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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세계로 진출한 우리나라인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8,368 작성일200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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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백남준 : ~~~~~~~~~~~였다

조수미 : ~~

이런식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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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n****
수호신
세계사 24위, 한국사 69위, 사회학 1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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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진출한 한국인들

 

 

 

환경운동으로 우뚝 선 재미 한국인 대니 서(Danny Seo)
자세히 말하자면...
지구를 지켜낸 아름다운 실천가로서 공헌이 크데요...
지난 10년간 미국의 주요 신문과 방송, 잡지 등에 500여 회나 소개되었으며, 지난 1995년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인간 존엄상'과 `올해의 젊은이상'을 수상했죠. 또 1998년에는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되기도 했죠.
대니서는 1997년에 청소년들을 위한 환경보호, 나아가 시민운동의 길을 안내한 핸드북 '행동하는 세대'에 이어 1999년에는 자신의 체험과 환경운동, 그리고 시민운동의 이념과 실천 방법을 엮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등의 책을 써서 환경운동 지도자와 전문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대요.
그 사람은 어렸을 때 한국계 이민 가정의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 중부의 완만한 농지인 레딩의 변두리에서 성장했죠.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 지역 병원에 일자리를 구해 가족과 함께 병원 근처로 이주했죠.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들을 길렀고, 대니를 우체국이나 시위장까지 차로 데려다 주면서 그가 꼬마 활동가가 되는 데 도움을 줬대요.
그래서 그가 환경운동가인지 채식주의자고 지갑을 가지고 있지 않대요.
자세한 정보는 http://www.yonhapnews.net/services로 찾아가세요.
두번째 인물도 그 사이트에 가서 찾을 수 있는데...
재미한인학교협의회 회장 방정웅
한인2세래요.
그 동안 미주 한인사회와 미국 학교들의 교육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해온 데 비해 한인 2세들을 위한 교육과 교재 개발은 이를 따르지 못해 왔죠. 특히 현지 실정에 맞는 교재의 개발이 절실함에도 재정 부족으로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죠. 미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1천여 개의 한글학교들이 모인 연합회인 재미한인학교협의회(The National Association for Korean Schools)의 방정웅(56세) 회장은 지난 1998년 8월 회장을 맡은 이후 한글학교의 내실화를 위해 학술대회와 교재 개발에 열성을 다했대요.
방정웅 회장은 서울의 연세대학교 수학과를 나와 수학교사로 오래 봉직하셨죠. 그러나 그는 1981년 8월에 15년간의 교사생활을 마감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죠. 40세의 만학도로 아내와 딸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셈이죠. 가족이 딸린 가장의 입장에서 시작한 유학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문제였죠. 미국의 영어훈련원에서부터 학업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유학생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다고 하네요.
그 사람은 앞서 말한 한글학교 활동 외에도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남선교회 연합회 서기, 부회장, 회장을 차례로 역임했으며, 현재 미국 달라스 빛내리교회의 장로로 시무하면서 교육부장으로, 교회 월간회보의 편집장으로, 전산부-인터넷 부장으로, 선교부장으로 각각 봉사해오고 계시대요.
그리고 제가 마지막으로 뽑아온 자료 최연소자 윤송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연소로 박사학위를 받아 세계를 놀라게 한 윤송이 SK 와이더덴 닷컴 이사, 로버트 융인 텔 최고기술책임자가 되었다는 이 최연소자를 빼먹을 수는 없다는 거죠.
약력을 보자면 이런 과정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거죠.
△1975년 서울 출생 △93년 서울 과학고 졸업 △96년 KAIST 학사 △9 6년 미 MIT대 미디어 랩 입학 △2000년 MIT 미디어랩 박사 △2000년 맥킨지 컨설턴트
윤씨의 굉장한 집중력을 드러내는 예는 이뿐만이 아니죠. MIT 미디어랩에서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6명이 팀을 이루는 프로젝트가 있었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기간 동안 그와 나머지 5명의 학생들은 실험실에 붙박혀 하루 20시간을 꼬박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죠. 그를 제외하면 전부 체구가 그의 두배는 될 만한 건장한 장정들이었죠. 20시간을 공부에 매달렸다고 나머지 4시간을 온전히 수면시간으로 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죠. 하루 2시간만 쪼개서 자는 강행군이 석달째 계속됐죠. 놀라운 집중력과 근성으로 버텨낸 윤씨는 프로젝트 결과물이 나오는 날, 그만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어요. 의사의 진단은 수면부족과 과로. 1주일 동안 입원한 그는 내리 잠만 자는 걸로 체력을 회복했다고 해요. 그는 예능쪽에도 재능이 많다고 해요. 여성동아 2001년 12월호 내용 부분

“원래 예술중학교에 갈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예술중고교에는 과학 실험실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어, 그러면 곤란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실험실 없는 학교에서 3년을 견딜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포기했죠(웃음).”

