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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4대영웅 좀 알려주세요 !! 급함 ㅠㅠㅠㅠ

6.25전쟁 4대영웅

 

 

에 대해 알아오라는데 검색해봐도 나오질 않네요ㅠㅠ

 

좀 알려주세요ㅠㅠ

 

급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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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8.02.27 조회수 2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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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bb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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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4대영웅은 김동석대령 북파공작원대부 , 맥아더장군 , 리지웨이장군 , 백선엽 장군입니다...

 

1. 김동석 대령
   6.25 전쟁 발발시부터 휴전후 5.16 혁명까지 육군 특수부대를 직접 지휘한 후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김동석 전 지사의 회고록. 특히 현역시절 '북파 공작원의 대부'로 불린 그 답게 그동안 숨겨졌던 북파 공작원의 비화를 생생하게 담았다. 6.25 전쟁기간 중에도 적의 내부로 투입되어 공작과 첩보전을 실행했고 휴전 후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전까지 적진에 투입된 북파 공작원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가수 진미령씨의 아버지이기도 한 김동석 전 지사는 항상 가정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였다. 북파 공작원들의 대부로 후배들로부터 귀감을 사고 있으며 직업군인으로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예편후 지방행정 관료로서 역할을 다했다.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전개되어 온 이런 저자의 삶을 담담히 담았다.

 

2. 맥아더 장군 Douglas MacArthur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 전세를 역전시켜 적을 한만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그는 만주폭격과 중국연안봉쇄, 대만의 국부군(國府軍)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귀국 후에는 레밍턴 랜드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보수파(保守派)에 속하여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3. 리지웨이 장군 (Matthew Bunker Ridgway)
   버지니아에서 태어났다. D.맥아더의 뒤를 이어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도쿄[東京]에 주재하였다. 1917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공수군단을 이끌고 각지에서 싸웠다. 특히 1943년 7월 시칠리아섬 공략에서는 미국 육군사상 최초의 대공수 강습작전을 감행하였다. 1950년 6·25전쟁에서는 중공군의 공세를 만나자 미 제8군을 이끌고 남한을 수복, 1951년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년 뒤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1953년 미육군 참모총장을 역임, 1955년에 퇴역하였다.
 
4. 백선엽 장군
   1950년 6월 25일에 다른 고급장교들처럼 서울에 있었던 백선엽은 급거 귀대하여 사단을 지휘하였으나,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조선군에 밀려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퇴하면서도 사단 편제는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개전 초기 한국군 전방 사단 중에서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백선엽 대령의 1사단과 김종오 대령의 6사단(춘천 주둔)이 유일하였다. 대구로 후퇴하던 중 이 공로로 백선엽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한다.

미국이 북조선 및 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때 백선엽은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군단장으로 다시 강릉으로 부임하였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한국군 최초로 현대화된 1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기존에도 1군단이 있었으나, 동부전선에서 졸전 끝에 괴멸하자 해체된 바 있다(이후 한동안 한국군 사단들은 군단급 이상 사령부 없이 미군 각 군단에 분산배치되기도 하였다). 1952년 4월에는 제2 군단장을 맡았으며, 1952년 7월, 육군 참모총장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군 근대화를 위한 미국 군사유학 강화(본인 자신도 포트 베닝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옴), 10개 사단 증설(11사단 ~ 20사단) 등을 추진하였다.

1954년에 1야전군 사령관을 잠시 지내다가, 1957년에 다시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59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 한국군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그러나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장교들에 의한 청군 운동으로 비난과 압력을 받아 1960년 5월 31일 퇴역했다.

 

사실 더 많은 내용들이 있는데 요약해서 대략 이정도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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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좌진  석호필 바께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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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인사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

한국전쟁 4대영웅은 김동석대령 북파공작원대부 , 맥아더장군 , 리지웨이장군 , 백선엽 장군입니다...

 

1. 김동석 대령
   6.25 전쟁 발발시부터 휴전후 5.16 혁명까지 육군 특수부대를 직접 지휘한 후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김동석 전 지사의 회고록. 특히 현역시절 '북파 공작원의 대부'로 불린 그 답게 그동안 숨겨졌던 북파 공작원의 비화를 생생하게 담았다. 6.25 전쟁기간 중에도 적의 내부로 투입되어 공작과 첩보전을 실행했고 휴전 후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전까지 적진에 투입된 북파 공작원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가수 진미령씨의 아버지이기도 한 김동석 전 지사는 항상 가정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였다. 북파 공작원들의 대부로 후배들로부터 귀감을 사고 있으며 직업군인으로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예편후 지방행정 관료로서 역할을 다했다.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전개되어 온 이런 저자의 삶을 담담히 담았다.

