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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 업적 및 삶
이종범선수에관해 알려주세요..삶 및 업적,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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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ahn3****
작성일2016.03.25 조회수 16,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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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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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94위, 프로야구, 야구 선수, 감독 58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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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 (李鍾範, 1970년 8월 15일 ~ )은 전 KBO 리그 KIA 타이거즈의 내야수 겸 외야수이다. 별명은 종범신, 바람의 아들 등이 있다. 우투우타이지만, 일상 생활 때에는 왼손을 사용하는 왼손잡이다. 원래 왼손잡이지만 어릴때 오른손 글러브 밖에 없어 오른손으로 연습해서 야구를 오른손으로 하게 된다. 2012년 시즌을 준비하던 중 갓 취임한 선동열 감독과 이순철 수석코치 그리고 구단에게 은퇴권고를 받고 2012년 3월 31일 은퇴선언을 하였다. 2012년 5월 26일 KIA의 홈 구장인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에서 모든 선수들이 7번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하였다. 경기 종료 후 은퇴식을 치렀고, 그의 등번호 7번은 영구 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한화 이글스 주루코치를 담당하였고, 2014년 11월 6일 MBC 스포츠+와 계약을 맺고 2015 시즌 해설자로 변신했다.

아마추어 시절[편집]

광주일고 졸업 후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등 야구 명문 대학으로부터 거액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으나 장학금을 받고 광주일고 동료 3명을 끼워서 받아 주는 조건으로 건국대학교로 진학한다. 국가대표 유격수 자리를 꿰찼고, 한양대학교 특급 유격수 유지현은 국가대표팀에서 2루수로 자리를 바꿨으며, 이 둘은 역대 최고의 국가대표팀 키스톤 콤비로 불린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편집]

1993년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차 지명을 받아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해태 시절인 1994년 한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상, 1993년1997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입단 첫 해 뛰어난 실력으로 삼성 라이온즈양준혁과 신인왕을 다투었으나 양준혁에게 밀려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독보적인 활약으로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4년 시즌은 그의 선수 시절 가장 절정에 달한 시즌으로 단일 시즌 최다 안타(196안타), 단일 시즌 최다 도루(84도루)에 19홈런을 기록하는 활약을 하였다. 후일 TV 프로그램에서 4할을 못한 것은 배탈로 13타수 1안타에 그친 시즌 막판 세 게임과 4할보다는 200안타를 목표로 했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고 말하였다.[3] 1995년 시즌에 동계 훈련을 불참하고 방위병으로 입대하여 복무를 병행, 광주 홈 경기에서만 뛰게 된다.(126경기 중 63경기) 그럼에도 홈런 9위, 도루 6위에 오르며 호타준족의 대명사임을 증명한다. 이종범이 2루 주자일때 스퀴즈 번트로 홈으로 들어오는 작전조차 자주 걸릴 정도였다 (2루 스퀴즈작전)[4]. . 이후 1993년 첫 우승과는 달리, 당시 ‘무등산 폭격기’로 불리던 국보급 투수 선동열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하여 없었던 해태 타이거즈가 많은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2시즌을 연속으로 우승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이종범은 1번 타자 및 유격수로 뛰며, 1996년에는 타율 .332(2위) 25홈런(3위) 58도루(1위)로, 또한 다음해인 1997년에는 .324(5위), 30홈런(2위), 64도루(1위)의 성적을 기록했다.[5] 역대 유격수 포지션을 맡은 선수가 150개 이상의 안타를 때려 내고, 0.580 이상의 장타율과 1점대가 넘는 OPS를 기록한 경우는 1994년의 이종범과 1997년의 이종범 단 두 번뿐이다.[5] 유격수 수비에서 강견이지만 타구판단, 송구정확도 등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후일 일본 진출 이후와 한국 복귀후에도 유격수 자리를 맡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유격수가 20-20을 기록한 경우는 1996년의 이종범 이후 굉장히 드물었으며, 2012년 광주일고 후배인 강정호가 그 뒤를 잇게 된다. 현재까지 8번의 30-30이 작성되었지만 3할 타율에 4할 출루율과 30-30을 동시에 달성한 선수는 이종범과 테임즈 단 두 명뿐이다.