어릴 적 윤송이는 과학을 너무나 좋아하는 별난 소녀였다. 야산에서 곤충 채집한다고 8시간 동안 돌아다니는 건 약과였다. 부모님을 졸라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집에 자신만의 실험실을 만들었던 그. 비커, 플라스크, 현미경 등 온갖 실험기구들을 구해서 집안에서 이것 저것 탐구하고 실험하는 게 그렇게 재밌었다고 한다.

정말 훌륭하지 않습니까?
자세한 정보는 http://www2.donga.com가서 찾아서 보세요!

 

 

 



1967년 4월 24일 서울 출생. 167㎝, 49㎏

79년 선화 예술중학교 입학, 한국 고전무용 전공

선화 예중 1학년 때 발레 시작



82년 선화 예고 1학년 재학 중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로 유학

85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 동양인 최초로 1위 입상

86년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 졸업

세계 5대 발레단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최연소 입단



87년 입단 1년만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요정 역으로 첫 데뷔

92년 <춤의 해> 내한 - '로미오와 줄리엣' 2인무, 'Les Nuages' 공연

93년 1월 입단 7년만에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서 줄리엣 역으로 첫 주역 데뷔

6월 빈국립발레단의 객원 주역무용수로 '마타 하리',

9월 베자르의 발레 '마술피리' 주역

94년 10월 세종문화회관 슈투트가르트발레단 내한공연 '로미오와 줄리엣' 주역

95-96 시즌 '잠자는 숲속의 공주' 주역



96-97 시즌 '오네긴' 주역 타티아나로 프리마 발레리나(principal dancer/etoile) 등극.

96년 8월 유니버설 발레단 초청으로 내한, '지젤', 'Les Nuages' 공연

97년 3월 국립발레단 초청으로 내한, '노틀담의 곱추' 공연


98년 7월 '오네긴','로미오와 줄리엣' 으로 성공적인 미국 데뷔

98-99 시즌 '춘희' 대성공

98년 문화관광부 선정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99년 4월 'Benois de la Danse'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 수상

99년 9월 내한, '99 한국을 빛낸 발레스타' 공연 참가

99년 10월 대한민국 보관 문화훈장 수여



그 외에...



2000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될 '세계 춤 2000' 행사 참가 예정이었으나..

2000년 9월 1일-4일 국립발레단 초청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예정이었으나..

2001년 3월 KBS에서 수여하는 예술가 상 수상 예정

2001년 7월 한국을 빛낸 발레스타 갈라 공연 참가 예정

2002년 월드컵 기념 공연으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함께 내한을 추진 중


[MX]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주역 무용수 강수진


-'이제는 한국에서 발레가 온다'-

순수한 마음으로 외길을 간다. 금전운 매우 좋은 편. 황소자리 별의 운(1967년 4월24일생)으로 태어난 강수진의 평생운세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주역무용수 강수진. 별자리 운세처럼 19년 동안 한길만을 걸어와 세계 정상의 무용수로 우뚝 섰다. 하지만 그는 외롭다. 정상에 서고 나면 엄습해오는 고독감. 더이상 그 또래에선 경쟁할 라이벌도 거의 없다.

뛰어난 테크닉과 무대에서의 체취, 타고난 미모 등 발레리나로서 3박자를 완벽히 갖췄다. 관객을 빨아들이는 깊고 큰 눈, 시원한 입술, 발레리나들이 부러워하는 유난히 긴 팔과 다리 등 동서양의 특징이 이상적으로 배합된 외모도 「강수진 신드롬」을 거들었다.

