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지만 숨막히는 ‘구중궁궐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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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10.29. 오후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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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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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삶’으로 들여다본 조선…신병주 건국대 교수 ‘왕비로 산다는 것’ 출간[경향신문]



정치·시대적 격변과 맞물려
여걸부터 현숙한 아내까지
다양한 유형의 왕비 등장해

“조선시대 왕비의 삶이오? ‘극한직업’이었습니다. 구중궁궐에 갇혀 엄격한 일상을 견디며 왕의 내조에 전념하는 역할을 요구받았죠. 정치적 상황에 휩쓸려 자리가 위태로울 때도 있습니다. 왕비 침전인 교태전(사진) 뒤 아미산이나 궁궐 후원을 산책하고 독서하는 것 정도가 그나마 숨통을 터주는 일이었을 겁니다. 동화나 사극 속 화려한 모습과 달리 힘든 직업이었던 거죠.”

조선시대 왕비가 되는 정석은 남편의 세자 시절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세자가 왕이 되면 왕비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친 왕비는 6명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에 27명의 왕이 재위했는데 정통 과정을 거친 왕비가 소수인 데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왕비의 삶을 짐작하게 된다. <왕비로 산다는 것>은 왕비들의 파란만장한 삶으로 조선 역사 500년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 20일 전화 인터뷰에서 “조선시대 왕비들은 선망의 대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왕실을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고군분투해야 했다”고 말했다.

신병주 교수


신 교수는 그간 ‘왕’과 ‘참모’라는 키워드로 조선시대를 다루었다. 왕비를 중심으로 들여다본 조선의 역사는, 알고 있던 사건도 새롭게 느껴진다. “역사적으로는 덜 주목받고, 드라마 등에선 왕의 조연으로만 그려지거나 과장된 묘사가 많아 실록과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왕비의 삶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첫 국모 신의왕후 한씨로부터 마지막 왕비 순정황후 윤씨까지 책에서 다루는 50명 중 공식적인 왕비는 43명이다. 나머지 7명은 연산군과 광해군의 폐비 신씨와 폐비 유씨, 광해군 때 왕비로 추숭되었다가 그가 폐위되면서 13년 만에 왕비 자리에서 내려온 공성왕후, 왕비가 되기 전 폐출된 세종의 며느리이자 문종의 세자빈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 사약을 받은 조선의 첫 왕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비가 되지 못한 소현세자빈 강씨다.

이렇듯 정치적 격변과 맞물린 왕비의 유형을 시대에 따라 7개 장으로 나눴다. “조선시대 여성의 지위가 높았을 때는 여걸형 왕비, 성리학 이념이 확고해진 중기에는 조신한 왕비가 대세였고, 당쟁과 명분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에는 절묘하게 수렴청정하는 왕비들이 등장해요. 격동의 현대사도 가족사로 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잖아요. 왕비의 모습을 통해 조선시대도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이죠.”

자경전에서 본 교태전. 문화재청


왕비는 왕권과 신권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써 요동치는 정국의 중심에 서곤 했다. 조선 후기 정치적·사상적 투쟁인 ‘예송논쟁’도 인조의 계비였던 장렬왕후 조씨에서 시작했다. 속을 들여다보면 ‘신권강화론’과 ‘왕권강화론’의 충돌이었고, 정권을 누가 잡을지를 둘러싼 명분 싸움이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장렬왕후의 상복으로 사상투쟁을 벌인 거죠. 처음은 서인, 다음은 남인이 승리하며 정권 교체가 이뤄지죠. 오늘날도 비슷하지 않나요. 이를테면 ‘님을 위한 행진곡’ 부르는 방식을 ‘제창’이냐 ‘합창’이냐로 정당들이 대립했잖아요. 그 안에 보수와 진보의 가치가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이죠. 다만 그 정쟁에 ‘올인’하면서 정작 민생이 뒷전이 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거죠.”

조선시대 높은 평가를 받은 왕비들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다. 당대 기준으로는 조용하고 현숙한 아내가 최고였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는 친정 가문이 역모 혐의로 화를 입었는데도 울분을 삭이며 조용한 내조를 이어갔다. 8남2녀를 생산했으며, 세종이 총애하는 후궁을 융성하게 대우했다고 한다.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김씨도 후사를 두지 못했지만, 혜경궁 홍씨에게 효성을 다하는 등 좋은 품성이 두루 기록됐다.

‘악녀’ 문정왕후·폐비 윤씨
성리학 강화 시대상 보여줘
역사 다르게 읽어볼 수 있어

‘악녀’로 기록된 왕비들을 참작할 여지는 없을까. “조선시대 최악의 평가를 받은 왕비는 드라마 <여인천하>로 잘 알려진 문정왕후입니다. 수렴청정하며 국정의 중심에 서서 외척세력을 중용하고, 불교 중흥 정책을 추진합니다. 사후 남편 곁에 묻히려 중종의 무덤을 옮기려고까지 했죠. 사관들 입장에선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던 거죠.” 연산군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경우 시대상황의 희생양으로 볼 수도 있다. 윤씨가 사사되기 2년 전 민간에선 어을우동이 교형에 처해졌는데, 두 사건을 통해 성리학 이념의 강화라는 시대상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왕비들의 삶에서 모범을 찾기보다는 오늘날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떠한 방식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신 교수는 곳곳에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했다.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는 궁을 나온 뒤 동대문 밖에 거처하며 생계를 위해 옷감을 물들이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종로구 창신동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자줏빛 풀이 넘치는 샘물)’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 밑 샘물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일순간 평민으로 전락한 왕비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서려 있는 공간인 것이죠. 또한 단종의 장릉과 정순왕후의 사릉은 현재 조선 왕릉 중 무덤의 거리가 가장 먼 사례입니다. 이러한 사연을 알고 보면 막연했던 역사가 뭉클하게 다가올 수 있겠죠.”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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