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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공격수 질문
2006년까지햇던 선수중 최고의 공격수좀알려주세요.
20위까지해서 펠레,뮐러,마라도나제외
전성기 최고조일때의 기준으로요
예) 카카 호나우지뉴가 전성기가짧앗다
이런이유로 빼지말구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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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비공개
작성일2016.09.29 조회수 1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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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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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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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프로축구 21위, 축구 선수, 감독 18위, 월드컵, 국가대항전 3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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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크루이프



현대 축구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선수이자 감독이죠. 그는 아약스에서 데뷔를 하여 스승인 리누스 미헬스와 함께 전원 공격, 전원 수비를 강조하는 토털사커를 완성시킵니다. 크루이프는 아약스, 네덜란드 대표팀에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토털 사커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는 피지컬이 훌륭하고 운동능력, 기술, 골결정력 등 좋은 개인 기술을 갖췄습니다. 하지만 그의 최고의 장점은 엄청난 축구 지능인데 볼이 있을 때 없을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동료들에 움직임을 진두지휘하면서 경기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선수이죠. 그는 아약스에서 8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유로피언 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3번의 발롱도르를 수상합니다. 그는 독재를 싫어하여 당시 스페인 독재정부가 후원하는 레알마드리드의 러브콜을 거절하고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죠. 그리고 아르헨티나 독재 정부가 있다는 이유로 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보이콧합니다. FC 바르셀로나에서도 좋은 활약을 이어나가 리그 우승을 가져다 줍니다. 그는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74 서독 월드컵에 참가를 하였고 토탈 사커를 기반으로 한 네덜란드 대표팀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당대 강호들을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물리치면서 결승전에 진출합니다. 결승전에서 크루이프는 PK를 얻어내어서 선취득점에 성공하지만 1:2로 역전패를 당하면서 준우승에 그치죠. 하지만 크루이프는 골든볼을 수상하면서 그의 활약을 인정받게 됩니다.


2. 알프레드 디 스테파노


그는 남미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바르셀로나, 레알마드리드의 러브콜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 두 팀과 이중계약을 맺었고 스페인 축구협회는 4년동안 1년씩 번갈아가면서 양 팀에서 뛰라고 판결합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자 바르셀로나는 그를 레알마드리드에 완전히 넘겨주게 되고 그때부터 그의 전성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는 당시 돋보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헝가리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 푸스카스와 함께 투 톱으로 활약하면서 프리미어리그 8회 우승과 당시 처음으로 창설된 유로피언컵 5연패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발롱도르 2회를 수상받았죠. 그는 공격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골키퍼를 제외하고 모든 포지션이 소화 가능하다고 여길만큼 다재다능한 선수였습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현재 레알마드리드 명예 회장을 맡고 있죠. 하지만 그는 국가대표에서는 별로 인상적이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그는 당시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스페팀 대표팀에서 뛰었는데 월드컵 출전을 하지 못합니다. 이 것이 펠레, 마라도나처럼 월드컵에서 활약한 선수들보다 인지도가 낮은 이유이죠.


3. 호나우두



펠레 이후 축구 황제로 불리면서 축구계를 휩쓸던 선수였죠. 특히 그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활약하면서 월드컵에서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두 번의 월드컵 우승을 경험하였고 브라질의 3연속 월드컵 결승 진출을 이끌었죠. 이런 활약을 인정받아 98 월드컵에서 골든볼, 02 월드컵에서 골든슈를 수상받았고 클로제가 경신하기 전 15골로 월드컵 최다골 기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발롱도르도 2번 수상을 하였죠. 그의 장점은 탄탄한 피지컬을 가지고도 굉장히 민첩하고 발재간이 좋아 왠만한 수비수들을 다 가지고 놀 정도로 뛰어난 드리블 실력을 갖췄습니다. 그리고 골 결정력도 뛰어나 득점왕도 여러 번 차지하였죠. 특히 바르셀로나 시절에는 혼자의 힘으로 승리를 가져다 주면서 그 유명한 '호나우두가 곧 전술이다.'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죠. 그는 자신의 몸이 견딜 수 없는 재능 때문에 부상이 잦아 선수 말년에는 힘든 선수 생활을 하였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분명 역대급 활약을 보여준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옥의 티라면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없다는 것이죠.


