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2일 ‘화성 연쇄살인’ 경찰이 이춘재 대신 잡은 사람들 [오래 전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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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12.22. 오전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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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스틸컷. 형사 박두만(왼쪽·송강호 배우)과 서태윤(오른쪽·김상경 배우)이 범행 당시를 목격한 백광호(박노식 배우)에게 용의자의 사진을 보여주며 추궁하고 있는 장면.


■‘화성 연쇄살인’ 범인으로 몰린 청년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53)가 지난 17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수원지법 형사12부(재판장 박정제)는 무죄를 선고하면서 “오랜 기간 옥고를 거치며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은 피고인에게 사법부 구성원 일원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윤씨는 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2009년에야 가석방됐습니다. 지난해 9월 경찰이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춘재(56)를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하면서 재심을 청구하게 됐습니다. 이씨는 용의자 특정 13일 만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습니다. 수사 결과 9차 사건 피해자에서 발견된 DNA와 이씨의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사람은 윤씨만이 아닙니다. 30년 전 오늘(1990년 12월22일) 경향신문에는 <화성 물증 아직 의문투성이 경찰 범인 공식발표 언저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경찰이 19세 윤모군을 9차 사건의 범인으로 보고 수사 중인데 의문점이 많다는 내용입니다. 9차 사건은 1990년 11월15일 14세 여아가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사건입니다.

1991년 4월4일 화성 연쇄살인 10차 사건이 벌어진 현장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찰이 윤군을 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때는 1990년 12월20일 즈음입니다. 경찰은 윤군이 다른 강제추행 사건으로 검거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9차 사건에 관해 자백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사건 현장 부근에 사는 윤군이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동일범으로 위장하기 위해 스타킹으로 손발을 묶는 등 유사한 수법을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윤군의 혈액형이 범인이 남긴 정액에서 확인한 것과 같은 B형이라는 점도 그를 범인으로 보는 근거로 댔습니다.

유치장을 오가는 윤군에게 기자들이 직접 질문을 했는데, 그는 경찰 입장과 똑같은 답변을 했습니다. 자백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윤군은 “언젠가는 탄로날 것이 분명해 모두 털어놨다”고 했습니다. 기자들이 ‘정말로 죽였느냐’고 묻자 “내가 죽였다”고 했고, ‘왜 죽였느냐’고 묻자 “순간적으로 피해자가 소시를 질러서 입을 막고 목을 졸랐다”고 했습니다. 경찰의 가혹행위가 있었느냐는 물음에는 그는 “전혀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1987년 5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살인범은 자수하라”고 쓰인 허수아비가 등장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자백 외에 다른 증거가 없었습니다. 헌법 12조7항은 “재판에서 피고인의 자백이 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때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고 규정합니다.

피해자 도시락에서 지문이 나왔지만 윤군 지문과 달랐습니다. 혈흔은 시간이 지나도 검출되는데 피해자 시신에서 발견된 혈흔이 윤군 옷가지 등에서는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윤군 진술과 달리 스타킹이 꼼꼼하게 매듭지어져 있는 게 의아하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수사를 지휘하던 검찰은 “윤군의 자백만으로는 공소유지가 어려워 범행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 물증이 제시되지 않는 한 윤군을 기소하지는 않을 방침”이라고 했습니다.

반전은 1990년 12월22일 오후 진행된 현장검증에서 나옵니다. 윤군이 갑자기 자백을 번복하고 범행을 전면 부인한 것입니다. 현장검증 도중 윤군의 아버지가 “죽어도 좋으니 양심대로 말하라”고 소리치자, 윤군은 “형사분들이 무서워서 거짓으로 진술했다”고 말했습니다. 현장검증이 중단됐습니다.

지난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윤성여씨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밀실·조작 수사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윤군은 애초에 다른 강제추행 사건으로 연행됐는데 이 강제추행 사건의 피해자 진술조서를 경찰이 조작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범행 당시 윤군이 사건 현장 부근을 걸어가는 것을 봤다고 경찰이 밝힌 목격자들은 경찰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사건 당일엔 날이 어둡고 안개가 심하게 끼어 옆에서 누가 지나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고 말했는데도 경찰이 우리가 윤군을 봤다고 밝힌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윤군의 변호사가 윤군은 9차 사건에 대해 모른다고 했는데도 경찰이 변호사 접견사항 보고서에 이를 담지 않았다는 의문도 제기됐습니다.

윤군과 사건 당일 함께 있었다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알리바이가 확인됩니다. 윤군 측은 이후 경찰이 잠 안재우기·구타·전기고문 위협 등 각종 가혹행위를 해 자신이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수사기관이 일본 과학경찰연구소에 의뢰한 결과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정액의 유전자 정보(DNA)와 윤군의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은 뒤 윤군은 무혐의가 확정됐습니다.

화성 연쇄살인 7차 사건 때 용의자의 몽타주 수배전단. 연합뉴스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차모씨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다 기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주민들에 따르면 차씨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합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가 연상됩니다.

경찰은 1987년 5월 5차 사건 때도 홍모씨가 범행을 자백했다며 수사를 벌였지만 허탕친 적이 있었습니다. 홍씨는 다방여종업원에게 “너도 빨간 옷을 입으면 죽게 된다”는 농담을 했다가 경찰에 연행돼 7일간 조사를 받고 허위자백을 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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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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