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내가 탄 말은 털빛이 붉고, 갈기가 검다. 이마는 희고, 다리는 날씬하다. 발굽은 높고, 허리는 짤막하다. 두 귀는 쫑긋한 품이 참으로 단걸음에 만 리 길이라도 달릴 성싶다. 창대(마부 이름)는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장복(하인 이름)은 뒤에서 따라온다.

안장 양쪽엔 주머니 한 쌍을 달았다. 왼쪽은 벼루, 오른쪽에는 붓 두 자루·먹 한 장·작은 공책 네 권에 이정표를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국경에서 짐 수색을 아무리 엄하게 한들 염려할 게 없었다.”

<열하일기> 여정의 시작이다. ​연암 박지원이 연행길에 나선 1780년(정조4)에 이르러 드디어 정조는 초창기 세도정치의 주역 홍국영을 축출하고, 친정 체제를 확립했다. 이때 청나라는 건륭제 즉위 45년으로 중국 역사상 최전성기 때였다. ​강희제가 등소평이라면, 60년을 치세한 건륭제는 강택민으로 비유된다.

그보다 15년 전(1765년) 담헌 홍대용은 숙부를 따라 청나라에 다녀온다. 그리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헌연기’ ‘을병연행록’ 등에 담았다. 특히 악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북경 천주당에서 한국인 최초로 서양 악기 ‘풍금’을 접한 글을 남겼다. 연암이 갔을 때는 치워져 볼 수 없었다.

홍대용이 미친 파장은 대단했다. 그는 수많은 조선 실학자의 가슴속에 ‘북경으로 가는 꿈’을 심어준다. 홍대용보다 여섯 살 연하이면서도 가깝게 지냈던 연암 역시 꼭 북경에 가보고 싶어 했다. 연암이 여행 준비를 하면서 공책 4권을 챙긴 것은 처음부터 기록을 남기기 위한 답사 준비가 철저했음을 말해준다.

<열하일기>는 단순 견문기 차원이나 명승지 위주 관광이 아니다.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에 눈뜬 실학자의 생생한 다큐멘터리다. ‘호질’이 탄생한 것도 북경행의 결과였다. 잘 알려진 ‘허생전’ ‘양반전’ 등은 진보적이고 독창적인 견해를 잘 담아낸다.

■ 눈으로만 보면 보이지 않는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과 심양을 거쳐 북경으로 가는 여정은 험난했다. 한 여름 무더위와 장마철이 관통했다. 대부분 길은 시궁창이 됐다. 8월 1일, 연암 일행은 더위 먹어 쓰러진 말들을 세워 타면서 간신히 북경에 입성했다.

아뿔싸. 황제는 북경에 없었다. 열하(熱河)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여름 별장)에 머물고 있었던 것. 열하는 오늘날 허베이성의 청더(承德). 베이징에서 250km 떨어진 곳이다.

18세기 후반 청나라에 파견된 조선 사신단이 북경의 동문인 조양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연행도’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18세기 후반 청나라에 파견된 조선 사신단이 북경의 동문인 조양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연행도’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연암은 다시 동북쪽으로 말을 돌려 만리장성을 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급하게 길을 재촉하다 마부 창대가 말발굽에 밟혔다. 창대는 발등이 크게 붓고 통증이 심했다. 연암은 직접 말을 몰았다. 혼자 말을 타고 강물에 들어갔다.

이끼가 낀 강바닥은 몹시 미끄러웠다. 무릎은 구부리고, 발은 모으고,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안장을 쥔 채 말의 배까지 물에 잠긴 강물을 한밤중에 아홉 번이나 건너야 했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넜다는 것은 강의 굴곡이 심한 탓이다.

“한 번만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강에 곤두박질한다. 물소리도 요란했다. 강물을 땅으로, 옷으로, 내 몸으로, 내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속으로 까짓것 한번 떨어질 것을 각오했다. 그러자 귓속의 강물 소리가 드디어 사라졌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데도 편안한 의자 위에 앉거나 안방에 누워서 생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에서야 ‘도’(道)가 무엇인지 깨달았도다!”

그는 ‘도’를 거창한 데서 찾지 않았다. “마음에 잡된 생각을 끊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는다. 육신의 귀와 눈만 믿는 사람은 보고, 듣는 것에 현혹되어 병을 얻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맹인의 눈에는 아무 위태로움이 보이지 않는데 무엇이 위험하단 말이오.” 연암은 눈을 감은 것이 위태로운 것이 아니라, 눈 하나만을 믿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위태로움이라고 말한다. 즉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오직 한 가지라고 믿는 것이 진짜 위태로움이다.