 

2. 맥아더 장군 Douglas MacArthur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 전세를 역전시켜 적을 한만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그는 만주폭격과 중국연안봉쇄, 대만의 국부군(國府軍)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귀국 후에는 레밍턴 랜드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보수파(保守派)에 속하여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3. 리지웨이 장군 (Matthew Bunker Ridgway)
   버지니아에서 태어났다. D.맥아더의 뒤를 이어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도쿄[東京]에 주재하였다. 1917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공수군단을 이끌고 각지에서 싸웠다. 특히 1943년 7월 시칠리아섬 공략에서는 미국 육군사상 최초의 대공수 강습작전을 감행하였다. 1950년 6·25전쟁에서는 중공군의 공세를 만나자 미 제8군을 이끌고 남한을 수복, 1951년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년 뒤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1953년 미육군 참모총장을 역임, 1955년에 퇴역하였다.
 
4. 백선엽 장군
   1950년 6월 25일에 다른 고급장교들처럼 서울에 있었던 백선엽은 급거 귀대하여 사단을 지휘하였으나,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조선군에 밀려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퇴하면서도 사단 편제는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개전 초기 한국군 전방 사단 중에서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백선엽 대령의 1사단과 김종오 대령의 6사단(춘천 주둔)이 유일하였다. 대구로 후퇴하던 중 이 공로로 백선엽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한다.

미국이 북조선 및 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때 백선엽은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군단장으로 다시 강릉으로 부임하였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한국군 최초로 현대화된 1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기존에도 1군단이 있었으나, 동부전선에서 졸전 끝에 괴멸하자 해체된 바 있다(이후 한동안 한국군 사단들은 군단급 이상 사령부 없이 미군 각 군단에 분산배치되기도 하였다). 1952년 4월에는 제2 군단장을 맡았으며, 1952년 7월, 육군 참모총장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군 근대화를 위한 미국 군사유학 강화(본인 자신도 포트 베닝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옴), 10개 사단 증설(11사단 ~ 20사단) 등을 추진하였다.

1954년에 1야전군 사령관을 잠시 지내다가, 1957년에 다시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59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 한국군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그러나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장교들에 의한 청군 운동으로 비난과 압력을 받아 1960년 5월 31일 퇴역했다.

 

사실 더 많은 내용들이 있는데 요약해서 대략 이정도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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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동석 대령
   6.25 전쟁 발발시부터 휴전후 5.16 혁명까지 육군 특수부대를 직접 지휘한 후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김동석 전 지사의 회고록. 특히 현역시절 '북파 공작원의 대부'로 불린 그 답게 그동안 숨겨졌던 북파 공작원의 비화를 생생하게 담았다. 6.25 전쟁기간 중에도 적의 내부로 투입되어 공작과 첩보전을 실행했고 휴전 후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전까지 적진에 투입된 북파 공작원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가수 진미령씨의 아버지이기도 한 김동석 전 지사는 항상 가정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였다. 북파 공작원들의 대부로 후배들로부터 귀감을 사고 있으며 직업군인으로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예편후 지방행정 관료로서 역할을 다했다.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전개되어 온 이런 저자의 삶을 담담히 담았다.

 

2. 맥아더 장군 Douglas MacArthur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 전세를 역전시켜 적을 한만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그는 만주폭격과 중국연안봉쇄, 대만의 국부군(國府軍)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귀국 후에는 레밍턴 랜드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보수파(保守派)에 속하여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3. 리지웨이 장군 (Matthew Bunker Ridgway)
   버지니아에서 태어났다. D.맥아더의 뒤를 이어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도쿄[東京]에 주재하였다. 1917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공수군단을 이끌고 각지에서 싸웠다. 특히 1943년 7월 시칠리아섬 공략에서는 미국 육군사상 최초의 대공수 강습작전을 감행하였다. 1950년 6·25전쟁에서는 중공군의 공세를 만나자 미 제8군을 이끌고 남한을 수복, 1951년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년 뒤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1953년 미육군 참모총장을 역임, 1955년에 퇴역하였다.
 
4. 백선엽 장군
   1950년 6월 25일에 다른 고급장교들처럼 서울에 있었던 백선엽은 급거 귀대하여 사단을 지휘하였으나,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조선군에 밀려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퇴하면서도 사단 편제는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개전 초기 한국군 전방 사단 중에서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백선엽 대령의 1사단과 김종오 대령의 6사단(춘천 주둔)이 유일하였다. 대구로 후퇴하던 중 이 공로로 백선엽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한다.

미국이 북조선 및 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때 백선엽은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군단장으로 다시 강릉으로 부임하였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한국군 최초로 현대화된 1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기존에도 1군단이 있었으나, 동부전선에서 졸전 끝에 괴멸하자 해체된 바 있다(이후 한동안 한국군 사단들은 군단급 이상 사령부 없이 미군 각 군단에 분산배치되기도 하였다). 1952년 4월에는 제2 군단장을 맡았으며, 1952년 7월, 육군 참모총장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군 근대화를 위한 미국 군사유학 강화(본인 자신도 포트 베닝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옴), 10개 사단 증설(11사단 ~ 20사단) 등을 추진하였다.

