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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포터 작가

 헬리포터 작가 누군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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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lmyo****
작성일2012.01.16 조회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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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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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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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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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작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앤 K. 롤링 (Joan K. Rowling | Joanne Kathleen Rowling) 소설가
출생
1965년 7월 31일 (영국)
가족
슬하 1남 2녀
학력
엑세터대학교 불문학, 고전학 학사
수상
2010년 안데르센 문학상
경력
1991.11 포르투갈 인카운터 영어학교 교사
관련정보
네이버[캐스트] - '해리 포터 시리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다'
사이트
공식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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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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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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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의 창조자, 조앤 캐슬린 롤링(Joanne Kathleen Rowling)

 

1. 유년시절

조앤 캐슬린 롤링(Joanne Kathleen Rowling)은 1965년 7월 31일에 영국 웨일스의 작은 시골 마을 치핑 소드베리에서 피터 제임스 롤링과 앤 볼랜트 부부의 첫 아이로 태어났다. (일각에서는 그녀의 출생지가 잉글랜드의 브리스톨 인근 소도시 예이트라고도 한다.) 독일인이었던 그녀의 고조모 샬로메 슈는 파리에서 하녀로 일하며 맨꼭대기 쪽방에서 지냈는데 미혼모가 되어 일을 그만둔다. 다시 일년뒤 또 임신하자 아이의 생부인 프랑스인과 결혼하고 드레스를 만들며 생계를 꾸려간다. 증조부 루이 볼랜트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와 Savoy 호텔 레스토랑, 프린스 레스토랑 등에서 책임 와인 웨이터로 일했다. 그리고 증조모 리지 스미스를 만나 조앤의 외할아버지 스탠리 볼랜트를 비롯하여 4남매를 낳았으나 이혼했다. 후에 전쟁에 참전했지만 '레종 드 뇌르' 동훈장만 남기고 심한 부상으로 사망하여 공동묘에 안장되었다.
어머니 앤 볼랜트는 여성 해군 출신으로, 열여덟 살에 런던에서 스코틀랜드의 해군 기지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같은 해군인 남편 피터 롤링을 만났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고 2년 뒤에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비행기 공장 지배인이었던 피터 롤링은 회사에서 계속 승진했고 중산층이 모여 사는 동네에 넓은 집까지 마련했다. 그러나 조앤이 열세 살이 되던 해 앤 롤링은 차를 따를 때 손이 심하게 떨린다는 걸 발견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2년 후 그녀는 다발성경화증(MS)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이 불치병은 척추에 특정한 단백질이 부족할 때 시작되는 병이었다. 앤 롤링은 학교 실험실 보조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불치병 진단을 받은 후에도 평상시와 같이 행동했다. 그러나 살림은 더욱 어려워지고 설상가상으로 실험실에서 쓰러지자 일을 그만둬야 했다. 잠시 속상해했지만 곧바로 그녀는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다. 일자리가 없으면 자발적으로 인근 교회에 나가 자발적으로 청소를 했다. 비록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단순히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녀의 부모님은 번갈아가며 두 딸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조앤은 브리스톨에서 윈터본(Winterbourne)에 이사 온 후 이웃집 어린이들과 함께 놀곤 했는데, 그 중 두 명의 아이의 성이였던 포터(potter)를 매우 좋아했다. 반면 구른다는 rolling 단어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그녀의 이름은 놀림감이 되곤 했다. 조앤의 손에는 늘 책이 쥐어져 있었고 그녀는 도서관을 들락날락거리며 종종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를 여동생에게 들려주었는데, 여섯 살 이후로는 몇 년간 토끼에 빠져 ‘홍역에 걸린 토끼’ 등 동물이 등장하는 동화를 주로 지었다.

[홍역에 걸린 토끼] 줄거리
어느날 떡갈나무 숲에 사는 토끼가 홍역에 걸려 그만 몸져눕고 말았어요. 이 소식은 금새 떡갈나무 숲속 구석구석까지 퍼졌고, 숲속 동물들은 모두 토끼를 걱정했어요. 하지만 홍역이 옮을까 걱정된 숲속 동물들은 아무도 토끼의 병문안을 가지않았어요. 며칠째 홀로 누워있던 토끼는 외롭고 서러웠어요. 그때 누군가 토끼네 집 문을 두드렸어요. 바로 토끼를 찾아온 뒝벌 아가씨였어요. 아가씨가 정성껏 간호한 덕분에 펄펄 끓던 토끼의 열이 내려갔어요. 다음날에는 거위 아줌마가 토끼의 집을 찾아왔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곰 아저씨와 돼지 형제가 찾아와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집 청소도 해주었답니다. 숲속 친구들이 돌봐준 덕분에 토끼의 병은 금방 나았어요. 병이 깨끗이 나은 토끼는 아침 일찍 일어나 당근 밭에서 부지런히 당근을 땄어요. 그리고 고마운 친구들의 집 문 앞에 당근을 하나씩 놓고 돌아왔답니다.

