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거치는 동안 왕씨를 단한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고려 34대 475년이나 왕족이었던 성씨인데 왜 오늘날에는 수가 극히 적을까요?
궁금합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왕씨들을 모조리 다 죽였다는 소문이 진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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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국후 공양왕과 그아들들이 역모에 가담하였다 하여, 왕씨들을 대규모로 숙청하였기 때문에
왕씨가 희귀해 진것은 사실이지만, 완전 절멸은 아니었고,
현재 개성왕씨가 그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공민왕이 사망한 이후 우왕, 창왕, 공양왕을 거치면서 고려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대접받던 이는
공민왕의 후비중 한명인 정비안씨였습니다.
정비안씨는 대비의 지위에서 우왕, 창왕의 폐위는 물론이고, 공양왕의 즉위에 까지 이용당하였고,
결국 공양왕이 왕위를 태조 이성계에게 양위하는 것을 최종 결재한 인물도 바로 정비안씨입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뒤 '공양군'에 봉해집니다.
공양왕의 호칭도 이 공양군에서 유래한 것이지 정식 시호는 아닙니다.
공양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뒤 원주로 물러갔는데, 신하들의 줄기찬 주청으로 상왕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공양군으로 그 강봉되면서 간성군으로 이거되었습니다.
이성계는 신하들의 반대에 무릅쓰고, 공양군의 가족들이 모두 간성에서 모여살게 하였고,
나머지 왕씨 왕족들을 거제도와 강화도등의 섬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하지만, 양위의 형식으로 오른 왕위였기 때문에 공양군과 그 아들들의 존재는 항상 손톱밑의 가시처럼 성가신 존재들이었습니다.
태조3년 공양군이 두 아들과 함께 왕씨를 결집하여 모역을 도모하였다는 왕씨 모역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공양군은 삼척부로 이배되었고, 결국 이곳에서 두 아들과 함께 교형에 처해졌습니다.
태조실록 태조 3년 4월 14일 기사에
왕씨일족(공양왕등)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하여 삼척 강화 거제도에 유배중이던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파견한 기록이 있는데,
4월 15일에 강화도의 왕씨 일족을 강화나루에서 던졌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하여
20일까지 거제도와 지방에 있던 왕씨들이 수장되고 참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시기에 공양왕과 그 아들들및 수많은 왕씨들이 죽임을 당하여
태종실록에는 아예 이 사건을 '갑술년의 주륙'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조3년 왕씨 몰살사건을 기록한 책으로,
생육신중 한사람인 '추강 남효온'이 지은 '추강냉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조의 왕씨가 망하자 여러 왕씨를 섬으로 추방했더니, 모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니, 죽여 버리는 것이 낫다.” 하였다.
그러나 명분 없이 죽이기는 어려우므로, 물에 익숙한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갖추게 하고 여러 왕씨를 꾀어 말하기를, “교서가 지금 내렸는데 여러 분을 섬안에 두어 서인을 만들라 하신다.” 하니,
여러 왕씨가 매우 기뻐서 다투어 배에 올랐다. 배가 해안을 떠나자, 뱃사람이 바다 밑으로 잠수해 들어가 그 배에 구멍을 뚫었다. 물이 새어 들어와 배가 반쯤 잠길 때에, 왕씨와 본래부터 잘 아는 중이 해안에서 손을 들어 왕씨를 불렀다. 왕씨가 곧 한 수의 시를 지어 불러 이르기를,
“노젓는 한 마디 소리 창파 밖에 있도다. 묻노니 산승이여 너를 어이하리.” 하니, 중이 통곡하고 돌아갖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추강냉화를 쓴 남효온이 태어난 것은 갑술년의 주륙이 일어난지 60년이 지난 1454년의 일이므로
이야기의 내용에 좀더 극적인 요소가 덧붙여진듯 하긴 하지만
고려왕실의 일족들이 조선초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태종 13년 고려종실 왕휴의 서자인 왕거을오미가 갑술년의 주륙을 피해 숨어살다 적발된 사건이 있었는데
태종은 갑술년의 사건을 태조의 잘못이 아닌 일부 대신의 잘못된 권유로 생긴 비극으로
왕거을오미에게는 죄가 없다 하여 훈방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약 10여명의 왕씨들이 적발되었으나 태종은 모두를 처벌하지 않고 풀어줬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몇차례, 왕실차원에서 개성왕씨의 후손을 찾아내어 벼슬을 하사한 기록이 있으므로, 완전멸족은 사실이 아닙니다.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 선물할 때 참고해주세요.