지난 5월 무용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브노아 드 라 당스」에서 최우수 여성무용수로 선정되면서 그의 위상이 확고해졌다. 모스크바 국제무용협회 주최로 전세계 직업무용단의 주역급 무용수들을 대상으로 그 해에 가장 뛰어난 활동을 펼친 무용수·안무가·무용음악가 등을 시상하는 제전. 강수진은 98년에 세계 최고의 활약을 보인 「무용의 여왕」으로 등극하며 재능을 공인받은 것이다.

최고의 스타가 되고 국내외 공연 등으로 바빠지지만 그가 느끼는 정상의 고독은 진해만 간다. 마치 새장 안에 갇힌 아름다운 새처럼 . 그럴 때마다 그를 위로해주는 달콤한 추억의 조각들. 세계 3대 발레콩쿠르인 로잔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1등을 차지하던 순간, 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연소로 입단해 파란을 일으킨 일, 그러나 이내 시작된 4년 동안의 무명생활, 군무 뒷줄에서 줄반장으로 승진(?)하던 날, 입단 4년만에 솔리스트로 뽑혀 기뻐하던 날…. 그리고 93년 드디어 세계 5대 발레단인 슈투트가르트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서 줄리엣으로 출연하던 첫날은 천하를 얻은듯 감격스러웠다.

그중에서도 강수진이 가장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무대는 지난 90년 솔리스트 데뷔무대였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 마녀의 저주를 풀기 위해 등장한 다섯 요정 중에서 루비의 요정. 처음으로 솔로춤을 출 때의 떨림. 물론 이제는 키스를 받고 깨어나는 공주로 출연하지만 그때의 흥분과 감격보단 못하다.

사실 그의 전공은 발레가 아니었다. 『선화예중에 한국무용 전공으로 입학했죠. 중1때 어머님께서 발레로 전공을 바꾸라고 권하시는 바람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됐답니다』. 어머니는 근대회화사의 거장이자 한국의 「로트렉」으로 불렸던 화가 구본웅의 딸. 당시만 해도 국내에선 비인기 예술이었던 정통발레를 선택한 배경이 짚어지는 대목이다.

몇달 후.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교장인 마리카 베소브라소바가 선화예중을 방문했는데 남들보다 발레를 늦게 시작한 강수진만을 지정해 유학을 권했다. 『선화예중 외국인 발레교사가 아버지께 「10만명의 발레리나 중에 한명 나오는 천재가 당신 딸」이라며 유학을 권하셨어요』. 멋모르고 시작한 4년간의 힘든 유학생활. 그러나 어리고 내성적인 소녀의 적응력은 엄청나게 강했다. 『베소브라소바 교장은 저를 딸처럼 생각했어요. 그분 집에서 재우고 공연장이든 어디든 저에게 도움이 되는 곳에는 꼭 데리고 가셨죠』. 각별한 사랑이었다. 강수진 이후 한국 학생들의 모나코 왕립학교 유학이 이어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만큼 교장선생은 「있는 사랑」을 몽땅 그에게 주어버렸다. 요즘도 80세의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수진의 유럽공연에는 꼭 모습을 드러낸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도 강수진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70명 단원을 사로잡았다. 발레단 예술감독이었던 막시아 하이데는 자신이 입었던 줄리엣 의상과 반지를 물려줄 만큼 그를 아꼈다. 현지 언론도 그를 발레단 예술감독 후보로 지명할 정도였다.

강수진 발레의 특징은 내면의 섬세한 연기로 주인공의 성격을 생생히 부각시키는 것. 타고난 신체조건(167㎝ 49㎏)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하루 10시간 이상, 심지어 19시간까지 강행하는 연습이 「오늘의 강수진」을 가능케 했다. 「외길에 대한 집념」. 바로 240년 역사의 유서깊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지난 1일부터 6일까지 한국에서 공연중인 「99 한국을 빛낸 발레스타」에서는 「브노아 드 라 당스」 노미네이트 작품인 「카멜리아 레이디(춘희)」 중 2막 파드되(2인무)를 선보인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발레화한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 마그리트(오페라에서는 「비올레타」역)가 죽기 직전 연인을 만나 추는 처절한 2인무. 공연첫날 강수진은 신들린듯한 연기와 농염한 춤으로 관객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공연 후에는 빨리 독일로 가야 한다. 9일 각 전문분야의 대표주자가 모이는 「슈투트가르트 컨퍼런스」에 독일무용계 대표로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강수진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슈투트가르트 거리를 누비는 15번 전차는 강수진의 사진으로 덮여 있다. 문화진흥 공익광고 모델이기 때문이다. 또 슈투트가르트 난(蘭)협회는 새로 개발한 서양란 품종을 「강수진」으로 명명했다. 슈투트가르트대학 출판사에서는 지난 5월 각 분야의 전문인을 다룬 책 「아르바이트」를 출간했는데 여기에 무용계 대표로 강수진이 나왔다. CF 모델도 한다. 세계적인 브랜드 「페라가모」(옷로비사건으로 잘 알려진 브랜드) 99 가을패션 모델로 활약한다. 9,000마르크(약 5백50만원)의 월급을 받지만 쓸 시간이 없다. 발레단에서 걸어서 3분 거리인 오반시타세의 40평 아파트 할부금이 나갈 뿐. 상시 복용하는 인삼정(錠)도 서울집에서 보내온다.