4. 에우제비오


루이스 피구,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포르투갈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입니다. 검은 표범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굉장히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고 골결정력까지 갖춘 선수입니다. 1대 1에 강해 수비수를 제치고 슛팅을 때리는 능력이 일품이었죠. 그는 모잠비크 출신이지만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에우제비오는 포르투갈로 넘어가 포르투갈 대표팀으로 뜁니다. 그는 1966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포르투갈 에이스로 활약을 하였고 9골로 득점왕에 오르면서 포르투갈을 3위로 이끌죠. 특히 북한과의 8강에서 전반 25분까지 0:3으로 끌러가다가 에우제비오가 4골을 터트리면서 3:5로 역전승을 합니다. 그는 벤피카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는데 15시즌 동안 11번의 리그 우승과 7번의 득점왕, 유로피언컵 2연패를 합니다. 특히 유로피언컵에서 당시 5연패를 달리고 있던 레알마드리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죠. 1965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받기도 합니다.


5. 마르코 반 바스텐


크루이프와 함께 네덜란드 축구 역사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선수이죠. 그는 볼 컨트롤이 좋아 그에게 향한 볼이 어떤 궤도, 속도, 방향에 따지지 않고 완벽하게 받아 슛팅을 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장 우아한 스트라이커라고 하죠. 어떤 자세든 슛팅으로 연결하는 능력이 좋고 헤딩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스트라이커 후배들은 그를 롤모델로 삼는 선수들이 많았죠. 그는 아약스에서 데뷔를 하여 133경기 128골을 기록하면서 1경기 1골에 육박한 득점력을 선보였고 4연속 득점왕을 차지합니다. 5시즌동안 3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죠. AC밀란은 그의 활약을 인정하여 영입을 하였고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레이카르트라는 오렌지 3총사를 완성하죠. 아리고 사키 감독의 지휘 아래 그는 147경기 90골을 성공하면서 AC밀란 골든 제너레이션의 공격의 중심으로 활약하죠. 당시 세리에A는 마라도나의 나폴리, 바조의 유벤투스, 게르만 3총사의 인터밀란 등 강력한 라이벌이 많았죠. 그는 3번의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였고 유로피언컵 2연패를 합니다. 특히 유로피언컵에서 10골을 터트리면서 우승에 일등공신으로 활약합니다. 그는 이런 활약을 인정받아 3번의 발롱도르를 수상하죠. 네덜란드 대표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선보이는데 유로 1988에서 5경기 5골을 기록하면서 우승으로 이끕니다. 특히 결승전에서 멋진 발리슛은 역대 최고의 골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죠. 이 유로 1988은 여전히 네덜란드의 유일한 메이저대회 우승으로 기록되고 있죠. 그는 부상으로 31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했지만 역대 최고의 공격수 반열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6. 티에리 앙리



아스날의 왕이자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중의 한 명인 앙리는 축구선수가 들어올릴 수 있는 모든 우승컵을 들어올린 선수이죠. 아스날에서 3연속 득점왕을 포함하여 4번의 득점왕에 올랐고 03-04시즌에는 무패우승으로 이끕니다. 05-06시즌 앙리의 활약으로 아스날은 챔피언스리그에 출전을 하지만 준우승에 그치고 앙리는 바르셀로나로 이적을 하여 드디어 자신이 꿈꾸던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죠. 이 시즌은 바르셀로나가 트레블을 하였고 앙리는 쓰리 톱 중 한 명으로 맹활약을 합니다.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활약을 하여 98 월드컵 우승, 유로 2000 우승을 하였고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 컵도 우승하여 모든 트로피를 전부 들어올리죠. 그는 윙어 출신답게 굉장히 빠른 주력을 가지고 있고 뒷공간 침투가 능하고 골결정력도 뛰어나 그를 막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특히 감아차기는 그의 스페셜 영상에 자주 나올 정도로 그의 주무기 중 하나였죠. 그리고 그는 어시스트도 잘해서 20 도움을 기록한 적도 있는데 이는 EPL 최다 어시스트 기록입니다.


7. 보비 찰튼


잉글랜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공격수입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데뷔를 하여 맹활약으로 돌풍을 이어나갑니다. 그러던 중 맨유 역사상 최악의 사건인 뮌헨 비행기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그와 버스비 감독을 포함하여 9명의 생존 선수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을 하고 맙니다. 맨유는 이 후유증 때문에 암흑기를 겪게 되는데 그럼에도 찰튼은 꾸준히 득점에 올리면서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그 후 맨유에는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가 이적을 하여 보비 찰튼과 함께 트리오를 결성하여 맨유의 황금기가 시작이 됩니다. 맨유는 사상 첫 유로피언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리그 2회 우승을 하죠. 트리오는 4시즌동안 239골을 기록하고 249골로 맨유 역사상 최다 득점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활약하면서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3골을 기록하였습니다. 특히 에우제비오가 버티던 포르투갈과의 4강전에서 2골을 기록하면서 결승으로 이끈 일등공신이 되죠. 결승전에서 서독을 꺾으면서 오늘 날까지 유일한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을 가져다 줍니다.  바비 찰튼은 골든볼을 수상받았고 그 해 발롱도르까지 수상을 합니다.


