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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로 칭송되는 개성의 명소다. 폭포가 얼어붙어있는 겨울에 방문하여 찍은 자료사진이라 아쉽습니다.
▲ 박연폭포 황진이, 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로 칭송되는 개성의 명소다. 폭포가 얼어붙어있는 겨울에 방문하여 찍은 자료사진이라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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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안에서 안평과 작별한 수양은 '물 좋은 곳에서 푹 쉬어 가라'는 평양감사의 청을 뿌리치고 남행길을 재촉했다. 해주 역시 그랬다. '물 좋은 골에서 푹 쉬어 가라'며 황해 감사가 수양의 소매 자락을 잡았다. 해주는 온양과 함께 왕실 온천이 있는 곳이다. 관운(官運)이 따로 있나. 힘 있는 왕실 어른을 잘 모시면 '맑음' 바로 그것일 수 있다.

개성유수가 벽란도까지 영접을 나왔다. 평양과 해주를 통과했다면 잡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평양이 '물(物) 좋은 색향(色鄕)'이고 해주가 물(水) 좋은 온정(溫井))골'이라면 개성에는 박연폭포가 있다.

평양 기생이 색기(色技)라면 개성 기생은 예기(藝妓)다. '논다'하는 팔도의 한량들이 송도기생 끼고 시 한수 뽑아보고 싶은 곳이 박연폭포다. 황진이와 서경덕이 아직 태어나지 않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러주는 사람은 없지만 그럼 어떤가. 박연폭포와 예(藝)를 아는 기생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원행에 노독이 심하실 텐데 쉬어 가시지요."
"전하께서 자문을 학수고대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순간, 자문(咨文) 이상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북경에 있는 황제가 조선 국왕의 등극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문서다. 이걸 받기 위해 3천리가 넘는 머나 먼 길 북경을 머다 하지 않고 찾아갔다. 이제 문서를 받았으니 한성으로 가는 길이다. 사은사는 '승인을 요청합니다.'라는 고명(誥命)을 모시고 같고 '허락한다.'는 자문(咨文)을 모시고 오는 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맑은 날 인왕산에 오르면 개성 송악산이 보입니다
▲ 인왕산 맑은 날 인왕산에 오르면 개성 송악산이 보입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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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에 오르면 인왕산이 손에 잡힐 듯이 보입니다. 이제 다 오시지 않았습니까?"
"성의는 고마우나 갈 길이 멉니다."

수양은 개성 유수의 청을 물리치고 발길을 재촉했다. 시(詩)를 논할 수 있는 기생을 대기시켜 놓고 태평관을 말끔하게 단장해놓은 개성유수는 닭 쫓던 고양이가 되었다. 제릉에 잠시 들러 참배한 수양은 선걸음에 임진강을 건넜다. 혜음령에 오르니 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고 싶었던 산이다. 그 아래 도성이 있고 대궐이 있고 어좌가 있는 곳이다. 빨리 가고 싶다.

벽제관 표지석
▲ 벽제관 벽제관 표지석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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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에서 목을 축인 사신단은 잰 걸음을 놓았다. 도봉산에서 발원하여 교하로 흘러가는 내(川)를 건너고 삼각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개울을 건너니 옹기종기 아담한 마을이 나타났다. 역참이다. 대장간이 있고 마굿간이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평양과 의주로 떠나는 파발이 발진하는 역이다. 잠시 다리쉼을 한 일행은 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잘 닦여진 고개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루턱에 오르니 바람이 시원하다.

"신집의! 이 고개 이름이 무엇인가?"
"박석고개라 하옵니다."
"고개를 오르면서도 의아롭게 생각했는데 박석을 이렇게 함부로 깔아도 되는 건가?"

박석이 깔려있는 종묘
▲ 종묘 박석이 깔려있는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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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하다. 박석(薄石). 이거 아무데나 까는 돌이 아니다. 경복궁 근정전 앞 전정(殿庭)에 깔려있고 종묘 정전과 왕릉 참도에만 깔려있는 성(聖)스러운 돌이다.