『무엇이 되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죠. 앞으로는 제가 배운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좋은 발레 선생님이 되고 싶거든요』.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와 발레 꿈나무를 키우고 그들의 국제무대 진출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한다.



-[취재수첩]“국제수준 한국발레, 이젠 세계에 알릴때”-

90년대 한국발레의 위상은 강수진의 슈투트가르트 입성 후 크게 달라졌다. 한국인의 체형이 발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통념을 깨고 한국인도 발레로 승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특히 지난해 국립발레단 주역무용수인 김지영·김용걸이 파리 국제콩쿠르 1등을 차지했고, 지난달 제5회 전아시아 무용콩쿠르에서는 노보연(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3년)이 2관왕 수상을 하고 및 한국대학생들이 1~3등을 모두 차지하는 등 각종 콩쿠르 입상이 줄을 잇고 있다.

외국에서는 러시아 키로프발레단의 유지연, 볼쇼이발레단의 배주윤, 미국 아메리카 발레시어터의 강예나 등 3명이 세계 5대 발레단으로 꼽히는 유명 발레단원으로 활약중이다. 또 미국 애틀란타 발레단의 김혜영, 클리블랜드 발레단의 최광석, 스위스 바젤 발레단의 허영순도 한국발레 홍보에 일조하고 있다. 국립발레단의 이스라엘·이집트 공연, 유니버설발레단의 유럽·일본 공연, 서울발레시어터의 이탈리아 공연, 조승미발레단의 미국 공연 등도 한국발레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한국발레를 보는 세계 무용계의 시각도 변했다. 최근 최태지 국립발레단장, 김해식 무용원장, 김선희 무용원 교수,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 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발레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초빙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 홍보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한국을 빛낸 발레스타」 출연자들은 『한국발레를 세계에 알려야 무용수들의 외국무대 진출도 활발해질 것』이라며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은 국제수준인데도 외국인들이 접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김지영·김용걸씨도 『해외연수가 활성화돼야 한다. 마고트 폰테인이 「이제는 동양에서 발레가 온다」고 했지만 가서 보지 않고는 한국에서 세계 발레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유인화기자rhew@kyunghyang.com·사진 권호욱기자/
 
 

이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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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의 능력은 이미 그 위에 있었다.
-오펜하이머(전 프린스턴 연구소장)

이휘소에게는 60년대 중반에 이미 노벨상을 주었어야 했다.
-양진녕(1997년 노벨상 수상자)

그와 같이 6개월간 생활하면서, 나는 도리어 이휘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겔만(1999년 노벨상 수상자)

이휘소는 현대물리학을 10여년 앞당간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
-살람(1999년 노벨상 수상소감중에서)

이 과학자의 삶이야말로 학문적인 약소국이라는 열등감을 가져온 사람들에게 가슴 벅차게 자랑스러운 생애의 기록이다.
-윤호미(조선일보)

이휘소는 현대사에서 한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세계적인 과학자이다.
-월간조선 99년 2월호




1935. 1. 1 서울生

1977. 6. 16 교통사고로 타계


학 력

1953 서울대학교 화공학과 입학

1955 미국 유학

1956 Ohio주 Miami 대학 졸업(이학사)

1958 University of Pittsburgh 대학원

졸업 (이학석사)

1960 University of Pennsylvania 대학원

졸업 (이학박사)