8. 호마리우


펠레 이후 호나우두 이전 브라질 대표팀의 공격을 책임지는 에이스로 활약한 선수입니다. 골 에어리어 안에서 엄청난 강점을 보여주는 선수인 호마리우는 168cm의 단신이지만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볼 컨트롤로 슛팅 찬스를 만들어내고 뛰어난 골 결정력을 앞세워 많은 득점에 성공한 선수입니다. 위치선정도 뛰어나서 단신이지만 헤딩골도 곧잘 넣었고 상대 골키퍼의 타이밍을 빼앗는 슛팅이 일품인 선수였죠.  바스쿠 다 가마에서 데뷔를 하여 선수생활을 시작한 호마리우는 서울 올림픽에서 브라질 대표팀으로 뛰면서 소련에게 패하면서 은메달을 따지만 득점왕에 오르면서 많은 유럽 클럽들의 러브콜을 받게 됩니다. 호마리우는 당시 히딩크 감독의 설득에 PSV 에인트호벤으로 이적하면서 첫 유럽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109경기 98골을 터트리면서 네덜란드 리그를 점령한 호마리우는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합니다. 크루이프의 지휘 아래 스토이치코프, 과르디올라, 쿠만, 라우드롭 등과 함께 드림팀의 맴버로 활약하면서 30골을 터트려 득점왕에 오르고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죠. 하지만 크루이프와의 불화로 2시즌만에 팀을 떠났고 그 후 저니맨 생활을 합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772골을 기록하면서 역대 2위의 골기록을 가지고 있죠.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하는데 89, 97 코파 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의 우승의 일등공신이 됩니다. 94 미국 월드컵에서 베베토와 함께 투톱으로 활약하면서 결승전을 제외하고 모든 경기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면서 5골로 득점 2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골든볼을 수상합니다.


9. 로베르토 바조



그는 최전방에서 득점만 하는 유형의 선수가 아닌 득점과 어시스트를 동시에 노리는 9.5번 자리에서 맹활약을 한 선수입니다. 그는 피오렌티나에서 에이스로 활약하였고 그의 실력을 인정받아 1990년에 당시 사상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면서 유벤투스로 이적을 합니다. 그는 유벤투스에서 거의 30 득점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선보이면서 유벤투스의 간판 에이스로 활약합니다. 특히 UEFA 컵 결승전 1, 2차전에서 5골을 기록하면서 우승으로 이끌었고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받게 됩니다. 그는 94 월드컵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로 출전을 하였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조별리그에서 1승 1무 1패로 가까스로 토너먼트에 진출합니다. 토너먼트에서 바조는 완벽한 원맨쇼를 선보였고 16강, 8강, 4강에서 종합 5골을 터트리면서 결승행으로 이끕니다.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0:0으로 승부가 나지 않고 승부차기까지 가죠. 그는 자신이 실축하면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 실축을 하였고 결국 준우승에 그치고 맙니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바조의 토너먼트 활약을 잊어버리고 그를 패배의 원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초상화를 불태우기까지 하죠. 우승에는 크게 인연이 있는 선수는 아니지만 펠레, 마라도나 같은 레전드들은 바조에게 엄청난 찬사를 보내면서 그를 인정합니다.


10. 케니 달글리쉬


제라드와 함께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를 받고 있는 선수입니다. 셀틱에서 선수 생활을 사작한 달글리쉬는 269경기 167골을 기록하면서 스코틀랜드 리그 4회 우승으로 이끌면서 밥 페이즐리 감독에 러브콜을 받고 리버풀로 이적을 합니다. 리버풀은 케빈 키건이라는 최고의 에이스를 함부르크로 떠난 보낸 상태라 그의 대체자가 필요하였고 케니 달글리쉬는 그에 가장 적합한 선수였습니다. 이안 러쉬와 투 톱으로 경기에 나섰고 이 투 톱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투톱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달글리쉬는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싱력을 통해 리버풀 공격을 이끌었고 335경기 118골을 터트렸죠. 그 당시 리버풀은 잉글랜드는 물론 유럽을 재패하였는데 1부리그에서 8회 우승을 차지하였고 유로피언컵 3회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케니 달글리쉬는 '킹 케니'라고 불리면서 많은 리버풀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였고 대영제국 훈장을 받기도 합니다.


