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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패션계의 학획을 그으신ㅜㄴ
대한민국에서 정말 패션계에서 정말 유명하게 성공하며 다른나라에서도 굉장히 인정받는 진짜 대한민국 패션디자이너하먄 떠오르는 1인자는 누구인가요?그리고 그분의 업적이나 출생등 많은정보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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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flow****
작성일2021.01.06 조회수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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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동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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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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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올바른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지나가는동네형입니다.

고인도 괜찮다면 당연히 앙드레김 선생님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명

김봉남(金鳳男)

출생

사망

2010년 8월 12일 (향년 74세)

본관

개령 김씨

신체

178cm

학력

한영고등학교 국제 복장학원 1기 졸업

종교

브랜드

André Kim

수상 내역

2011

제55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특별공로상

2011

불기 2555년 불자대상

2010

코리아 라이프스타일 어워드 올해의 패션디자인 공로상

2010

제3회 스타일 아이콘 어워즈 특별상

2010

금관문화훈장

2009

아시아 모델 페스티벌 어워즈 국제문화교류 공로상

2008

보관문화훈장

2007

제7회 자랑스런한국인대상 패션디자인부문

2005

제3회 동아 TV 패션뷰티상 외교통상부장관상

2005

제1회 한국복식학회상

2005

제39회 납세의 날 국무총리표창

2000

MBC 명예의 전당(무대예술부문)

2000

프랑스정부 예술문학훈장

1998

제3회 엘르 패션인대상

1997

화관문화훈장

1982

이탈리아 대통령 문화공로훈장

대한민국의 패션 디자이너. 성은 김씨지만 대개 앙샘이라고 부른다.

'앙드레'라는 이름은 '외국인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며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지어줬다. 영어 앤드루(Andrew)에 대응되는 프랑스어 이름.

흰색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평소에도 흰 옷을 입고 다녔으며, 타고 다니던 자동차도 기사가 딸린 흰색 현대 에쿠스를 타다 이후 흰색 벤츠 S500으로 바꾸었으며[3] 생전 자신의 방을 공개했을 때는 옷장에 평소 입는 흰 옷이 수십 벌 걸려있는 모양이 나왔을 정도. 자신의 자서전은 물론이요 의상 디자인에도 흰색을 많이 썼다. 이 때문에 흰색증이라고 까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백의민족이라는 한국인의 컨셉을 나타냈다는 평이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흰색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백의민족하고는 전혀 상관없잖아;; 80년대에 똑같은 디자인의 검은 옷을 입고 방송에 출연한 사진이 있다.

사실 흰색에 대한 집착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늘 자식들에게 순백색의 옷을 입혔다. 그런 그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앙드레 김은 매일 밤 베개를 적실 만큼 울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는 흰색의 옷에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즉 앙드레 김에게 흰색은 변하지 않는 순수함의 상징이자, 어머니의 사랑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흰 옷에 얼룩이 묻기라도 하면 진저리를 치며 곧바로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흰색에 집착했다. 그리고 현명한 예술가로서, 그는 자신의 흰색에 대한 애착을 아름답게 승화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영원한 순수함의 상징인 순백의 웨딩드레스였다. 앙드레 김의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은 결혼하는 신부에 대한 축복으로 승화된 것이다.

흔히 앙드레 김의 옷은 일반인들은 소화하기 힘들 거라는 의견도 많지만, 강남구에 있는 작업실에 가면 의외로 입을 만한 옷들도 있다. 웨딩드레스는 약간의 철면(…)이 있다면 입어볼 만한 수준의 작품. 물론 상당한 고가이지만.

화려한 의상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용복 입장에서 봐도 앙드레 김의 작품은 매우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앙드레 김은 정부사업에도 많이 참여했는데 그 예로 1988 서울 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유니폼이 있다.

앙드레 김 선생이 디자인한 상품들에 붙는 브랜드 André Kim. 앙드레 김 사후 현재까지 아들 김중도 씨가 대표로 있는 앙드레 김 아뜰리에가 디자인실에서 제작한 옷을 전문으로 생산하고 있고 실질적인 앙드레 김과 관련된 곳은 이곳이 끝. 다만 앙드레 김 브랜드를 널리 알리고자 일부 사업에 라이센싱 방식으로 브랜드를 빌려주고 있다. 벽지, 타올, 우산, 속옷, 화장품 등에 앙드레 김 이름이 박혀있다면 100% 라이센싱. 다만 앙드레 김 골프 웨어의 경우 부도나면서 앙드레 김 브랜드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현재는 그의 고향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있지만 '서울 사람'이 아닌 '고양 사람'이라는 지역 정체성을 가졌다.[4]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고, 다섯 남매와 함께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땅바닥에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며 놀았는데 고양중학교 재학 때부터는 미술 자체에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가 있던 시절, 극장에서 외국 영화[5]를 접하며 배우들의 패션에 강하게 매료되고 본격적으로 의상과 관련해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본래의 장래 희망은 배우였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 예술로서의 패션을 가르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외국 책을 뒤지면서 독학을 하다 1961년 국제 복장학원이 문을 열면서 1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나라 남성 디자이너 1호[6]란 말을 들으며 의상실을 열고 반도호텔[7]에서 첫 패션쇼를 열었다.