경 력

1960~66 University of Pennsylvania

물리학과 교수

Princeton, Institute of

Advanced Study 연구원

1966~73 뉴욕 주립대학 (Stony Brook)

물리학과 교수

1973~77 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 이론물리학부장

University of Chicago 물리학과 겸임교수

이휘소(李輝昭, 1935­1977) 선생은 1935년 서울 출생으로 경기 중·고등학교를 거쳐 고교 재학 중 검정고시에 합격, 서울공대 화공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이 끝난 직후 1954년 도미하여 1956년 Miami 대학에서 학부를 졸업, 1958년 Pittsburgh 대학에서 석사, 1960년 Pennsylvania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Princeton의 고등 연구원, Pennsylvania 대학, 뉴욕 주립대(Stony Brook) 교수를 거쳐 1973년 Fermi 국립가속기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에 취임하였다. 곧 Chicago 대학의 교수도 겸임하였다. 소립자 물리학자로서 우수한 논문을 많이 발표했고 연구활동이 절정기에 이르러서 세계의 주목을 크게 받고 있을 때, 1977년 6월 16일 향년 42세로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타계하셨다.

이휘소 선생의 타계 후 2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한국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로 평가된다. 미국 이름이 "Benjamin W. Lee"로 알려진 그는 소립자 물리학의 새로 전개되는 이론 선두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아간 세계 정상급의 이론가였다. 1960년대에는 수학의 그룹 이론이 소립자간의 핵력과 같은 강상호작용 현상연구에 많이 응용되었는데 SU(6) 그룹을 이용하여 양성자, 중성자 같은 핵자의 자기 모먼트 계산으로 입자계의 대칭성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카이랄 대칭과 유동대수 이론을 통하여 강입자들의 상호작용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므로써 세계적인 대가가 되었다. 이것은 곧 카이랄 역학으로 이어져 대칭의 자발적 파괴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휘소 선생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게이지 양자장론에서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과 참 입자의 탐색에 관한 연구이다. 핵의 베타붕괴 같은 소립자의 약상호작용에 관한 Fermi 이론은 1950년대 후반 공간반전 대칭의 깨짐이 알려져 큰 변혁을 가져왔다. 그 후 전자기작용과 약상호작용을 통일장 원리에서 추구하는 이론들이 생겨났지만 약작용과 관련되는 게이지 장의 재규격화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 문제는 1970년대 초기에 이론적으로 해결되었는데 지금은 표준이론이 되어서 "전기"와 "자기" 현상을 통합설명하는 Maxwell 이론에 버금가는 물리학 이론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휘소 선생은 이 방면에서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물리학자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에는 K-중간자의 희귀붕괴 과정연구에서 새로운 참 쿼크가 예견되었는데, 이휘소 선생은 참 쿼크의 탐색방도를 여러 방면으로 제시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1974년 가을에 발견된 J/Ψ 소립자로 이휘소 선생은 단순히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에서 더욱 유명한 "현상론 물리학자"가 되었다. 그 후 이 논문에서 제시한 입자탐색 방법은 지금까지 고에너지 물리 현상 연구에 관한 정통적인 연구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재규격화 이론에 관한 그의 업적도 세계 정상급이었지만 참 입자 탐색에 관한 논문으로 그는 흔히 노벨상 수상자 후보였다는 평을 많이 받고 있다.

선생께서는 42세의 아까운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14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셨는데 1974년부터 전산화된 SPIRES 데이터베이스에는 비록 60여편 정도 수록되어 있으나 인용회수는 모두 10,000회에 이르고 있다.

이휘소 선생은 그의 학문적 업적 이외에도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큰 기여를 하였다. 1974년 미국 AID 차관자금에 의한 서울대학의 이공계 교육 증진 계획을 적극 지원하였고, 이같은 외국 차관에 의한 국내 대학교육 기자재 구입, 확충은 1980년대 한국의 대학원 수준 향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실험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한국이 고에너지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하였다.

선생을 소재로 한 허구적인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그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알려졌는데,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는 정반대로 한국의 핵무장을 반대하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선생에 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무리 미화하려는 의도라 해도 당신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어 오히려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이고, 학문적인 업적에 관한 학계의 일반적 인식을 돕기 위하여 필자가 제자로서 관찰했던 바를 물리학 발달의 큰 맥락에서 몇 가지 기술하고자 한다.



