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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김립

[ 金立 ]

요약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 결성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8년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으나 이후 해체하고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여 비서부장을 지냈다.
출생-사망 ? ~ 1922.2.6
별칭 김익용(金翼容)
국적 한국
활동분야 사회주의 운동

김익용(金翼容)이라고도 불리었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勸業會) 결성에 동참하였으며, 1912년 시베리아에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광성학교(光成學校)와 길성학교(吉成學校)를 설립한 뒤, 1913년 왕칭현[汪淸縣] 뤄쯔거우[羅子溝] 다뎬쯔[大甸子]에 있는 동림무관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17년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로 러시아임시정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18년 1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 부회장에 선임되어 기관지 《한인시보 韓人時報》를 발행하였으며, 그해 2월에 열린 신민회(新民會) 망명간부회의에서 공산주의 수용을 주장하였다.

같은해 4월 이동휘·한형권(韓馨權)·전일(全一)·박진순(朴鎭淳)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선전부장이 되었으며, 기관지 《자유종》 주필이 되었다. 이어 9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가 1920년 사임하였다.

같은해 11월 코민테른(인터내셔널_제3인터내셔널)이 제공한 활동자금을 치타로 운반한 한형권으로부터 자금을 인수하여 상하이[上海]로 운반하였는데, 이때 사적으로 유용하였다는 의혹을 받아 일명 국제공산당자금사건에 연루되었다.

1921년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여 비서부장에 선임되었으나 1922년 2월 레닌이 제공한 자금을 임시정부에 반환하라고 주장한 오면직(吳冕稙)과 노종균(盧宗均)에 의해 상하이에서 암살되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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