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파일]한국판 카사노바의 원조 ‘박인수’

입력 2005.05.30 (20:33) 수정 2005.05.30 (21:0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기자: 1955년 이맘 때.
한국판 카사노바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해병장교를 사칭한 박인수는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습니다.
50년 전 서울지방법원에서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유명한 판결이 나왔습니다.
당시 카사노바 재판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은 무려 7000여 명.
이로 인해 법정은 유리창이 깨지는 등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해병장교로 입대한 박인수는 무단이탈로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애인의 변심...
그 이후 박인수는 엉뚱한 여성들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해병장교를 사칭한 26살 박인수가 댄스홀을 전전하며 농락한 여성들은 모두 70여 명.
여대생과 유부녀 그리고 고위공직자 딸 등 다양했습니다.
1심 판결을 맡았던 권순영 판사는 현역장교를 사칭한 부분에 대해서만 벌금형을 내렸고, 혼인빙자간음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권용갑(고 권순영 판사 아들):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고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판결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기자: 그러나 2심과 확정심에서는 원심을 뒤집고 징역 1년이 선고됐습니다.
문란해진 성풍속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었습니다.
⊙이임화(역사연구소 연구실장): 어떤 식으로 여성이 살아야 되는지, 그리고 이런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 이런 걸 교육하는 그런 사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자: 1년형을 선고받고 일단락지어진 박인수 사건.
그러나 1년 뒤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영화로 만들어지자 다시 여성의 정조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고, 박인수 사건은 다시 주목받았습니다.
살아 있다면 76살 노인이 되었을 박인수의 행적을 쫓아봤습니다.
본적지인 서울 서대문구로 가 이름을 입력하자 어디 살고 있는지는 물론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허영일(서대문구청 민원봉사계): 어느 시점에인가 타지역으로 호적을 옮겨갔다든가 사망을 했다든가...
⊙기자: 수소문 끝에 알아낸 것은 박인수가 대구에서 부인 명의로 카바레를 운영했고, 화재로 건물이 불 타자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댄스홀을 누비던 카사노바 박인수 이후 의사나 사업가를 사칭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파렴치한들은 동영상까지 남겨 협박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인터넷채팅이 이들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명숙(변호사): 자기 스스로를 선택해서 사귀고 좋아하고 관계를 갖는다면 상대방에 대해서도, 본인에 대해서도 비난하거나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그런 성숙된 인식이 필요한 시대가 된 거죠.
⊙기자: 박인수 사건은 전쟁의 참화에서 막 벗어나던 당시의 웃지 못할 풍속화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성혼식이 더 자유로워진 지금, 순진한 여성을 노린 현대판 카사노바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건파일, 송창언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사건 파일]한국판 카사노바의 원조 ‘박인수’
    • 입력 2005-05-30 20:22:55
    • 수정2005-05-30 21:02:49
    뉴스타임
⊙기자: 1955년 이맘 때. 한국판 카사노바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해병장교를 사칭한 박인수는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습니다. 50년 전 서울지방법원에서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유명한 판결이 나왔습니다. 당시 카사노바 재판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은 무려 7000여 명. 이로 인해 법정은 유리창이 깨지는 등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해병장교로 입대한 박인수는 무단이탈로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애인의 변심... 그 이후 박인수는 엉뚱한 여성들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해병장교를 사칭한 26살 박인수가 댄스홀을 전전하며 농락한 여성들은 모두 70여 명. 여대생과 유부녀 그리고 고위공직자 딸 등 다양했습니다. 1심 판결을 맡았던 권순영 판사는 현역장교를 사칭한 부분에 대해서만 벌금형을 내렸고, 혼인빙자간음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권용갑(고 권순영 판사 아들):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고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판결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기자: 그러나 2심과 확정심에서는 원심을 뒤집고 징역 1년이 선고됐습니다. 문란해진 성풍속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었습니다. ⊙이임화(역사연구소 연구실장): 어떤 식으로 여성이 살아야 되는지, 그리고 이런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 이런 걸 교육하는 그런 사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자: 1년형을 선고받고 일단락지어진 박인수 사건. 그러나 1년 뒤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영화로 만들어지자 다시 여성의 정조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고, 박인수 사건은 다시 주목받았습니다. 살아 있다면 76살 노인이 되었을 박인수의 행적을 쫓아봤습니다. 본적지인 서울 서대문구로 가 이름을 입력하자 어디 살고 있는지는 물론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허영일(서대문구청 민원봉사계): 어느 시점에인가 타지역으로 호적을 옮겨갔다든가 사망을 했다든가... ⊙기자: 수소문 끝에 알아낸 것은 박인수가 대구에서 부인 명의로 카바레를 운영했고, 화재로 건물이 불 타자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댄스홀을 누비던 카사노바 박인수 이후 의사나 사업가를 사칭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파렴치한들은 동영상까지 남겨 협박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인터넷채팅이 이들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명숙(변호사): 자기 스스로를 선택해서 사귀고 좋아하고 관계를 갖는다면 상대방에 대해서도, 본인에 대해서도 비난하거나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그런 성숙된 인식이 필요한 시대가 된 거죠. ⊙기자: 박인수 사건은 전쟁의 참화에서 막 벗어나던 당시의 웃지 못할 풍속화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성혼식이 더 자유로워진 지금, 순진한 여성을 노린 현대판 카사노바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건파일, 송창언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