재규격화 이론



양자역학의 틀이 완성된 후 1930년대에는 전자기장을 양자화하려는 양자 전자기학에 문제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섭동이론을 쓰는데, 사용하는 매개변수인 미세구조 상수, α(=1/137)가 작아서 언뜻 보기에는 체계적인 급수전개에서 고차항을 포함할수록 예측정밀도가 높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에 수반한 상수가 무한대가 되어 의미 없는 이론이 되었다. 해결책으로 전자기장을 재규격(renormalization)하므로써 양자 전자기 이론이 비로소 "예측가능한 이론"이 되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공"에서 "가상적인 입자"들이 창생되어 원래의 입자 주위에 구름을 만들어 전하나 질량이 다시 새로운 규격에 맞게 되는 것이다. 재규격화된 양자 전자기 이론은 놀랍게도 그 성능이 엄청나게 좋아서 음전자의 자기 모먼트처럼 10-12의 정밀도 이내에서 실험값과 이론예측이 일치하는 사례도 알려져 있다. 이는 서울-부산간의 거리를 종이 한장 두께의 1/100 정도까지 이론적으로 예측하는 것에 견줄 정도이다. 양자 전자기장 이론 확립에 관한 공로로 Feynman, Schwinger, Tomonaga는 1965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약상호 작용에 관하여는 비록 Fermi 이론이 있었으나 양자전자기 이론과는 달리 재규격화가 불가능했고 대칭성이나 상대론적 변환에 따른 특성도 분명하지 않았었다. 1950년대에 발견된 공간반전 대칭의 파괴현상(1957년 Lee, Yang 노벨상 수상)으로 약상호작용의 구조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게이지 이론의 입장에서 본 전자기 이론을 약작용력에 적용하여 비가환성의 게이지 Yang-Mills 이론으로 발전되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전자기 이론은 가환 게이지 양자장론이다. 게이지 대칭과 연관된 게이지 입자는 무질량이어야 하는데 전자기에서는 광자가 바로 무질량이어서 괜찮다. 그러나 약작용을 매개하는 게이지 입자는 지극히 큰 질량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며 재규격화 문제와 맞물려 게이지 대칭도 깨져야 하므로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더욱이 고에너지로 갈수록 양자역학적 확률이 보존되지 않는 소위 유니타리티 문제까지 겹쳤다. 게이지 대칭이 "자발적"으로 깨지는 Higgs 현상에 근거하여 Weinberg, Salam, Glashow(1979년 노벨상)는 현재 "표준모델"의 모체가 되는 전자기-약작용의 매력적인 통일이론을 제창했지만 재규격화 문제 때문에 "예측가능한 이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 Veltman은 네델란드에서 Schoonschip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오늘날 Mathematica 프로그램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것은 수치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기호를 조작하여 대수적 연산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비가환성 게이지 이론을 섭동전개할 때 상당수의 Feynman 도식에서 "무한대"들이 서로 상쇄되어 유한해지고 의미있는 이론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그의 지도학생이었던 't Hooft는 비상한 수학지식을 활용하여 학위논문에서 이를 입증했다. 곧이어 이휘소 선생은 "Spontaneously Broken Gauge Symmetry"라는 제목으로 5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틀을 굳건히 만들었다. 그 이전에 제안된 Feynman, Fadeev, Popov 등의 아이디어를 "Functional 방법"으로 깨끗이 처리하여 유니타리티 문제도 해결하고 비로소 자발적으로 깨지는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이론이 정립되었다. Feynman, Schwinger, Tomonaga가 가환 게이지 이론을 재규격화하였다면 B. W. Lee, 't Hooft, Veltman은 비가환 게이지 이론을 재규격화한 것이다. 선생의 Functional 방법은 그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론 물리학도들의 정통적인 연구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재규격화에 관한 업적으로 Veltman과 't Hooft는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휘소 선생이 생존하셨더라면 금년에 노벨상 공동수상이 확실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휘소 선생의 서거 후 게이지 이론은 물리학의 주류가 되었다. 전자기-약작용의 통합 뿐만 아니라 핵력같은 강상호작용까지 포괄하는 소위 "표준모델" 이론이 통용되었고 대칭성에 근거한 여러 가지 변형된 "모델"이 심도있게 연구되고 있다. 현재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최대 관심사는 비가환 게이지 대칭이 자발적으로 깨져서 극히 짧은 작용거리의 약작용을 가능케하는 Higgs 입자의 존재를 밝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휘소 선생은 물리학 발전과정에서 큰 획을 긋는 커다란 업적을 남기셨다. 그 밖에도 K-중간자의 희귀붕괴, 천체 물리학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내셨으며 이 모든 것이 향년 42세까지의 업적임을 감안할 때 선생같은 세계적 석학이 일찍 타계하시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물리학계 발전에 얼마나 큰 원동력이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참 입자의 탐색