11. 피렌츠 푸스카스


디 스테파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레알마드리드의 독주에 앞장선 선수입니다. 그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혼베드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였고 맹활약을 하여 헝가리 대표팀에서 선발이 됩니다. 당시 헝가리 대표팀은 매직 마자르라고 불리면서 무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던 팀이였죠. 푸스카스는 그런 헝가리 대표팀에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4년동안 A매치 무패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를 하였고 만나는 상대마다 대파를 하면서 결승전에 진출을 합니다. 결승 상대는 서독으로 헝가리의 승리를 많은 사람들이 예측을 했지만 서독이 승리를 하면서 4년만에 첫 패배와 동시에 월드컵 준우승을 하죠. 그 후 헝가리 혁명으로 스페인으로 망명을 하였고 31세의 나이에 레알마드리드에 입단을 합니다. 레알마드리드에서 디 스테파노와 함께 뛰면서 유로피언컵 3연속 우승과 라리가를 점령을 하였죠. 그는 멋진 골을 많이 터트렸고 그런 그를 기리면서 한 해동안 가장 멋진 골을 터트리는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의 이름을 푸스카스 상으로 명명했습니다.


12. 안드리 세브첸코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세브첸코는 디나모 키에프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합니다. 리그 5연패로 이끌면서 우크라이나 리그를 휩쓴 세브첸코는 98/99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홈에서 3:0, 원정에서 4:0 승리를 이끌었고 특히 캄프 누에서 전반전에만 헤트트릭을 성공하면서 큰 충격을 줍니다. 그 후 아스날, 레알마드리드와의 16강, 8강 경기에서 득점에 성공하면서 팀을 준결승으로 이끌었고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지만 종합 3:4로 패배를 하면서 결승에는 실패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득점왕과 UEFA 최고의 공격수를 차지하죠. AC 밀란은 세브첸코의 활약을 눈여겨 보았고 영입을 합니다. 세브첸코는 데뷔와 동시에 그 시즌 득점왕에 오르면서 자신의 진가를 널리 알리죠. 그 후 02/03시즌을 제외하고 꾸준히 20 득점을 넣어주면서 AC밀란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활약을 하였고  03/04시즌 리그 우승과 02/03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는 2004년 발롱도르를 수상하죠. 그 후 첼시로 이적을 하지만 실패를 맛보았고 다시 디나모로 복귀하여 선수생활을 마무리합니다. 우크라이나 대표팀은 약팀이기 때문에 월드컵에 인연이 없었지만 06 독일 월드컵에서 예선전에서 세브첸코는 6골을 터트리면서 소련에서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 첫 월드컵 진출을 하는데 성공을 합니다. 스페인에게 대패를 당하면서 불안한 출발을 하지만 사우디와 튀니지를 상대로 골을 넣으면서 16강으로 이끌었고 스위스를 꺾고 8강에 진출합니다. 대회 우승팀인 이탈리아에게 져서 8강에서 탈락을 하지만 첫 출전임에도 좋은 활약을 선보였죠. 그는 무결점 스트라이커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굉장히 다재다능한 선수로 득점력 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능력도 좋고 수비가담도 좋은 선수였습니다.


13.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불가리아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스토이치코프는 자국팀 PFC CSKA 소피아에서 데뷔를 합니다. 1990년에 30경기 38골을 터트리면서 유러피언 골든 슈를 수상한 스토이치코프는 바르셀로나의 러브콜을 받아 이적을 합니다. 스토이치코프는 크루이프의 지휘 아래 라우드롭, 과르디올라, 호마리우, 쿠만 등과 함께 드림팀으로 활약하면서 라리가 4회 연속 우승과 1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맹활약을 합니다. 스트라이커 뿐만 아니라 윙포워드로도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득점력과 어시스트 능력을 고루 갖춰 찬스를 만들거나 마무리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불가리아 대표팀으로 활약하면서 94 미국 월드컵에서 당시 월드컵 본선 승리가 없는 팀을 4강으로 이끌었습니다. 조별리그에서 나이지리아에게 패배를 하면서 불안한 출발을 하지만 그리스와 당시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를 꺾고 16강에 진출을 하였고 멕시코, 독일을 꺾고 4강에 진출합니다. 이탈리아에 지면서 결승전에 나가지는 못하였지만 6골을 기록하면서 공동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스토이치코프는 그 해 발롱도르를 수상하죠. 다만 그는 다혈질로 유명하였고 패싸움에 연루되기도 하고, 경기 도중 상대 선수 혹은 심판에게 거친 행동을 하여 징계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동료들, 감독과 불화도 자주 일으켰죠.