다이는 언니의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고, 나중에는 친구들까지 끌어 모아 낡고 허름한 그녀의 집은 마을 아이들로 가득했다. 조앤은 '이사벨 공주와 마리엔느 공주'라는 대본을 사서 여동생과 틈만 나면 역활을 바꿔가며 연극을 했다. 9살이 넘어 그녀는 인근의 공동묘지를 찾는 것을 즐겼다. 사내아이들처럼 담력테스트를 한 것이 아니라, 비석에 적혀 있는 이름과 생년월일, 직업 등을 보고 그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상상하며 인생 이야기를 만들곤 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캐릭터는 그때 적어둔 메모에서 따온 게 많다.)
두 번째로 이사간 곳은 Dean 숲에 있는 텃쉴(Tutshill)이란 곳이었는데 - '죽음의 성물'의 한 챕터에서 해리와 헤르미온느가 고드릭골짜기 탈출 직후 머무른 곳- 들판을 헤치며 위(Wye)강을 따라 여동생 다이애나와 함께 노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구식의 작은 초등학교와 엄격한 선생님은 그녀에게는 맞지 않았다. 집이 가난해져서 책이나 장난감을 구할 수 없었지만, 쉬는 시간이면 끝나지 않은 조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변으로 친구들이 몰려들거나 아이들이 매점에 모여 그녀를 초빙할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그녀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점심시간이 넘도록 들려주곤 했다. 조앤의 글을 읽은 그녀의 영어 교사는 그런 이야기꾼 능력에 놀라 그동안 써두었던 글들을 모두 가져오게 하여 읽었다. 그리고 조앤에게 너는 분명히 훌륭한 작가가 될 것이라며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의 작품을 출간하겠다는 그녀의 꿈은 이때부터 더욱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뭔가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단초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영어과목을 좋아한 반면 체육은 싫어했는데 실제로 배구를 하다가 팔에 부상을 입었다.

2. 시련속에서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엑세터 대학 불문학과 고전학을 공부한 조앤은 졸업 직후인 1987년부터 몇 년간 런던에 있는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본부에 있는 연구부서에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으나 언제나 공상에만 빠져 상사의 스케줄을 제대로 메모도 못했으며, 전화를 받으면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커피를 타면 엎지르기 일쑤였다. 결국 짬짬이 소설을 쓰던 것이 걸려 물러나와 다시 맨체스터 상공회의소에서 비서로 일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해고되었다. 어머니가 1990년에 병사하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지자 충격에 빠진 그녀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
곧이어 그녀는 한 신문에서 포르투갈의 어느 도시에 있는 학교에서 일할 영어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어릴 적에 자신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주셨던 영어교사처럼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녀는 1991년 11월부터 포르투갈 북부의 소도시오포르토에 있는 인카운터 영어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92년 10월에는 현지의 방송사 기자로 일하던 3세 연하의 조르즈 아란테스(Jorge Arantes)와 결혼하고 1993년 7월에 딸 제시카를 낳았다. 하지만 아내가 글쓰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던 남편은 백수로 지냈고, 조앤은 온갖 잡다한 일로 돈을 벌어야만 했다. 게다가 조르즈는 폭행과 욕설을 서슴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그해 11월에 파경을 맞이하고 별거상태에 들어갔다.
조앤 롤링은 2년 만에 어린 딸을 데리고 무일푼으로 영국으로 돌아왔고, 동생이 사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로 가서 친구에게 돈을 빌려 초라한 단칸방 임대아파트를 얻어 정착했다. 얼마 뒤에 조르즈가 영국으로 찾아오지만 조앤은 면담을 거절한 상태로 이혼절차를 밟았으며, 아예 전남편이 자기와 딸 주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법원 판결을 받아내기까지 했다. 28세에 이혼녀가 된 그녀는 이제 아기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당시 일자리도 없는 상황에서 아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1년여 동안 정부의 생활보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적지 않은 모멸감도 느꼈고 우울증에도 시달렸다. 그녀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교사자격 인증 석사(PGCE) 학위과정을 밟고 틈틈이 소설을 집필했다.