필자가 학위를 마친 다음 해인 1973년 이휘소 선생께서는 Fermi 국립가속기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시어 이론물리학부의 초대 전임부장에 취임하셨다. 선생 정도의 학문업적과 사회명성을 가진 학자라면 대개 좀 더 자유스런 분위기의 대학 연구환경을 선호하는 것이 보통이겠으나 그는 Fermi연구소에서 새로운 도전을 느끼신 것이었다. 당시 Fermi연구소에는 세계 최고의 에너지로 입자를 가속시킬 수 있는 가속장치가 건설되었다. 당연히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대학과는 연구환경이 약간 다른 정부출연 연구소에서 선생은 눈에 안보이는 압력과 시선을 느꼈다. 대학의 이론가들은 관련학계의 추세 변화에 따라서 비교적 쉽게 연구주제를 바꿀 수 있다. 연구소에서도 원칙적으로는 마찬가지이지만 엄청난 국고지원을 받는 거대 연구시설이 있기에 이 시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연구가 더욱 환영받는 분위기였었다.

앞서 기술한 재규격화 이론이 정립된 후 커다란 학문적 진전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점근적 자유론(asymptotic freedom)"이었다. 입자의 에너지가 높아져서 이들이 서로 가까이 갈수록 입자간의 작용력이 약해지고 마치 자유로운 입자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 Politzer와 Wilczek이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이전에 't Hooft가 인지하고 있었다. 한 세미나에서 Symanzik이 재규격그룹 방정식을 강의하면서 그중 어떤 계수의 부호가 양자 전자기학과 반대가 되면 점근적으로 자유로울 가능성을 제기했는데 't Hooft는 자기의 연구노트를 보고 비가환 이론에서는 사실임을 알았다. 후에 Wilczek은 필자에게 이휘소 선생의 논문에서 Feynman 법칙 중 부호가 틀렸기에 자신이 점근자유 이론을 발견하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토록 선생의 재규격화 논문은 당시 이론가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 점근자유 이론에 의하면 양전자-음전자가 소멸하여 모든 에너지가 강입자로 변환하는 빈도를 뮤온입자 쌍생성 빈도와 비교할 때 충돌 에너지가 높을수록 자연에 존재하는 쿼크의 종류로 결정되는 특정한 상수 R에 접근해야 함이 알려졌다. 그런데 당시 MIT에서 운영종료를 앞두고 측정한 가속기 자료에서 이 R 값이 상승하는 것이 밝혀지면서 여러 가지 이론적 예측이 나돌았다.

1974년 여름 선생은 이 문제를 몇 년 전 제안된 참 쿼크의 존재와 연계하여 "Search for Charm"이라는 획기적인 논문을 완성하였다. K-중간자의 희귀붕괴 과정을 분석하면 기묘도가 바뀌는 중성흐름은 없어야 하는데 이에 앞서 수년 전에 Glashow, Iliopolous, Miani (GIM)가 당시 알려져 있던 u, d, s 쿼크 이외에 질량이 훨씬 큰 c 쿼크가 추가로 존재하면 가능하다는 이론을 발표한 바 있었다. 점근이론에 어긋나게 R값이 상승하는 것을 당시에 필자는 다른 관점에서 연구했는데 선생께서는 이미 c 쿼크의 존재와 연결시킬 혜안을 갖고 그 탐색방안을 연구하셨다. 당시 Fermilab을 방문했을 때 필자의 연구방향을 말씀드리자 "주상군, 점근이론은 맞을 터이므로 R이 올라가면 다시 내려와야 하고 그러면 그 사이에 무언가 새 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시면서 c 쿼크를 암시하였던 점이 기억난다. 그는 비록 이론 물리학자이지만 실험물리학에도 전문가가 되어 c 쿼크가 존재할 경우 이들이 결합할 때 나타나는 입자들의 성질을 규명하였다.

