 표현은 갖다 붙인 듯한 팔과 V자형의 규칙적인 옷주름, 좌우로 힘없이 표현된 옷자락 등 신체의 세부표현에서도 보이고 있어 세련된 통일신라 조각이 형식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세련된 조각기법이 형식화되던 시기에 나타난 도식화된 작품으로 보인다.

 

3.옥천 이지당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 33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1544∼1592)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다. 처음에는 각신마을 앞에 있어서 각신서당이라고 하였다. 그 후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이 고장의 영재를 모아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송시열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문구의 끝인 지(止)를 따서 ‘이지당’이라 서당의 이름을 고치고 현판을 써서 걸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월이 흘러 퇴락한 것을 광무 5년(1901)에 옥천의 금씨·이씨·조씨·안씨 네 문중에서 다시 지은 것이다.

 

본채와 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앞면 7칸·옆면 1칸의 강당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양쪽 2칸은 거실이다. 누각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높은 단 위에 누마루를 두고 주변에 난간을 둘렀다. 대청에는 조헌이 직접 쓴 ‘각신서당’의 현판을 비롯하여 「이지당기」, 「이지당강학조약」 등이 남아있다.

 

4.옥천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20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61년에 황폐한 향교를 복원하였다. 1966년과 1974년에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14호)과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고직사 등이다.

 

사당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교화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유안』·『청금록』·『선안』·『교안』 등 조선 후기 옥천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다.

5.청산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8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 26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태조(재위 1392∼1398) 때 지은 후 효종(재위 1649∼1659)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1966년에 수리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인 대성전과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토비를 지급받아 운영하였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소장되었던 책은 모두 흩어지고 잃어버려 거의 없는 상태이다.

6.두암리 삼층석탑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582-3

시 대 고려시대

 

두암마을의 민가 옆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주위에서 고려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당시의 옛 절터임을 알게 되었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을 2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꼭대기의 머리장식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본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아래층 기단에는 각 면마다 3개씩의 안상을 움푹 들어가게 새겼고, 위층 기단에는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에는 한쪽면에 문짝모양을 새겼는데 그 안에 자물쇠도 표현해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다.

 

2층 기단에 3층 탑신이라는 통일신라의 기본양식을 따르면서도, 아래층 기단이나 지붕돌 등에서 그 전형을 벗어나 있어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탑으로 보인다.

7.청석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안내면 장계리 산7-1

시 대 신라시대

 

이 다리는 신라 문무왕때인 660년경에 만든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본래는 군북면 증약리 경부선 철도 자리에 있었으나 철도공사로 인하여 증약마을 입구로 옮겼으며, 그 후 수해로 인하여 2001년 4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이 다리가 있던 증약마을은 찰방역이 있었던 곳으로 왕래가 빈번하였다.

 

이 돌다리는 높이 1.75m, 너비 2.2m, 길이 9.83m이며, 다리의 구조는 양쪽 개울가를 돌로 쌓고 개울 바닥에 넓직한 돌을 깔은 다음 사각형의 돌기둥을 2개씩 세워 그 위에 넓고 긴 널돌을 얹어 길바닥을 만들었다.

8.옥주 사마소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지 정 일 1987.03.31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옥천읍 상계리 57-2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옥천지방에 속한 사마소이다.

 

조선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쓴 「의창중수기」에 의하면 이 건물은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저장해 두던 의창건물을 뜯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앞면 4칸에 툇마루를 두고, 그 뒤로 오른쪽에는 마루, 왼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내부에는 관성사마안, 향약계안, 옥천군향계규약 등 조선시대 문인들의 면모를 알려주는 여러 편의 문서들이 있다.

9.경율당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지 정 일 1998.06.26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안남면 종미리 523

시 대 조선시대

 

경율당은 조선 영조 12년(1736)에 용궁 전씨의 시조인 전섭의 47대손인 전후회가 세웠다. 율곡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여 자신의 호를 경율이라 하고, 서당 이름도 경율당이라 했다. 후손들의 학문 연수와 인격 수양의 장소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됐다.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고 4면 모두 마루가 있어 전형적인 서당의 구조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마루 끝에 있는 기와에 ‘옹정30년을유’라는 글이 있어 1730년대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해마다 전씨 문중의 제사를 지내는데 이용되고 있다.

10.옥천 척화비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6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산4-4

시 대 조선시대

 

척화비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세력을 배척할 것을 온 백성에게 경고하고자 서울과 전국 교통 요충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이 척화비는 원래 땅에 묻히었다가 후에 산 기슭으로 자리를 옮겨 이곳에 남게 되었다.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각 면이 많이 파손된 모습이다.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의지를 적고 있다.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으로,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고, 현재는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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