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어쩌다가 나는 이 길을 가게 된 것일까. 이 길이 나의 길은 맞는가!’

노수신은 흔들리는 말안장에 앉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벌써 며칠째 낯설고 낯선 길을 가고 있었다. 고달프고 괴로운 길이었다. 몇 군데 뼈가 부서진 몸으로 말을 타고 간다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보다는 정신적 고통이 더 컸다.

“역적의 잔당으로서 <양재역벽서사건>을 배후조종한 죄로 귀양 가고 있는 것이잖습니까.”

조건을 쓰고 깃도 동정도 소매도 없는 청반비의(靑半臂衣) 위에 까치두루마기를 걸친 나장이 그걸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냐는 듯 딱한 표정으로 말 위의 노수신을 쳐다보았다.

“내가 말이냐?”

노수신은 퉁퉁 붓고 멍든 눈을 겨우 뜨고 나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제가 그랬겠습니까?”

“네가 그랬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아니다. 내가 모르는 일을 내가 했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노수신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뼈가 부서지고 살점이 터져나가는 고문에 수없이 혼절을 하면서도 끝내 시인한 적 없는 죄이기에 더욱 억울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죄

노수신은 1543년(중종 38년)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하고 홍문관부수찬에 제수되면서 관직에 나아갔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인사개편이 있었고, 노수신은 세자시강원우사서를 겸하게 됐다. 후에 인종임금이 되는 세자 이호를 가까이에서 보필하게 된 것이다.

그 얼마 후 중종임금이 승하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은 노수신을 사간원정언에 제수하고 언관(言官)의 업무를 맡겼다.

장원급제로 세상의 찬사와 시기를 한 몸에 받으며 화려하게 벼슬에 오른 노수신이었지만 아직 신임관원의 티도 벗지 못한 때에 간언(諫言)의 자리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시로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였고, 백료들의 비위를 고하거나 임금의 잘못된 정사를 지적하는 자리이기도 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젊고 폐기 넘치는 노수신은 학문에서 배운 대로, 성현의 말씀대로 의로움은 감싸고 불의와는 싸우면 되는 것이라 믿고 직무에 임했다.

새 임금 인종은 조정을 일신하는 개정(開政)을 서둘렀다. 그런데 근신들과 인사를 의논하면서 선왕이 임명한 우의정 이기를 유임시키고 싶어 했다.

이기는 소윤 윤원형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김종직의 만시를 지어 그 죽음을 애도한 지돈령부사 이명신의 증손으로, 김진의 딸과 혼인하고 1501년(연산군 7년)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그런데 장인 김진이 관직에 있으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다 적발돼 문책을 받는 바람에 사위인 이기에게도 그 피해가 미쳤다.

장인 문제는 번번이 이기의 발목을 잡아서 경관직은 꿈도 못 꿔보고 종사관, 경원부사, 의주목사 등의 외관직으로만 돌아야 했다.

1527년(중종 22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지만 1533년 김안로의 탄핵으로 유배됐다. 이기는 1537년에야 풀려나 1539년 다시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중종임금은 그 공으로 이기를 병조판서에 제수했는데, 이번에도 이조판서 유관이 이기의 장인 문제를 들어 반대하면서 임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행히 김안로의 등용을 처음부터 반대했던, 다른 한편으로는 중종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이언적이 그것은 이기의 장인이 저지른 비리이지 이기의 비리가 아니라고 두둔해주었다.

덕분에 이기는 병조판서 대신 형조판서에 제수될 수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의정부우찬성과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대윤의 윤임은 새 임금 인종의 외삼촌이었다.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집권에 성공한 대윤 입장에서는 소윤의 이기가 권력 핵심 요직인 우의정에 유임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래서 강하게 반대했지만 인종의 뜻도 확고해서 진퇴양난이었다. 이렇게 되자 윤임은 좌우와 의논하고 이기의 파직을 이끌어내기 위한 탄핵을 추진했다.

탄핵 사유는 역시나 이기 장인의 비위사실이었다.

노수신은 비록 당파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자신의 재주를 알아준 임금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임금에게 해가 될 인재의 유임에 반대했다.

그래서 사간원이 이기를 논핵할 때 노수신도 정언으로서 함께 참여했다. 퇴계 이황의 형인 이해(李瀣)도 이때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논핵에 참여했다.

양사의 논핵으로 이기는 판중추부사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날의 논핵은 노수신에게 20여 년간의 유배라는 고통을 안겨주게 되고, 이황의 형 이해에게는 죽음을 안겨주게 된다.

노수신은 이황과 동시대에 활동한 문장가이자 학자이며 문신이었다. 조선 중종(재위 1506~1544)과 인종(1515~1545), 명종(재위 1545~1567), 그리고 선조(재위 1567~1608)까지 네 임금을 섬겼는데, 처음 벼슬에 나아간 때는 소윤과 대윤이 권력을 두고 격렬히 다투고 있던 시기였다.