척박한 대한민국의 패션계에 이미 1960년대부터 돌풍을 불러오며 패션계를 이끌어 온 공로가 있다. 2010년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권위있는 패션 쇼나 시상식 등에는 항상 등장하며 그 위용을 과시했다.

사실 해외 쪽에서는 워낙에 뛰어난 의상 디자이너들이 많은지라 지명도는 뒤지지만, 한국에서는 일단 패션 디자이너의 대명사.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였기 때문이다. 다만, 앙드레 김 본인은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2010년 8월 12일 19시 40분 경, 대장암이 악화되어 숨을 거뒀다. 향년 74세.(관련기사) 사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별세로 인해 "대한민국 패션계가 텅 비었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말년에 그는 거동이 불편해져서 신사동에 있던 자신의 의상실로 출근할 때 주변에서 거들어 주는 사람이 2명이나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TV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하지 않았지만, 힘든 투병 생활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앙드레 김이 생전에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장례식도 불교식으로 치러졌다. 장지는 천안공원묘원이며, 모델 박영선TV조선의 프로그램인 인생다큐-마이웨이에 출연했을 때 그의 묘소를 찾는 모습이 나갔다.

고양군 출신이라 자신의 고향은 서울이 아닌 고양군이라고 했으나 그의 말투는 서울 사투리를 잘 사용했었다.[8] 사실 경기 중북부 방언이나 서울 방언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

잘보면 조빈과 비슷하게 생겼다.

한국의 대중들은 앙드레 김을 알게 된 것이 그의 패션 디자인이 아니라, 여러 매스컴에의 출연과 연예인들이 출연한 패션쇼, 그리고 남녀 커플이 함께 하는 유명한 패션쇼의 피날레 때문인 것이 사실일 것이다. 사실 앙드레김 옷 디자인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은 편이며, 일부에서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혹평도 있다.

옹호하는 측에서는 앙드레김의 옷은 패션으로써 보는 게 아니라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들로는, 일단 앙드레 김의 옷은 슬림화라든지 디테일이라든지 테일러링이라든지 하는 세계적인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있다. 예로 앙드레 김 패션쇼에서의 김연아의 옷(참고자료)을 들 수 있다. 물론 같은 것을 반대 시각에서는 늘 거기서 거기인 비슷한 디자인에서 탈피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앙드레 김은 "자신의 옷을 상품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패션을 상품화하고 돈과 연결시키는 것을 싫어했다. 그 때문에 앙드레 김이 만든 옷은 노출이 없다. 그리고, "남성 디자이너 1호"라는 수식어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게다가,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여는 서울 패션위크에 참가한 경력이 없다. 대신 지자체나 기업의 후원을 받아 비정기적으로 자주 패션쇼를 열었다. 여는 횟수는 1년에 약 10여회. 일반적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1년에 2번 패션쇼를 여는 것에 비교하면 매우 많다. 이런 것들을 보면 앙드레 김의 패션은 프레타 포르테[9]보단 오트 꾸튀르[10]의 특징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입원단을 절대 쓰지않고 국산원단만을 고집하는 등,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지는 서양문화 선호적인 이미지(아마도 영어를 자주 써서)와는 달리 한국적인 면이 많았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겹옷 드레스 (8~9벌 가량의 여러벌의 드레스를 겹쳐 입는 것)은 한국여성의 을 상징한다고 밝힌 적도 있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는 해외의 스타들에게 옷을 디자인해서 주기도 했는데,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 실즈같은 유명 배우도 포함된다. 또한 마이클 잭슨이 생전 그의 옷을 특히 좋아했다고 하는데, 화려한 무늬의 자수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유명한 시상식에는 물론이요, 외출할 때도 입고 나갔다. 특히 잭슨의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던 This Is It 콘서트 발표회 때 입었던 옷(참고자료)이 바로 앙드레 김의 의상이다.

실제로 잭슨은 앙드레 김에게 자신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앙드레 김이 '자신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기에 한 가수의 전속이 될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다만 그를 위해서 매년 맞춤복을 보내줬다고 한다.

- 출처 네이버,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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