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내가 기다리는 시집 한 권

입력
수정2020.12.22. 오전 3:01
기사원문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경향신문]


어머니 모시고 시골 가는 날. 나의 외가, 그러니깐 어머니는 친정 가는 길이니 며칠 전부터 들뜬 기분을 숨기지 않으신다. 멀리 검단산, 남한산을 거쳐 마침내 병풍처럼 늘어선 덕유산. 내가 저 산에서 산나물도 억수로 뜯었다 아이가, 어머니의 추억도 귀에 담으며 고속도로를 버리고 무주구천동 지나 백두대간의 한 고개에 이르면 드디어 고향에 들어섰다는 안온한 실감에 젖어든다. 이름에서부터 호쾌한 기상이 흠뻑 묻어나는 ‘빼재’에 서면 공기도, 마음의 자세도 퍽 달라진다. 밭에는 사과나무, 길가엔 벚나무가 반짝거리는 시골길을 가다가 바로 이 골짜기와 그 이웃 골짜기가 배출한 두 젊은 시인의 시집을 다시 확인한다. 거창에 가서 거창에 그 젖줄이 닿는 시를 읽는 건 달나라에 가서 이태백의 시를 읊는 것과 같지 않을까. 빼재 아래 구불구불한 길의 끝에 고제면사무소가 있다. 고제는 高梯, 높은 다리라는 뜻이다. 그 옛날 장이 섰을 땐 제법 흥청거리던 곳이었다. 어머니께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 옛 소설을 제공해 주던 이동점방도 있었고 나에겐 왕눈깔사탕도 제법 많이 공급해주었던 오일장. 이제 내 어깨만 한 높이의 ‘높은 다리’는 한쪽에 방치되어 있고 농협 옆에 소식판이 우뚝하다. 한 동네의 물정은 대개 저 게시판에 얼추 드러나는 법이다. 어느 지역에나 흔한 청유형의 한 줄 사이로 사뭇 결이 다른 소식이 있다. ‘용초마을 백OO 둘째자부 조은영 대한문인협회 시인 등단을 축하합니다. 용초마을 청년회.’ 그보다 두 해 전엔 이런 현수막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OO마을 OOO씨 손녀 미스코리아 미 당선.’ 이만하면 이 조그맣고 깊은 골짜기는 진선미가 거의 구현된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 기일에 즈음하여 산소 가는 길. 어김없이 고제면 농협광장에 들러 시동을 끄고 다리를 푼다. 시골길 좌우로 봄을 기약하는 논밭은 깊은 호흡조차 삼키고 있다. 점점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저간의 소식이 깃든 현수막에 눈길을 던지며 내심 기대해보느니. 혹 조 시인의 첫 시집은 언제 나올까.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 인터랙티브:자낳세에 묻다
▶ 경향신문 바로가기
▶ 경향신문 구독신청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