일본 프로 야구 시절[편집]

원래 유격수였지만 1998년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하여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고 유격수에서 외야수로 수비 위치를 바꾸었으며, 대한민국에 복귀한 이후에도 외야수로 출장했다. 56경기째인 6월 23일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투수 가와지리 데쓰로가 던진 120km대 커브에 팔꿈치를 맞아 골절상을 당한 뒤 9월 복귀하였다. 하지만 67경기밖에 뛰지 못하는 등, 성적 부진을 겪고 급기야 심각한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증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그는 주니치 퇴단을 결심하고 계약을 해지했다. 그는 미국행을 추진했지만 해태 타이거즈 정기주 사장이 일본을 방문하여 그를 직접 만나 국내로 복귀할 것을 설득하였고 2001년 7월 현대자동차그룹이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여 KIA 타이거즈로 재창단한 시기에 그는 4년만에 국내로 복귀하게 된다.[6][7]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뛰던 시절 투수 가도쿠라 겐과 동료이기도 했었다.

한국 프로 야구로 복귀하다[편집]

2001년기아자동차해태 타이거즈 선수단을 인수, 승계하여 KIA 타이거즈가 창단되었고 동시에 KBO 리그로 복귀하여 KIA 타이거즈에 돌아왔다. 2003년에는 20-20 클럽에 가입하였는데(그 해에 20홈런 50도루를 기록하였고, 그의 50도루는 2003년 시즌 도루 부문 최고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당시 최고령 20-20 클럽 가입이기도 하다. 이 기록은 양준혁2007년에 경신하였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뽑혔고 주장을 맡았으며, 대회 종료 후 베스트 9에 뽑히는 등 발군의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2006년 정규 시즌 중에는 부진의 늪에 빠졌으며, 2군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그해 시즌 타율은 .242에 홈런 1개, 21타점, 10도루 등 입단 이래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러한 부진은 2007년에도 계속되어, 타율이 2할을 넘지 못하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2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2008년 60% 삭감된 2억 원의 연봉에 재계약하여 재기를 다짐했다. 그해 5월 한 달 동안 3할 8푼 9리, 72타수 28안타 15타점의 맹활약으로 월간 MVP로 선정되었고, 1루수로 경기에 출장하여 투수 외의 전 포지션을 소화한 선수가 되는 등, 타율 2할 8푼 4리로 ‘부활했다’고 평가받았다.

2008년 6월 3일, 1,500안타 기념패를 수상했다.(하일성 KBO 사무총장이 수여) 1,500안타 기록은 대한민국에서 8번째이다. 같은 날, KIA의 2루수 김종국은 1,000안타 기념패를 수상했다.

2008년까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여 은퇴 위기에 몰리기까지 했으나, 2009년 시즌이 되면서 괴물처럼 부활하였고, 마침내 2009년 6월 5일 광주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6회말 김상현의 타석 때 도루를 성공하면서 최소 경기(1,439경기) 통산 500도루, 1,000득점 기록을 달성하였다.[8][9] 그 전에 그가 통산 499도루를 기록한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끝난 이후에 광주에서 기록을 세우겠다.”라고 밝히며 기록 달성을 미룬 것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10] 대한민국 복귀 후 2009년KIA 타이거즈의 10번째 우승이자, 자신의 4번째 우승을 이끌었으며, 이용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인 2010년 7월 9일 광주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2루타를 쳐 한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였다.

대한민국 야구 국가 대표팀 활약[편집]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대표로 뽑혔고 대한민국 팀 주장을 맡았으며, 대회 종료 후 베스트 9에 뽑히는 등 발군의 활약을 보였다. 특히 미국 현지의 A조 2라운드에서 일본과 2번째로 만난 경기에서는 8회초 1사 2,3루 상황에 후지카와 큐지로부터 승부를 결정짓는 2타점 2루타를 쳤다.(이당시 이종범이 타격후 만세포즈 때문에 3루에서 아웃된건 비밀이다.)

기타[편집]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그 중 장남인 정후 군은 휘문고등학교 야구부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포지션은 내야수, 우투좌타이다.

NC 다이노스2013년 신인 지명을 받아 입단한 윤대영은 그의 외조카이다.

또 그는 1994년 같은 팀 선수였던 투수 선동열과 가수 양수경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Two & One을 결성하여 앨범을 내기도 했다. 그는 MBC의 예능 프로그램인 《황금어장 -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당시 해태 구단 사정이 넉넉하지 못해 보너스를 주기 위해 이벤트성으로 감독님 몰래 제작했지만 의도와 달리 욕을 먹었다”라고 털어 놓았다.[11]

건국대 시절과 일본에서의 생활만 제외하면 전부 광주에서 일생을 보낸 광주 토박이였으나, 2012년 은퇴 후 딸의 교육 문제로 서울특별시로 이주하였다. 은퇴 선언 이후 몇몇 학교들을 찾아 야구를 지도하며 조용한 행보를 보였다.