연암은 압록강을 넘으면서도 ‘도’를 이야기했다. 강과 언덕이 만나 이루는 경계, 너(彼)와 나(我)가 만나는 곳, 육체의 눈과 귀보다 마음의 눈(心眼)에 ‘도’가 있다는 것이다. 열하로 가는 촉박한 일정 속에서 연암은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연암이 깨달은 것은 ‘색즉시공’처럼 어려운 도(道)의 경지가 아니었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넘었다는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라는 명문이 나온 배경이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신임 관리의 행차(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 1786년. 모든 말에 말몰이꾼이 붙어있다. 조선 후기 양반들은 말 오른쪽과 왼쪽에 견마 잡이를 모두 세워 허세를 부렸다. 국립중앙박물관
단원 김홍도가 그린 신임 관리의 행차(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 1786년. 모든 말에 말몰이꾼이 붙어있다. 조선 후기 양반들은 말 오른쪽과 왼쪽에 견마 잡이를 모두 세워 허세를 부렸다. 국립중앙박물관

■ 연암이 지적한 조선의 여덟 가지 말(馬) 다루는 법

무사히 강을 건넌 다음 연암은 우리나라에서 말을 모는 방법의 8가지 문제점을 열거한다. 특히 옷소매가 넓고, 소매 끝이 긴 옷을 입고 말을 타는 것과 말몰이꾼에게 고삐를 잡게 하는 잘못된 관행을 꼬집는다. 소소한 일상에서 엄청난 통찰을 얻어내는 연암이 놀랍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말을 모는 방법이란 극히 위험하기 짝이 없다. ① 옷소매가 넓은 데다, 그 위에 긴 한삼(汗衫·손을 가리기 위해 소매 끝에 덧댄 천)까지 덧대었다. 마치 두 손을 휘감고 묶어 싼 셈이다. 그러니 말고삐를 잡고 채찍질하는 데 방해가 된다.

② 이런 불편한 복장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하여금 견마를 잡게 한다. 나라 안의 말이란 말은 모두 병신이 된 셈이다. 게다가 말몰이꾼이 언제나 말의 한쪽 눈을 가려서 말은 제 맘대로 걷지 못한다.

③ 말도 길에 나서면, 발굽을 딛기 좋은 곳을 살피는 버릇이 사람보다 더하다. 그런데도 말몰이꾼은 언제나 자신이 걷기 편한 자리를 찾아 나아가니, 말은 항상 옆으로 내몰리게 된다.

④ 말의 한쪽 눈은 이미 말몰이꾼에게 가려진 상태. 다른 쪽 눈은 말몰이꾼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때문에 말은 온전하게 길바닥을 볼 수 없다.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때도 있다. 말의 잘못이 아닌데도 사정없이 채찍을 함부로 친다.

⑤ 우리나라의 안장과 마구는 둔하고 육중하다. 굴레, 가슴걸이, 뱃대끈이 너무 거추장스럽다. 말 잔등에 이미 사람 하나를 태우고, 또 한편으로 입 재갈에 한 사람이 매달린 꼴이니, 말 한 필에 두 마리 몫의 짐을 지운 셈이다. 결국 말의 힘이 고갈되어 고꾸라질 판이다.

⑥ 사람이 몸 쓰는 버릇은 대체로 오른쪽이 왼쪽보다 낫다. 말도 마찬가지일 터. 그런데도 말의 오른쪽 입아귀는 재갈로 잡아 눌러 아파 못 배기도록 한다. 그 형세가 부득불 목을 아래로 꺾게 만들고 옆걸음을 해 채찍을 피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준마의 자태라고 좋아하지만, 말의 속 사정과 다르다.

⑦ 말은 항상 오른쪽 허벅다리에만 채찍을 맞으니 한쪽만 고통스럽다. 말을 타는 사람이 방심한 채 안장에 앉았다가는 큰일 난다. 말몰이꾼이 갑자기 말을 후려쳐서 자칫 사람이 떨어지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말 때문이라고 핑계대지만, 사실 말 탓이 아니다.

⑧ 문관, 무관을 막론하고 지위가 높은 이들은 말을 왼쪽에서 끄는 좌견(左牽)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게 무슨 법인가? 오른쪽 견마도 불가하거늘, 하물며 왼쪽 견마잡이라. 짧은 고삐도 안될 말인데 더구나 긴 고삐란 당찮은 짓이다.

여느 개인적인 행차에는 거드름을 피운다고 긴 고삐를 쓰기도 하겠지만, 임금을 호종하는 반열에 참여하면서 댓 발이나 늘어진 고삐로 위엄을 보이려 함은 옳지 않다. 문관도 불가할 터인데, 하물며 무관으로서 출전할 때 이런 치장을 한다는 것은 더구나 안 될 일이다. 이야말로 제 손으로 올가미를 차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

김홍도의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중 한 부분. 쓰개치마와 장의를 착용하고 견마잡이가 이끄는 말에 탄 여인들.
김홍도의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중 한 부분. 쓰개치마와 장의를 착용하고 견마잡이가 이끄는 말에 탄 여인들.