14. 케빈 키건



케빈 키건은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에서 데뷔를 한 후 좋은 활약을 하자 당시 리버풀 감독인 밥 샹클리의 러브콜을 받습니다. 케빈 키건은 이적을 하자마자 좋은 활약을 하면서 잉글랜드 1부리그를 휩쓸면서 3번의 리그 우승으로 이끕니다. 76/77 시즌에는 리버풀 역사상 첫 번째의 유로피언컵 우승 트로피를 선사하죠. 결승전에서 2골을 터트리면서 우승의 일등공신이 됩니다.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로 이적을 합니다. 당시 강팀이 아니였던 함부르크를 이끌고 역사상 첫 분데스리가 우승으로 이끌면서 케빈 키건은 2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하는데 잉글랜드 출신 선수로는 유일하게 2번의 발롱도르 수상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수 막바지에는 사우스햄튼으로 돌아와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자신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였죠.


15. 라울 곤잘레스


레알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공격수입니다. 레알마드리드에서 데뷔를 하여 첫 시즌에 9골을 기록하면서 성공적인 출발을 한 라울은 98/99시즌과 00/01시즌 득점왕에 오르면서 라리가 최고의 공격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이에로에 이어서 주장완장을 이어받은 그는 꾸준난 활약을 이어가면서 레알마드리드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됩니다. 페레즈 회장이 부임 한 후 갈락티코 정책으로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영입하였지만 그의 자리는 절대적이였죠. 특히 그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였는데 지금은 경신되었지만 최다 출전 기록과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741경기 출전을 하여 323골을 기록하였고 6번의 라리가 우승과 3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죠. 그는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는데 102경기를 뛰면서 44골을 기록하여 비야 이전에 스페인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메이저 대회 우승과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가 스페인 대표팀을 떠난 유로 2008부터 스페인의 황금기가 시작되면서 아쉬움을 보여주고 있죠.


16.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유벤투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인 델 피에로는 마지막 판타지스타라고 불리면서 뛰어난 드리블, 높은 득점력, 다양한 공격 역할, 뛰어난 경기 운영 등 많은 장점을 고루 갖춘 선수였습니다. 프리킥을 굉장히 잘 차서 많은 나이로 노쇠화가 되었어도 중요한 시점에 골을 터트리는 선수였죠. 칼치오 파도바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델 피에로는 리피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유벤투스로 이적을 합니다. 그는 바조를 밀어내고 주전 공격수로 뛰면서 90년대 이탈리아와 유럽을 휩쓸었는데 특히 95년부터 98년까지 3연속 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이끌었고 한 번의 우승과 두번의 준우승을 경험합니다. 세리에A 7공주 시절에도 뛰어난 활약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총 6번의 세리에A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는 승부조작 사건인 칼치오폴리 때문에 유벤투스가 세리에 B로 강등이 되자 팀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았고 그 다음 시즌 바로 승격을 합니다. 승격하자마자 그는 34세의 나이로 21골을 터트리면서 득점왕을 차지하죠. 그는 2011-12시즌에 9년만에 세리에A 우승을 차지하고 팀을 떠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됩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하였는데 유로 2000에서 준우승을 하였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조커로 뛰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끕니다.


17. 우고 산체스


멕시코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인 우고 산체스는 레알마드리드에서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인 선수입니다. 부트라게뇨 등과 함께 독수리 5형제의 일원으로 활약하였고 5번의 라리가 득점왕에 오르기도 한 선수입니다. 그 중 4번은 연속으로 득점왕에 오르기도 하였죠. 중간에 득점 2위를 하면서 아쉽게 5연속 득점왕은 실패를 하였지만 그 다음 시즌에 다시 득점왕에 오르면서 득점기계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득점왕에 오를 때 38골을 기록하면서 한 시즌 라리가 최다골 기록을 가졌고 이는 메시, 호날두, 수아레스에 의해 경신이 되죠. 그는 골냄새를 잘 맡는 선수로 키는 작지만 스피드가 좋아 찬스가 왔을 때 파고드는 움직임이 좋았고 골로 연결하는 결정력이 훌륭해 많은 득점이 가능했던 선수입니다. 그는 레알마드리드의 라리가 5연패를 이끌었죠.


