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어머니 극락왕생 기원하며 쓰다 

세종 부인·세조 母 ‘소헌왕후’
왕후 서거하자 세종의 명으로
수양, ‘석가모니 일대기’ 지어
24권 대작 〈석보상절〉 완성해

세종·세조 ‘훈민정음’ 육성이자
‘지식의 극락정토’ 실현을 기원

우리에게 아스라히 잊혀진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첫 사랑 같은 책이 있었으니 바로 〈석보상절〉이다. 조선시대 훈민정음을 창제(1443년)하고 반포(1446년)한 후 첫 번째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열과 성을 다하여 만든 작품이 유교 국가 조선에서 조선불교를 주제로 쓴 〈석보상절〉(1447년)이었다는 것이다. 가히 금지된 첫사랑이라 할까. 

왜 유교 책이 아니라 불교 책인 것일까. 그렇다면 누가 그 위험하고 대단한 일을 한 것일까. 바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이다. 고려시대의 불교를 선교양종으로 혁파하고 대대적으로 불교를 박해했던 임금이다. 그 책을 쓴 저자는 다름 아닌 그의 아들 수양대군이었다. 이것이 〈석보상절〉을 읽는 관전 포인트이자 내내 들고 있어야 할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세종의 명을 받들어 수양대군은 갓 태어난 문자 훈민정음으로 일필휘지 써내려간다. 반포 10개월만의 쾌거 〈석보상절〉 24권이라는 대작을 단숨에 완성한다. 세계 불가사의에 속할 조선불교 대장경의 효시이다. 이 대단한 첫사랑의 결실을 받을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의 이름과 위엄을 아는 이 계실까. 

석보상절 주인공은 소헌왕후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소헌왕후의 별세였다. 만일 소헌왕후가 없었다면 〈석보상절〉도 〈월인천강지곡〉도 없었을지 모른다. 있다고 해도 지금과 달라졌거나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왔을지도 모른다. 과연 〈석보상절〉의 탄생은 소헌왕후와 어떤 시절 인연이 되었던 것일까. 

세종(1397~1450)의 왕비이자 수양대군(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1395~1446)를 만나보자. 시호는 ‘소헌왕후(昭憲王后)’로 그 삶을 요약하면 ‘뛰어나고 깊이 깨달아(昭), 선을 행하여 기록했다(憲)’는 뜻에서 ‘소헌’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녀는 시호만큼 통찰력과 굳은 강단 그리고 평생 검소하고 선을 행하던 왕비였다. 

곧 세종이 성군이라면 그 성군 노릇을 잘할 수 있게 한 내조의 여왕이 있으니 그가 바로 소헌왕후이다. 필자의 지론대로 항상 영웅 뒤에는 그보다 몇 배 훌륭한 여성이 있기 마련이다. 세종과의 사이에서 무려 8남 2녀를 낳은 그는 정 깊은 부부이자 다복한 어머니였다. 이뿐 아니라 세종은 두 살 연상인 아내 소헌왕후를 맞이할 때마다 반드시 일어서서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세종이 왕이니까,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니까 부부 사이도 역시 좋았으리라고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소헌왕후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들여다보노라면 세종을 세종답게 만든 그이의 인품과 지혜가 한참 윗길에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먼저 가족의 비극.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그가 왕비가 됐다는 기쁨도 잠시, 왕비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외척 세력을 근절하겠다는 시아버지 태종의 명으로 멸문지화를 당해야 했다. 그것도 세종이 1418년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일어난 일이다. 

상왕이었던 태종은 먼저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에게 죄를 씌워 죽이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관청의 노비로 만들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벌이는 그 참담한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새로 등극한 왕이면 무엇하랴. 무능하기 필부만도 못한 남편과 그 끔찍한 가족의 비극을 소헌왕후는 묵묵히 견뎌야만 했던 것이다. 

이미 태종에 의해 시어머니 원경왕후의 친정이 풍비박산 나는 것을 목도한 전례가 있었기에 당시 4남매의 어머니였던 소헌왕후는 자신과 자녀들의 안위 또한 살얼음판에서 지켜내야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역적으로 몰린 친정아버지로 인하여 소헌왕후는 폐비까지 거론되었지만 이미 정의공주와 두 아들(문종, 세조)을 낳고 셋째 안평을 임신 중이었기에 이를 모면할 수 있었다. 태종도 외척 세력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지 새 왕비를 뽑아 또다시 외척 세력이 생기는 악순환을 원치 않았다.

이렇게 조선시대 초기 건국의 기틀을 다질 당시에 왕비가 되는 일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무섭고 끔찍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모진 세월을 함께 이겨낸 세종이 아내를 대하는 마음이 어떠했을까. 