"예전 이 고갯길은 발이 쑥쑥 빠지는 진탕 길이었습니다. 이 고개를 내왕하는 칙사가 불평을 토로하고 제릉 참배하러 다니시던 태종대왕께서 미편하시다 말씀하시어 박석을 깔았습니다."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조선을 방문하는 칙사는 올 때는 가볍게 왔지만 돌아갈 때는 짐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갔다. 왕과 왕비가 준 선물과 조정 대신들이 갖다 바친 진귀한 물건들이 그득했다. 물건을 가득 실은 수레가 이 고개에만 이르면 바퀴가 빠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화가 난 칙사 황엄이 되돌아와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왕릉 참도에 깔려있는 박석. 헌릉
▲ 박석 왕릉 참도에 깔려있는 박석. 헌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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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릉은 태조 이성계의 정비이며 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왕릉이다. 개성 외곽 부소산 기슭에 있다. 태종은 한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정도로 어머니를 끔찍하게 사모(思慕)했다. 왕후의 자리에도 올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이러한 마음이 미움이 되어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 강씨의 묘를 파헤쳐 동소문 밖으로 내쳤는지 모른다. 신의왕후가 잠들어 있는 제릉을 참배하기 위해 개성을 자주 드나들던 태종은 '진흙탕 고갯길에 박석을 깔아라'고 명했던 것이다.

박석은 검게 그을린 듯 한 잿빛 화강암 판에서 풍기는 주술적인 분위기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고 경건하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돌이다. 또한 우둘투둘한 감각은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데도 탁월했다. 조선 팔도에 돌이 많다지만 아무 채석장에서 나오는 돌이 아니다. 오직 한 군데 강화 그을섬 매음리에서만 나오는 귀한 돌이다. 고개를 내려오니 상당히 큰 마을이 나타났다. 동구 밖 정자나무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의주에서 이곳까지 천리. 이곳에서 부산 동래까지 천리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 양천리 의주에서 이곳까지 천리. 이곳에서 부산 동래까지 천리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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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꽤 넓은데 이곳을 무어라 하나?"
"예전에는 양천평이라 했습니다."

"내 귀에는 양철평으로 들리는데 양천평인가? 양철평인가?"
"이곳에서 북쪽으로 의주까지 천리. 남쪽으로 동래까지 천리. 딱 반도의 중간지점입니다. 때문에 이 동네를 양천리(兩千里)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양천리라고 부르면 듣는 사람은 양철리로 들렸습니다. 하여, 양천리(兩千里)가 양철리(梁鐵里)가 되었습니다. 하여 지금은 이 앞 들판을 양철평(梁鐵坪)이라 부릅니다."

"역시 신집의는 부왕을 도와 한글 창제에 공을 세운 학자답군."
"황송하옵니다."

지금도 산골을 팔고 있다는 안내 표지석
▲ 녹번고개 지금도 산골을 팔고 있다는 안내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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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반고개에 올라섰다. 고개 마루 바위틈에서 골절에 좋다는 황산제일철 녹반(綠礬)이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유곽이 눈에 들어왔다. 홍제원이 가까웠다는 신호다. 홍제원은 보제원, 이태원, 전관원과 함께 도성 밖 4대원 중 규모가 가장 큰 원(院)으로 나라의 공용 객사다.

북경을 출발한 명나라 사신이 한성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유숙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곳이 홍제원이다. 모화관에서 마지막 환송 잔치를 받고 의주로 가는 사신의 첫 기착점 또한 홍제원이다. 따라서 공식행사가 없는 자유로운 곳이다. 때문에 사신은 물론 하인 종배들이 객고를 푸는 유곽이 번성한 곳이 홍제원 주변이다.

홍제원 옛터를 알리는 표지석
▲ 홍제원 홍제원 옛터를 알리는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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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원 인근에 자리 잡은 주막과 유곽은 명나라 사신단만이 기웃거리는 유흥처가 아니었다. 도성에서 '꽤 논다'는 한량들과 '잘 나간다'는 잡배들이 즐겨 찾는 유흥가였다.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곳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이 발동한다. 도성에선 맛볼 수 없는 특별한 술이 있을 것 같고, 한양에선 안아볼 수 없는 특별한 여자가 있을 것 같다. 때문에 도성의 '내로라' 하는 한량과 잡배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왜인과 명나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동래와 의주도 마찬가지다. 이런 곳에는 창궐하는 병이 있다. 임질과 매독이다. 단명한 왕들의 사인(死因)이 대부분 종기(瘡)라 기록되어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가 보면 매독일 가능성이 크다. 성병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웅장한 궁궐 담장도 넘을 수 있는 괴력을 가지고 있다. 항생제가 발달한 시대에는 임질과 매독 이거 별거 아니지만 당시에는 생명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태그:#박연폭포, #양천리, #홍제원, #종묘, #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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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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