코치 경력[편집]

2012년한화 이글스 감독이 된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이글스의 주루코치로 계약하여 본격적인 2013 시즌부터 KBO 리그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 한화 이글스김응용 감독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한화 이글스 코치에서 사임하였다. 한화 이글스 코치 사임 이후 KIA 타이거즈의 신임감독 김기태 감독과 친분이 있어 KIA 타이거즈 복귀가 유력하다고 추측하였다. 또한 김기태 감독 역시 한화 이글스 코치시절과 같은 보직으로 제안을 하였으나 거절 하였다.

해설 위원 경력[편집]

2014년 인천 아시아 경기대회를 통해 KBS2 객원해설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2014년 11월 6일 MBC 스포츠+와 계약을 맺으면서 정식 해설위원으로 발탁되어 마이크를 잡게 되었다.

주요 기록[편집]

  • 한국시리즈 우승 4회 (1993, 1996, 1997, 2009)

주요 수상 기록 (각종 타이틀 외)

  • 정규시즌 MVP (1994, 역대 유일 유격수 MVP)
  • 한국시리즈 MVP (1993, 1997)
  • 미스터 올스타 (2003)
  • 선발 올스타출전 13회
  • 골든 글러브 6회
    • 유격수 부문 4회- 1993, 1994, 1996, 1997 (1995년은 방위 복무로 홈 경기에만 출장)
    • 외야수 부문 2회- 2003, 2004
  • 진한 바탕은 한국 프로 야구 최초 기록임
기록날짜소속구장상대팀상대 투수경기수달성 당시 나이기타각주
24연속 도루 성공1994. 6. 1해태광주롯데종전 : 이호성 (23도루)[12]
최고령 20-20클럽
33세 28일
2003. 9. 12KIA부산롯데손민한5회 2사 0-0 상황 1점 홈런
종전 : 이순철(해태, 31세 4개월 28일)
300도루1997. 8. 24해태광주현대27세9일역대 3번째
  • 1993 (16홈런 73도루 0.280- 득점 1위, 도루 2위, 타격 8위, 안타 2위, 홈런 4위, 타점 12위)
    • 단일 경기 최다 도루(6개, 1993)
    • 1번 & 유격수
  • 1994
    • 단일 시즌 최다 안타 (196개, 1994)
    • 100경기이상 시즌 최고 타율 (0.393, 1994)
    • 단일 시즌 최다 도루 (84개, 1994, 참조- 홈런 19개 (4위), 득점 1위, 타점 5위)
    • 1번 & 유격수
  • 1995 (방위복무: 126경기중 절반 63경기출장)(16홈런 (9위) 32도루 (6위) 0.326)
    • 1번 & 유격수
  • 1996 20-20 클럽 (25홈런 76도루 타율 0.332- 득점 1위, 도루 1위, 타격 2위, 안타 2위, 홈런 3위, 타점 3위)
    • 1번 & 유격수
  • 1997 30-30 클럽 (30홈런 64도루 타율 0.324- 득점 1위, 도루 1위, 타격 5위, 안타 2위, 홈런 2위, 타점 8위)
    • 프로야구 최초 3할-30홈런-30도루
    • 1번 & 유격수
  • 2003
    • 단일 시즌 최다 2루타(43개)
  • 2011
    • 포스트시즌 최고령 출전 기록 (41세 1개월 27일)
  • 역대 유일 유격수 OPS 1.0 돌파 2차례 달성 (1994, 1997)
  • 1,000득점 (역대 4번째) (2009)
  • 최소경기 200 도루, 300도루, 400도루, 500 도루 (1,439경기, 역대 2번째, 참조- 전준호(1,705경기)) (2009)
  • 역대 1회 1번 타자 (선두타자) 홈런 1위 (44개)
    • 역대 1회초 1번 타자 홈런 1위 (20개, 참조- 2위 유지현 (8개)) (2009.9.11.솔로 홈런(상대 투수:류현진)
    • 역대 1회말 1번 타자 홈런 1위 (24개, 참조- 2위 이영우 (10개))
  • 투수를 제외한 전체 야수 포지션을 정규게임에서 소화