그 권력다툼은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양재역벽서사건, 그리고 정미사화(丁未士禍)로 이어졌다.

이조 중기 대학자 노수신의 초상화.
이조 중기 대학자 노수신의 초상화. [사진=상주시청]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는 이호를 낳고 7일 만에 산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호는 중종의 맏아들이었기에 1520년(중종 15년) 세자로 책봉됐고, 25년 동안 세자로 있다가 1544년 왕위에 올랐다.

바로 인종이다.

그러나 인종은 9개월 만에 병이 위독해졌고, 후사가 없으므로 문정왕후의 몸에서 난 경원대군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가 곧 승하했다.

인종이 붕어하자 노수신은 만사를 지어 애도했다.

동궁에서 삼십 년을 지내셨어도(春宮三十載)

덕은 변함없어 오랠수록 더욱 깊었음이라(一德久彌潛)

효우의 마음 항상 부족하다 여기셨고(孝友心常歉)

총명은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나니(聰明學不厭)

번잡한 정사를 처음 다스리실 때(萬幾初整理)

만 한 달 전부터 익혀 나아가셨음이라(期月已磨漸)

장차 그 지식과 어진 음성 멀리까지 퍼질지니(欲識仁聲遠)

조칙의 글 열고 말씀 새겨 적어둔다(絲綸發舊籤)

거상 삼 년 침묵하고(宅要三年默)

오 개월 동안 엄중히 거함이라(居猶五月嚴)

갑자기 옥궤에 기대시니(遽然憑玉几)

부여잡지 못할 용염이네(不復挽龍髥)

궁곡까지 모두 모여 슬피 울부짖는데(窮谷悲號合)

장례는 검소함에 예를 겸하였구나(因山儉禮兼)

추측컨대, 유명이 계셨으리라(丁寧有遺敎)

성덕이 더욱 겸손하고 겸손하네(盛德益謙謙)

노수신은 퇴계와 어깨를 견주었던 학자였고, 송시(宋詩)의 강서시파(江西詩派) 영향을 받은 당대의 걸출한 시인이었다.

퇴계와 함께 사림시인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사상을 시에 담아 창작했다.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명종(경원대군)은 이때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 그래서 문정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노수신은 인종이 붕어했을 때 대제학 성세창, 좌참찬 권벌, 이조판서 신광한, 형조판서 민제인, 이조참의 홍춘경, 부제학 송세형, 사인 조언수, 검상 임형수, 홍문관부교리 이담과 함께 대행왕(大行王: 임금이 죽은 뒤 시호가 내려지기 전의 칭호) 행장을 짓는 일에 참여할 정도로 학문이 높고 문장이 뛰어났다.

소윤도 그 점을 인정했기에 명종이 즉위한 후 이조좌랑에 임명될 수 있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와 왕위에 올랐을 땐 그 후광으로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따르는 대윤이 집권했다.

그러다가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왕위에 올라 문정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문정대비의 친동생 윤원형을 따르는 소윤이 집권하게 된다.

중종 때부터 윤임과 윤원형은 외척이라는 신분을 등에 업고 권력다툼을 벌였는데, 윤임의 당류를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의 당류를 소윤이라 했다.

대윤의 시대에서 소윤의 시대로 바뀌었지만 대윤은 쉽게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명종이 어려서 왕위가 안정되지 않았기에 소윤은 대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구도가 지속되는 것이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대윤에게 왕을 바꿀 명분이 없을 뿐 힘은 있기 때문이었다.

소윤을 거느리고 수렴청정하고 있던 문정대비는 정치적 야심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하루 빨리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대윤의 숙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대윤의 탄핵으로 우의정에서 물러났던 이기를 병조판서에 임명했다.

또 윤원형의 최측근인 정순붕을 지중추부사에 임명했고, 소윤 임백령을 호조판서에, 허자를 공조판서에 임명한 후 그 진두지휘를 친정동생 윤원형에게 맡겼다.

노수신은 1515년(중종 10년)에 상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호는 소재(穌齋), 이재(伊齋), 암실(暗室), 여봉노인(茹峰老人) 등이다. 돈령부참봉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노경장의 증손이며, 풍저창수를 역임하고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노후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활인서별제증(贈) 의정부영의정 노홍이며, 어머니는 예조참판 이자화의 딸 성주 이씨이다.

노수신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으며, 특히 경서에 밝았다.

조광조의 제자로서 성리학의 대가인 이연경이 노수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딸 광주 이씨와 혼인시켰고, 노수신에게 직접 학문을 전수했다.

노수신은 1534년(중종 29년)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박사제자에 뽑혔다. 이때 지춘추관사 김안국은 노수신을 가르치면서 그 뛰어난 재능에 탄복했다고 한다.

노수신은 을사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 그리고 정미사화의 직접적 피해자였다. 그럼에도 이 세 사건에 노수신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상할 것 없다.