2017.06.28.
2017.06.28.
왕씨들을 조선에서 죽였다는건 사실인듯 합니다
탄압도 있었고요
그래서 왕씨들은 자신의 성씨를 숨깁니다
옥씨 전씨등으로 성을 바꾼뒤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분들도 모두 왕씨의 후손들입니다
2017.06.28.
일단 고려 광종 시절 왕씨들이 상당수 죽게됩니다.
호족연합의 일환으로 정략결혼을 수 없이 해서 그때 혜종, 정종이 요절하고 노비안검법, 과거제 등등의
개혁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하자 그때 숙청의 여파로 죽게됩니다.
그리고 나서 고려 광종이 족내혼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왕씨들의 가계도가 엉망이 되고 개판이 될때
이후 요절하는 왕씨들이 숱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고려 숙종이 6촌혼 금지같은 형태로 다시 왕씨들의 가계도가 안정화가 됩니다.
요절하는 왕족도 없구요.
하지만 결과는 문벌귀족이 마구 늘어나면서 이후 이들의 타락으로 무신정권이 들어서자 또 위기에 빠집니다. 그러나 원간섭기(원보호기라고 할게요)이후엔 몽골의 피가 섞이게 됩니다.
그리고 공민왕이 충선왕을 제거하고, 이후 우왕 창왕이 나오고 그들을 폐위시키자 이후 왕씨가 서게되는데 이때도 왕씨를 찾기가 너무 힘든 상황이 됩니다. 더욱이 덕흥군처럼 몽골에 투항한 고려왕족도 한두명이 아니기 때문에 뭐 이중에선 북원에 자기 가문 만들었겠죠.
아마 전씨 옥씨 노씨로 바꾸게 되는데, 한간에 이성계 장군이 왕씨를 몰살시켰다는 설은 태조실록이나 이런데 나왔는데, 이건 사관의 뻥이 다소 섞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뭐 그러니 왕씨는 없다. 이씨가 곧 왕이다 뭐 이런 식으로요." 예를 들어 윤필상의 평도 왜곡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죠. 단순한 척신이라고 우린 알고 있는데, 이건 사림의 왜곡으로(일부 훈구파의 왜곡도 있습니다) 잘 뜯어보면 건주여진을 토벌한게 윤필상인데, 조준-김종서에 뒤를 이을 문무겸비형 문신이었죠. 윤관의 후손 중에 가장 윤관에 근접하던 문신이죠.(문숙공 윤관과 거의 맞먹을 지경이고 동북 9성때 윤관공이 죽을뻔했는데 건주여진 토벌때는 그것과 달리 피해도 최소화했죠)
결과적으로 왕씨들의 수가 원래부터 적었습니다. 에를 들어서 공양왕이 가장 마지막에 왕에 오를때는 공민왕과는 남남일정도죠. 모조리는 아니죠. 사실 원래부터 적었고, 왕조교체 차원에서 더 적어진거죠.
그래서 드라마 정도전에선 사실유무가 불확실해서 왕씨몰살 이야기를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호족대숙청에 따른 왕씨들의 죽음과 족내혼에 따른 왕씨들의 요절과 몽골공주와 결혼 그 와중에 벌어진 왕씨들의 몽골 이주와 죽음 등등으로 이미 그렇게 많지 않았죠. 공양왕이 이미 공민왕과는 사실상 남남인 수준이면 이미 이전에 많이 죽었거나 몽골로 건너갔다는거죠.
공민왕이 충숙왕을 죽였는데 이때나 전이나 여럿의 왕자들이 몽골로 이주했죠. 덕흥군 하나만 있겠습니까?
2017.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