18. 에릭 칸토나



베컴-호날두로 이어지는 맨유의 상징적인 번호 7번의 시초라고 평가받는 선수입니다. 올드 트래포드의 왕으로 불리며 잉글랜드 사람들이 사랑하는 프랑스인이라고 불리기도 한 선수입니다. 오세르, 마르세유를 거쳐 리즈 유나이티드로 EPL 데뷔를 한 칸토나는 리즈 유나이티드를 잉글랜드 1부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감독과 마찰을 일으키자 그를 맨유에 헐값으로 팔게 됩니다. 그는 맨유로 이적하자마자 맹활약을 하면서 맨유의 EPL 우승으로 이끌죠. 하지만 그는 1995년 1월에 퇴장을 당하면서 라커룸을 가던 중 자신을 야유하던 관중에게 그 유명한 쿵푸킥을 날리면서 9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받습니다. 그 후 은퇴까지 결심을 하지만 퍼거슨 감독의 정성스런 설득에 징계를 마치고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왔고 그 후 맨유의 황금기를 이끌게 됩니다. 그는 맨유에서 4번의 EPL 우승을 차지하였고 클럽 역사상 첫 비영국 출신 주장이 됩니다. 그는 다부진 몸집에 비해 굉장히 기술적인 선수였고 득점 뿐만 아니라 패스도 잘해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한 선수입니다. 31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은퇴하겠다고 하면서 은퇴를 합니다.


19.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아르헨티나 역사에 길이 남을 스트라이커이자 세리에 A 역사에서도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는 선수입니다. 그의 별명은 '바티골'로 바티스투타를 전부 말하기 전에 골을 넣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그는 1991년 아르헨티나의 코파아메리카 우승을 이끌면서 세리에A 피오렌티나로 이적을 합니다. 당시 세리에A는 강호들이 많았고 세리에A 7공주라고 해서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 무대까지 휩쓸던 시기였습니다. 피오렌티나도 7공주 중 한 명이였고 바티스투타는 피오렌티나의 에이스였죠. 그는 26골을 기록하면서 득점왕에 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피오렌티나는 우승과 인연이 없었고 중간에 세리에B로 강등이 되기도 하죠. 하지만 바티스투타는 팀을 떠나지 않았고 결국 팀을 당시 세리에A로 승격시킵니다. 30세가 넘자 그는 우승을 위해 AS로마로 이적을 합니다. 당시 토티와 좋은 호흡을 맞추면서 자신의 첫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죠. 그는 피오렌티나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골로 1:0으로 승리를 하였지만 그는 좋아하지 않고 그라운드에 가만히 서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언론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월드컵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는데 94 월드컵에서 16강 탈락, 98 월드컵에서 8강 탈락, 02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을 하면서 그의 실력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20. 앨런 시어러



국회위원 세레모니로 유명한 앙리 이전 프리미어리그를 휩쓸던 잉글랜드 출신의 공격수입니다. 그는 빠른 주력과 뛰어난 위치선정으로 득점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강력한 슛팅이 장점인 선수입니다. 사우스햄튼에서 데뷔를 하여 아스날과의 첫 선발 출전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면서 잉글랜드 1부리그 역사상 최연소 헤트트릭 기록을 가지게 됩니다. 그 후 5시즌동안 좋은 활약을 한 시어러는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이적료를 경신하면서 블랙번으로 이적을 합니다. 블랙번에서 맹활약을 하면서 2번의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94/95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 후 블랙번이 하약세를 타자 많은 명문클럽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냅니다. 시어러의 고향팀 뉴캐슬은 당시 역사상 최고 이적료를 갱신하면서 그를 하이재킹을 하는데 성공을 하죠. 뉴캐슬로 이적을 해서도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3연속 득점왕에 성공한 시어러지만 리그 준우승을 계속하면서 더 이상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합니다. 그는 260 골로 EPL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고 이 기록은 아직도 경신이 되지 못하고 있죠.


그냥 제 개인 기준으로 선정한 것이니 순위는 크게 신경쓰지 마시고 그냥 이런 선수가 있었구나 정도로만 참고해주세요.


알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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