3. 무명작가의 시작
1990년에 그녀는 남자친구의 권유로 맨체스터로 이사할 생각이었으며, 마침 집을 알아보고 나서 런던의 부모님 댁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고장으로 기차가 4시간이나 시골 한복판에 정차하게 되자, 그녀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상상에 잠겼다. 창가 밖으로 보이는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 몇 마리를 멍청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머릿속에는 ‘해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어쩌다가 우연히 마법학교에 가게 된 소년으로 설정했다. 그녀는 이 주인공이 11세부터 17세까지 다니는 학교생활을 소재로 하되, 한 학년에 한 권씩을 배당해서 일곱 권짜리 시리즈를 만들기로 했다.
곧이어 그녀는 자기가 얻은 아이디어에 구체적으로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조앤 롤링은 종종 유모차를 끌고 나와 집 근처의 카페에서 하루에 단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원고를 썼는데 그녀가 자주 방문했던 카페 가운데 하나는 ‘엘리펜트 하우스’였다. 그 즈음 여동생이 찾아와 해리 포터 이야기를 읽어보더니 칭찬했다. "언니, 이거 너무 재미있다. 무조건 끝까지써봐, 다음얘기가 너무 궁금하다고." 이 말에 힘을 얻어 조앤은 1년안에 책을 완성해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글을 쓰면서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바로 볼드모트라는 악인의 캐릭터였다. 동화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나쁜 사람 정도가 아니라 진짜 생생한 '악'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책을 어린이용 동화로 할 것인지, 어른도 읽을 수 있는 소설로 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결국 고민 끝에 어른도 읽을 수 있는 판타지 소설로 탄생시켰다.
첫 구상으로부터 5년만인 1995년에 조앤 롤링은 드디어 첫 권의 원고를 완성했다. 스코틀랜드 예술위원회의 신인작가 창작 지원금을 받았고, 인근 학교에 교사로 취직함으로써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녀는 완성된 소설의 개요와 원고 일부를 정리해서 두 군데의 문학 에이전트에게 발송했다. 하지만 인쇄기를 살 형편은 못 되었기에 방대한 원고를 두 번이나 직접 타이핑해야 했다. 곧이어 그중 한 군데인 크리스토퍼 리틀 에이전시에서 관심을 표시해왔다. 해외출판계에서는 문학 전문 에이전트들이 유능한 신인작가를 발굴해서 출판사와 연결해주는 업무를 담당한다. 크리스토퍼 리틀은 조앤 롤링의 소설을 열두 군데 대형 출판사에 소개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천신만고 끝에 소규모인 블룸즈버리 출판사와 결국 계약을 맺었다. 이때의 선인세는 불과 1천5백 파운드(당시 한화로 약2백만 원)였지만 조앤 롤링의 처지에서는 큰돈이 아닐 수 없었다. 크리스토퍼 리틀은 조앤에게 이름을 바꾸라고도 조언했다. 판타지 아동소설 작가는 대개 남성이기 때문에, 작가가 여성으로 밝혀지면 독자가 아예 책을 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조앤 롤링’보다는 이니셜로 표기한 ‘J. 롤링’이 낫겠다는 제안에, 조앤은 친할머니의 이름은 ‘캐슬린(Kathleen)’을 집어넣어서 아예 ‘J. K. 롤링’을 정식 필명으로 삼기로 했다. 블룸즈버리 출판사에서는 1997년 6월 26일에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초판을 고작 5백 부밖에 간행하지 않았다. 출간 당시에는 서평기사도 전혀 없었다. “아동서로는 절대 돈을 벌지 못합니다.” 블룸즈버리의 관계자가 롤링과 계약을 맺으며 일찌감치 건넸던 위로의 말이 이때까지는 정확하게 들어맞는 듯한 분위기였다.