통산 기록[편집]

한국 프로야구 시절[편집]

경기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도루희생타4사구삼진병살타실책타율장타율출루율비고
1993해태1264758513316416537312383511240.2800.4320.331득점 1위, 한국시리즈 MVP
1994124499113196275197784557372270.3930.5810.452타율,득점,안타,도루,출루율 1위
1995632395178102163532330205160.3260.5860.397방위 복무로 홈 경기만 참가(규정타석 미달)
199611344994149281257657274394100.3320.5660.425득점, 도루 1위
1997125484112157283307464390499270.3240.5810.430득점, 도루 1위, 한국시리즈MVP
2001KIA4518845641411137752116530.3400.6010.401시즌 중 복귀
20021234859314225218593555663740.2930.4640.365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 선수
200313252411016543120615056658840.3150.5150.3892루타, 도루 1위
2004133493100128290175242147050980.2600.4220.350득점 1위
2005118430691342526362875849850.3120.4210.393
200693339418218112110112943310.2420.3100.302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 선수
2007842532344601183141525610.1740.2090.217
2008110317389019413891233261150.2840.3790.348
20091233856310521164011184650920.2730.3790.346
2010972653665161429261833520.2450.3580.293
20119723527651513243152335600.2770.3870.337
통산16시즌1706606011001797340291947305101377246221081390.2970.4580.370올스타 선정 13회, 골든글러브 6회, 통산 타율 역대 13위, 통산 도루 역대 2위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보라색 글씨는 한국 프로 야구 역대 포지션별 최고 성적, 붉은색 글씨는 한국 프로 야구 역대 최고 성적.

일본 프로야구 시절[편집]

연도구단등번호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사희생타희생플4사구삼진병살타실책타율장타율
1998주니치86729024438691131011629188314233412.283.475
19998→712348442476101205915833247132456267.238.373
2000711346541458114262816837118132367063.275.406
200181313221003000000400.154.231
통산성적311125210951742865810274459953232951231691622.261.406

한일 통산 성적[편집]

  • 커리어 통산 2000안타 돌파
  • 커리어 통산 221홈런- 563 도루

각주[편집]

  1. 이동 강명석 (2012년 4월 13일). “[(이종범) 10아시아] <3> (이종범) 10아시아”. 10아시아. 2012년 6월 2일에 확인함. |제목=에 delete character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2. 이동 <프로야구> 이종범 '아들이 좌타자 한 풀어줘'《연합뉴스》 2009년 10월 17일 15:05
  3. 이동 김형준 (2009년 5월 4일). “[프로야구 기록추적] <3> 이종범의 4할, 누가 저지했나”. 네이버스포츠. 2009년 10월 25일에 확인함. |제목=에 delete character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4. 이동 네이버사사구 (2012년 5월 29일). “사사구21회”. 코리아볼닷컴. 2012년 6월 3일에 확인함.
  5. 이동: 이정래 (2008년 2월 14일). “이종범, 1994년을 만들어내다”. 데일리안. 2009년 10월 25일에 확인함.
  6. 이동 김상수 (2001년 7월 26일). “[인물 포커스]3년여만에 국내 복귀 이종범 선수”. 동아일보. 2009년 11월 26일에 확인함. |제목=에 delete character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7. 이동 김성원 (2001년 6월 13일). “마침내 온다, 바람의 아들”. 한겨레21. 2007년 7월 25일에 확인함.
  8. 이동 정철우 (2009년 6월 5일). '아버지의 이름으로'이뤄낸 이종범의 500도루”. 이데일리. 2009년 6월 6일에 확인함.
  9. 이동 허상욱 (2009년 6월 5일). “개인통산 500도루-1천득점 기록한 KIA 이종범”. 뉴시스. 2009년 6월 6일에 확인함.
  10. 이동 김은진 (2009년 6월 5일). “이종범‘역사를 훔치고 달렸다’”. 스포츠칸. 2009년 6월 6일에 확인함.
  11. 이동 김진 (2009년 11월 26일). '특급 쌕쌕이' 이종범, 과자-앨범 제작 에피소드 공개!”. 아츠뉴스. 2009년 11월 28일에 확인함.
  12. 이동 '홈런 경쟁 - 이종범은 24연속 도루 신기록 겹경사 ', 《동아일보》 1994. 6. 2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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