■ 징비록에 기록된 어처구니없는 조선 군관의 헛짓

연암은 류성룡의 <징비록>에 나오는 일화를 꺼내 반면교사로 든다. “임진왜란 때 이일 장군이 상주에 진을 쳤다. 멀리 숲속에 연기가 나는 것이 보여 사람을 보내 살피게 했다. 군관은 좌우에 쌍견마를 잡히고 거들먹거리며 갔다. 갑자기 다리 아래에 숨었던 왜놈 둘이 튀어나와 칼로 말의 배를 찌르고, 군관의 목을 베어버렸다. 서애 류성룡은 현명한 재상이다. 『징비록』이란 책을 지어 이 일을 지적해 비웃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난리와 어려움을 겪고도, 잘못된 풍습은 좀처럼 고칠 수가 없다. 심하도다! 한번 박힌 습속은 참으로 변하기 어렵구나.”

이일 휘하의 장교가 말고삐를 잡아 인도하는 견마잡이를 좌우에 둘이나 두고 으스대며 순찰 나갔다가, 일본군에게 목이 달아났다는 것. 이일은 1587년 이순신 장군이 북방 여진족에 맞서 싸울 때, 함경도북병사로 첫 백의종군을 야기한 장본인이다. 류성룡이 지적한 목이 달아난 군관은 박정호. 1592년 4월, 상주 전투 패전은 곧 험준한 문경 새재(조령)을 지키지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 이일은 신립 장군에게 도망갔다. 연암은 <징비록>까지 읽어 본 모양이다.

우리나라 사극을 보면, 대개 하인이나 견마잡이가 양반 행차에 말을 끌고 다닌다. 영·정조 시대를 지나며 필요할 때마다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 ‘말 렌터카 사업자’(세마꾼)가 생겼다.

조선 후기 양반들은 말몰이꾼을 세워 허세를 부렸다.
조선 후기 양반들은 말몰이꾼을 세워 허세를 부렸다.

오늘날 여객터미널이나 화물터미널인 ‘마방’(馬房)에서 말을 빌리면, 말몰이꾼 견마잡이가 따라붙는다. 견마잡이는 손님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세마꾼에게 말을 돌려주는 역할을 맡는다. 차를 빌리면 기사가 딸려 오는 격이다. 중국 사람은 견마잡이 없이 말을 탄다. 말을 탈 때 말몰이꾼을 두면 좋지 않다. 사람이 말을 타는 것은 힘들게 걷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말 탄 사람은 쉽게 가지만, 다른 사람은 힘들게 말을 끌고 가야 한다.

그리고 말은 빨리 달려야 하는데, 사람에게 늘 이끌리다 보면 그것에 적응해 버린다. 견마잡이가 고삐를 잡고 있기 때문에 말도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빨리 달려야 할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해 결국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연암의 제자 실학자 박제가 역시 견마잡이를 어리석은 짓이라며 비판했다.

■ 무슨 군복 소매가 너풀너풀하게 생겼단 말인가?

연암이 말 모는 법에 쓴소리를 뱉은 이유는 단순한 허세나 사치 풍조를 경계하는 차원이 아니다. 말 관리부터 새롭게 개선해야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그게 실용적이라는 의미다. 그러면서 무관의 군복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더 덧붙인다.

“무관들이 입는 군복을 소위 ‘철릭’이라 하는데, 세상에 무슨 놈의 군복 소매가 중의 장삼처럼 너풀너풀하게 생겼단 말인가? 대부분 문제가 넓은 소매와 긴 한삼 때문에 발생하련만, 그런데도 오히려 그 위험에 안주하고 있다. 휴! 안타깝도다. 비록 말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던 백락(伯樂)이란 사람에게 말고삐를 잡게 하고, 조보(造父)라는 사람에게 왼쪽에서 말을 끌게 하더라도 만약 이런 위험을 가진 채로 말을 몬다면 설령 팔준마(八駿馬)라도 필경 죽게 될 것이다.”

‘백락’은 중국 주나라 때 탁월한 말 감정사. 천리마를 알아보는 재주를 가졌다는 일화가 있다. ‘조보’는 주나라 목왕의 ‘팔준마’ 수레를 몰았던 마부. 팔준마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함께한 여덟 마리의 뛰어난 명마이기도 하다. 이성계는 팔준마 덕분에 숱한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고 나라까지 세우게 됐다.

조선의 말 모는 방법에서 주체인 말은 없다. 객체인 사람만 있다. 말을 알지도, 이해할 줄도, 믿을 줄도 모르고 오직 사람 중심이다. 말을 몬다고 하지만 가는 것은 말이다. 내가 아니다. 나도 말이 되어야 한다. 말이 불편하지 않아야 사람도 위험하지 않다. 주객이 전도되면 말도, 사람도 다 죽인다.

연암의 생각은 “나는 말을 믿고, 말인즉 제 발굽을 믿고, 발굽인즉 땅바닥을 믿은 것”이다. 이 같은 이치는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위정자가 국민을 통치하거나, 장수가 부하를 통솔하거나, 교사가 학생을 지도하거나, 부모가 자식을 양육할 때도 마찬가지. 백성이 행복해야 임금도 편안하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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