4. 마법의 시대
조앤 롤링과 해리 포터 시리즈의 진정한 돌파구는 그 직후에 찾아왔다. 블룸즈버리에서 영국판이 나올 즈음에 미국의 여러 출판사가 관심을 가지고 미국판 계약을 타진해왔던 것이다. 이 가운데에는 중견아동 출판사인 스콜라스틱이 있었다. 이 회사의 대표는 해리 포터의 가능성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그리하여 아동서로는 전무후무한 선인세 10만 달러(당시 약 1억 원)에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라는 제목으로 미국판 출간 계약을 맺었다. 자연히 해리 포터 시리즈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고, 조앤 롤링의 남다른 이력이 소개되면서 결국 책의 판매에 도움을 주었다. 1998년 9월 1일에 스콜라스틱 출판사에서는 초판으로는 상당한 양인 5만 부를 간행했다. 여러 아동문학상을 수상하고 본격적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처음에만 해도 보통 수준이었던 책의 판매량은 나날이 늘어났다.
2권 ‘비밀의 방(1998)’과 3권 ‘아즈카반의 죄수(1999)’가 연이어 나옴으로써 해리 포터 시리즈의 인기는 점점 기세를 얻었고, 4권 ‘불의 잔(2000)’부터는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발매된 것은 물론이고, 가히 신드롬이라고 할 만한 열광적인 반응이 벌어졌다. 이때쯤 되어 해리 포터 시리즈는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악했으며, 예약판매만으로도 몇 달간 판매량 1위를 기록할 정도가 되었다. 독자들은 책을 읽느라 밤잠을 설치는 것은 물론이고, 먼저 책을 사서 보려고 서점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학습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반입금지 조치를 내렸고 인터넷을 통해 시리즈의 다음 줄거리에 대한 갖가지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앤 롤링의 사생활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녀는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더욱 애를 썼다. 2001년에는 6세 연상의 마취전문의 닐 머레이와 재혼해서 데이비드(2003년생)와 맥켄지(2005년생)라는 이름의 남매를 낳았다.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영예도 뒤따랐다. 모교인 엑세터 대학은 물론이고 하버드 대학 등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던 것이다.
2001년부터는 영화가 개봉되면서 원작의 인기를 높이는 데에 한층 도움을 주었다. 5권 ‘불사조 기사단(2003)’, 6권 ‘혼혈 왕자(2005)’를 거쳐 7권 ‘죽음의 성물(2007’)이 나옴으로써 이 시리즈는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11년까지 본편 7권과 외전 3권으로 이루어진 해리 포터 시리즈는 무려 67개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 135개국에서 출간되었으며 총 4억 5천만 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7권을 두 편으로 나뉘어 모두 8편으로 이루어진 영화 시리즈의 누적 수입도 7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해리 포터는 출판과 영화는 물론이고 게임과 레고 등 문화계 전반에서 이전까지는 전혀 없었던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5. 봉사정신
소설과 영화의 연이은 성공 덕분에 2000년대 중반부터 조앤 롤링은 영국의 부자 명단에서 100위권에 들어갔고, 이후로도 문인으로는 보기 드문 억만장자로 손꼽히게 되었다. 롤링은 본인의 어려운 시절을 상기하여 자선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가령 편부모 및 빈곤아동지원 단체라든지, 다발성경화증(MS) 연구단체에 거액을 기부하고 공개적인 응원 메시지를 보낸 것이 그런 경우였다. 또 자선단체 코믹 릴리프의 기금 마련을 위해 해리 포터 시리즈의 외전에 해당하는 단편들을 썼다. ‘퀴디치의 역사(2001)’, ‘신비한 동물 사전(2001)’, 그리고 제7권에 언급되었던 ‘음유시인 비들 이야기(2008)가 그런 작품들이었다. 2008년에는 제임스 포터와 시리우스 블랙의 모험을 다룬 프롤로그를 쓰기도 했다.

6. 그녀가 주는 교훈
"사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가난이 아니라 실패였다. 재능과 지성이 있다고 해서 운명의 변덕을 피해가는 사람은 없다. 결국 어떤 것을 실패로 볼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역경의 순간에도 꿈을 잃지 않았던 상상력이 당신의 미래를 바꾼다." 지금은 <포브스>지가 선정한 전 세계 저명인사 100명 중 25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는 상상력을 타인과 공감하는 힘이라 말하며 그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성공 뒤에는 혁신과 창조의 원천인 상상력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유명해지기 전 7년 동안 직면해야했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실패의 힘을 역설하기도 했다. “고난에 직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스스로 완전히 알지 못하며,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한 그녀는 이 깨달음이야말로 고통 후에 얻은 진정한 선물이자 그간 획득한 어떤 지위보다도 값진 것이라 말한다.
아이가 잠자는 동안에만 글을 쓸 수 있는데, 언제 글을 완성하지? 출판 과정도 전혀 모르고, 출판사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지? 이런 핑계를 댔다면, 해리 포터 이야기는 롤링의 공책에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열정이 있었기에 짧은 시간이라도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알아보는 출판사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모두가 핑계를 대고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그 사람들의 꿈과 열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한다.
하버드대 명예박사학위 기념연설에서 그녀는 "상상하는 순간에는 저절로 기분이 좋아져서 내 신세를 비관하지 않아도 됐다"며 시련을 극복할 수 있던 비결을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선언했다. "세상을 바꾸는데 마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에 이미 그 힘은 존재합니다. 우리에겐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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