1954년에 1야전군 사령관을 잠시 지내다가, 1957년에 다시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59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 한국군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그러나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장교들에 의한 청군 운동으로 비난과 압력을 받아 1960년 5월 31일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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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한국에게 이러는 이유는 바로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가  26일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 김학송 의원이 북한이 소형 핵폭탄을 만들어 한국을 핵공격한다면 한국군은 어떻게 대응하겠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는 북한이 한국을 핵공격할 기미가 보이면 북한의 핵무기 시설을 선제 공격으로 북한의 핵기지를 타격한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그리고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는 NLL(북방 한계선)은 반드시 지켜내야 할 선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기에 열 받은 북한 인민국 해군사령부 대변인은 NLL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제가 북한의 이야기도 받아들이지 않고 강제로 만든 가상의 선이라며 즉 유령선이라며 답변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의 영해에 기어들어 돌아치고 있는 남조선군 전투함선들의 무모한 군사적 도발행위를 결코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하였다. 여기서 한국해군의 전투함정 어느 한척이라도 북한의 영해에 침범한 적이 없다. 북한군은 한국군이 15척이상이 때거지로 북측영해에 침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태영 합참의장이 청문회에서 한 "NLL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내야할 선"이라고 언급한 것을 거론하면서 "남조선군 호전광들은우리의 인내와 자제력을 오판하지 말고 우리측 영해 침범행위를 당장 중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북한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또한 북한은 28일 서해에서 남측방향이 아닌 북측방향으로 사정거리 48km인 함대함미사일을 3발을 발사했습니다. 이사건은 개성공단의 우리 당국자 철수조치에 이어 외교·국방 전방위로 압박에 나섰다. 북한이 27일 개성 공단에서 우리 당국자 11명을 철수시킨 지 불과 하루 만이다. 북한의 평상시 훈련은 5~6월 달이지만 북한이 3월달에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국방부 관계자들은 북한의 평상시 훈련 즉 미사일의 성능향상, 훈련에 대한 일종이라며 말했다. 하지만 군사전문가들은 이명박정부에 태도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북한은 김태영 합찹의장 내정자가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현재 진행중인 남북문제를 전면 중단한다는 막강한 카드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국방부관계자는 북한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것도 없으며 북한에 말을 들을 필요없다는 식의 말을 통해 북한 답변에 대한 쐐기를 박았다. 현재 북한은 또다시 남북간에 긴장감을 조성시키고 있지만 우리군에게는 단호한 대처와 유사시 처절한 응징만 있을 뿐이다. 한국해군은 만약에 사태를 대비해 일격필살의 정신으로 대기하고 있다. 유사시 제2차한국전쟁이 발발시 미군은 선제공격을 제1원칙으로 밀고 나갈겁니다. 북한이 도발할 위험이 높아지는 순간 5시간정도 이전에 괌에 있는 미공군 엔더슨 공군기지에서 B2폭격기 4대정도가 긴급출격 북한에 대공망을 뚫고 북한에 위험한 핵발사장소 및 핵시설등을 일제히 대규모 폭격작전을 실시합니다. 그리고 후방지원인 10여대에 B1,B2 스텔스 폭격기들과 20여대의 F-15전투기들을 동원 정해진 지상 타격물을 일제히 폭격한다. 그리고 서해와 동해로 이동한 미해군의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6대의 항공모함전단들이 전원 전투태세에 돌입 400~500발정도의 토마호크 미사일들을 북한지역에 발사한다. 미해군의 항모전단은 선발부대와 후방지원부대로 나뉘어 작전을 시행한다. 차후 대서양함대에 소속된 항모전단들도 서해와 동해로 이동 작전에 참가한다. 미국은 2003년 발생한 이라크전쟁에 500여대의 헬기를 포함한 항공기 1600여대의 공중전력과 항모 7척, 함정 120여척, 항공기 480대로 구성된 해상전력이 투입됐었다. 현재 전쟁이 발생한다면 아직 군사작전권이 미국에게 있어 미국은 미 본토에서 대규모 지상부대와 공군부대를 파병한다. 그 규모는 육군병력 약70만명, 공군전투기 병력 2000대등이다. 그외 주일미군(일본 오키나와와 카데나,미사와, 요코다)을 한국으로 파병합니다. 주일미군 같은 경우 육해공해병대 병력이다. 주일미군은 발발시 2주내로 투입이 가능하며 미 본토에서 투입될 병력들은 90일내로 작전이 가능하다.
작전종료는 빠르면 6개월이며 길어야 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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