‘여자 세종’ 소헌왕후와 훈민정음
세종은 모두 22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후궁이 무려 12명이었다. 소헌왕후는 이들을 잘 거느려서 조선 역사상 내명부를 가장 안정적으로 다스린 왕비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것이 세종의 업적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시대 왕비의 롤 모델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종이 산행을 간 사이 궁궐에 화재가 났을 때는 직접 진두지휘해 불을 끄는 등 통솔력과 순발력도 뛰어나 부창부수, 여자 세종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이 정도면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이라는 조선 최고 걸작 탄생의 주인공이 될 만하지 않은가.

그러한 소헌왕후가 훈민정음 반포를 6개월 앞둔 1446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반포는 모두가 아는 한글날로 음력 9월 상순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이다.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순탄한 40대를 보낸 소헌왕후에게 1444년부터 엄청난 일이 닥친다. 딸이 왕비가 된 탓에 한 많은 인생을 살다 간 친정어머니 순흥 안씨가 1444년 11월에 별세한다. 그로부터 생때같은 20살 안팎의 5남 광평대군(1425~1444)이 12월에, 7남 평원대군(1427~1445)이 이듬해 1월에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 굳건했던 소헌왕후도 상심하여 건강을 잃고 말았다. 정인지(1396~1478)가 쓴 ‘소헌왕후 영릉지’에는 이렇게 소헌왕후를 기리고 있다.

왕후는 나서부터 정숙하고 완만하여 오직 덕을 행하였다. 우리 전하 세종께서 사저에 살고 있을 적, 태종께서 훌륭한 문족 중에서 배필을 구하였다. 인자하고 검소하여 엄숙하고 온화한 아름다움을 이루었다. 왕후가 들어오고 물러갈 때는 전하께서 반드시 일어서시니, 그 공경하고 예로 대하심이 이와 같았다. 

평생의 의지처였던 아내와 두 아들을 3년 동안에 잃게 된 세종 또한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고 동고동락한 아내이자 어머니 같은, 어쩌면 그 둘을 합한 관세음보살 같은 존재 소헌왕후가 없는 세상이라니…. 

그러나 엄마를 잃은 둘째 아들 수양대군(1417~1468)도 세종 못지않았다. 소헌왕후는 각별했던 수양대군의 집에서 며느리 정희왕후의 병간호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수양의 슬픔은 깊디깊었다. 

단종을 죽이고 세조가 된 포악한 수양대군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나이 서른의 아들은 엄마 잃은 절절함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단숨에 24권짜리 〈석보상절〉을 지었다. 

12년 후인 1459년 세조가 된 지 5년 째에는 아버지 세종의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한 〈월인석보〉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슬픔을 〈월인석보〉 서문에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예전 병인년 1446년에 소헌왕후께서 이승을 빨리 하직하시니 섧고 슬픔에 싸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으매, 세종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극락왕생 발원이 경전을 널리 알리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네가 석보를 만들어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겠구나. ― 〈월인석보〉 서문 中

세종이 어머니를 여의고 어쩔 줄 모르는 아들에게 하는 말이 들리는 것만 같다. “아들아, 너까지 몸 상하면 안 된다. 그러니 어머니의 부재를 잊고 그 부재를 넘어설 뜻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석보상절〉을 짓는 일이고 너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담담하지만 큰 울림으로 아들에게 말하고 있다. 

소헌왕후에 바치는 사부곡·사모곡
언제나 내 편이었던 부자의 평생 의지처가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저세상에 가셔서도 우리를 위해 애쓰실’ 소헌왕후에게 당신이 살아서 바라던 대로 잘하겠노라는 서약서가 바로 〈석보상절〉이요, 〈월인천강지곡〉이다. 이 부자의 신들린 신명을 보라. 수양대군이 10개월 만에 완성한 대작 〈석보상절〉 24권을 보고 세종은 금세 노래를 지었다는데 그것이 〈월인천강지곡〉으로 무려 600여 수이다. 낮밤을 잊고 정사가 바쁜 와중에 훈민정음으로 지은 최초의 산문 불경 〈석보상절〉과 운문 불교 게송 〈월인천강지곡〉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우리는 이 대단한 책을 이제부터 찬찬히 읽어나가기로 한다. 세종과 세조의 육성이요, 친필로 써내려간 훈민정음이다. 

그것이 유교의 나라를 세웠어도 막을 수 없는 운명 같은 사랑 석가모니의 일대기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를 통해 소헌왕후의 극락왕생과 조선의 온 백성과 나누는 지식의 극락정토 실현을 발원한 것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석보상절〉의 서문을 통해 책의 개요와 현존하는 첫 책 3권의 순서를 소개하기로 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알면 알수록 흥미진진한 〈석보상절〉의 세계, 기대하셔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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