사실은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관련은 없지만 피해는 보았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세 사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윤원형 일파는 윤임의 대윤이 인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경원대군(명종) 대신 계림군 이류를 새 왕에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원상(院相) 유관과 우찬성 유인숙 등이 동조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고는 인종의 임종을 지킨 윤임의 사위 이덕응을 잡아들이고 국문해서 윤임과 함께 봉성군 이완을 추대하려 했다는 억지자백도 받아냈다.

사전정지작업이 끝나자 윤원형은 자신의 첩 정난정을 시켜서, 윤임이 어린 명종을 끌어내리고 계림군과 봉성군 중 하나를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문정대비는 이상의 조작된 증거를 들어 명종으로 하여금 대윤의 세 거물 윤임과 유관, 유인숙 등을 잡아들여 국문하고 죄를 주라는 밀지(密旨: 임금이 비밀리에 내리는 교지)를 내리게 했다. 그들 셋이 중심이 돼 역모를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이 밀지에 따라 이기, 임백령, 정순붕, 허자 등은 윤임과 유관, 유인숙을 잡아들였다. 불과 사흘 뒤 윤임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임금의 밀지가 또 내려졌다. 소식을 들은 이언적은 대경실색해서 문정대비에게 달려갔고,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이 임금의 아름다운 덕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밀지를 다시 거두어들일 것을 간청했다.

권벌 또한 그들의 죄를 공론으로 다스려야 한다며 밀지를 거두어들일 것을 청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노수신도 이때 경회루 문 밖에 앉아 여러 관료들과 함께 복합(伏閤)으로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윤임을 살려두고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문정대비의 결단에 따라 결국 사약이 내려져 윤임은 사사됐다.

병조판서 권벌은 윤임 등을 신구했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체직됐고, 이언적은 항의의 뜻으로 원상의 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히고 출사하지 않았다.

얼마 후 경기관찰사 김명윤은 계림군 이유와 봉성군 이완도 윤임의 역모를 알고 있었다고 고변했다.

소윤은 그 고변을 근거로 계림군과 봉선군까지 잡아다 국문했고, 윤임의 사위 이덕응의 강압에 의한 허위진술까지 합쳐서 계림군을 주살하고 그 아들도 교형에 처했다.

소윤의 난폭함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이기는 개인적 원한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했고, 역모에 연루시켜 파직 또는 유배했다.

이른바 을사사화였다.

노수신도 이때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시인을 하지 않았음에도 역모를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됐다.

『조선왕조실록』의 「명종실록」 명종즉위년 기사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노수신의 자(字)는 과회(寡悔)이고, 나이 스물아홉에 장원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성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에 힘쓰고 도덕의 모범을 보이며 스스로를 단속하였으므로 벼슬에 오르기 전부터 큰 명망이 있었다.

그의 의논은 한결같이 바른 것에 근거하였으므로 사인 정황과 더불어 새로운 집권세력(소윤)에서 매우 꺼리는 바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원 등과 함께 배척을 당하니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이황의 형 이해 또한 역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을 가던 중 장독(杖毒)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관도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가다가 온양에서 사사됐다. 유인숙도 이때 사사됐다. 윤임과 유관, 유인숙의 자식들도 모두 교형에 처해졌다.

이듬해인 1546년(명종 1년)의 일이었다.

여주인이 집정하여 위에 있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한다. 장차 나라가 망하는 것을 서서 지켜보아야 하니 이 어찌 한심한 꼴이 아니겠는가!

(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

1547년(명종 2년) 9월에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은, 문정대비와 그 아래 이기 등의 간신들이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의 붉은 글씨 벽서가 과천 양재역에 나붙은 사건이었다.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노가 문제의 벽서를 떼어왔는데, 윤원형과 이기는 벽서의 배후로 봉성군 이완과 송인수, 이약빙, 정원 등을 지목하여 극형에 처했다.

계림군을 죽일 때 같이 죽이지 못한 봉성군을 마저 제거하고, 또 소윤으로부터 ‘잡초(대윤)의 종자(잔당)’로 지목된 송인수, 이약빙, 정원을 함께 제거한 것이다.

양재역벽서사건은 정미사화로 확대됐다.

윤원형과 이기는 을사사화 때 소윤의 음모를 눈치채고 밀지가 아닌 공론으로 윤임의 역모사건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할 것을 간한 이언적과 권벌도 배후로 지목해 유배했다.

또 정자, 권응정, 권응창, 정황, 유희춘, 이언침, 백인걸, 김만상, 이천계 등 20여 명도 같은 죄목으로 유배했다.

이기 논핵에 참여했던 노수신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노수신은 을사사화로 이미 파직된 상태에서 양재역벽서사건의 배후라는 죄까지 더해졌고, 호남 순천에 유배됐다가 얼마 후 옥주(지금의 진도)로 이배됐다.

예전에 이기를 논핵했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다음회에 계속)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