그런데 1974년 11월 11일 "혁명"이라 불리울 정도로 역사적이라 할 수 있는 J/Ψ 입자가 BNL과 SLAC의 두 연구소에서 동시에 발견되었다. 이 발견으로 1976년 Richter, Ting은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새 입자는 곧 c 쿼크의 결합상태임이 분명해졌고 선생의 "Search for Charm" 논문은 실험 물리학자들간에 필독의 지침서가 되어 많은 실험제안서들이 나왔다. 이 논문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cc 결합상태는 평균수명이 지극히 길어서 사진건판으로도 수명 측정이 가능하리라"는 이론적 예언이다. 일반적으로 입자의 수명이 길 때에는 검출기에 나타나는 비행거리로서 수명을 재고, 짧을 때에는 입자가 표시하는 공명상태의 에너지 폭에서 Heisenberg 불확정성 원리를 적용, 평균수명을 계산한다. 보통 강입자들의 붕괴는 빨리 일어나므로 평균수명이 지극히 짧고 흔히 후자의 방법이 이용된다. 그러나 ss 결합입자인 φ-입자의 수명이 의외로 긴 점에서 착안된 Okubo-Zweig 규칙은 선택률처럼 입자붕괴 문제에 응용되었고 선생은 이를 cc 결합상태에도 적용하여 J/Ψ 강입자의 평균수명을 비행경로에서 직접 잴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J/Ψ 입자가 발견된 후 이 착상은 Fermilab의 E531 실험으로 추진되었고 한국이 고에너지 물리실험 분야 국제 공동연구 사업에 참여하는 기반을 닦고 국내의 고에너지 실험물리학을 활성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Search for Charm"같은 현상론적 논문은 실험물리 학자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었고 곧이어 이론적으로는 알려져 있으나 실험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현상탐구의 "Search for xxx"식의 현상론 풍조가 생겨났다.


정치인으로는 김대중대통령이 무엇보다 노벨상 덕분에 이름이 좀 알려진 편이죠.

스포츠인으로 박찬호, 김병현 등 야구선수는 기본적으로 '미국'에서만 유명하므로 한계가 있고,
박세리도 여자골프의 인기로 보아 역시 한계가 있죠.
축구선수 중에 세계적 스타가 나온다면 가장 유명인이 될텐데, 유감스럽게
세계적인 축구 스타는 아직 없습니다. 차범근씨는 독일에서 유명했죠.

문화예술인으로, 한류스타들이야 어차피 세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정명화, 정명훈, 백남준 같은 분들을 꼽을 수 있겠네요.

 

 

 

'유엔(UN)사무총장 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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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총장님은 1944년 6월13일에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셨고요. 중학생때 영어를 처음 접하셨고, 충주고2학년때 '외국학생 미국방문 프로그램'에 뽑혀 미국에 갔다가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후로 외교관의 꿈을 더욱 키우게 되셨고, 서울대 외교학과에 진학하셨어요. 1970년 2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5월 외무부에 들어가셨어요. 외무부에 재직중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 유학하여 1985년 4월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셨어요. 1972년 주뉴델리 부영사를 시작으로 1976년 주인도대사관의 1등서기관, 1990년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외무부 장관 특별보좌관, 1996년 외무부 제1차관보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2000년 외교통상부 차관, 2002년 외교부 본부대사, 2003년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을 거쳐 2004년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이 되셨어요. 1993~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국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 총책 역할을 하셨고, 또 1997년 북한노동당 비서를 지낸 황장엽이 망명할 때 중국과 필리핀을 오가면서 밀사 역할을 하여 망명을 성사시키기도 하셨어요. 외교통상부 내에서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알려져 있으며, 철두철미한 업무 처리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재직중인 2006년 2월 유엔 사무총장직에 출마할 것을 공식 선언하시고, 같은 해 10월 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단독 후보로 추대되었으며, 14일 유엔총회에서 공식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임명되셨습니다. 이로써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2007년 1월 1일부터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어요.
1975년 녹조근정훈장, 1986년 홍조근정훈장, 2001년 오스트리아 명예대훈장을 받았고, 2002년에는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브라질 리오블랑코 대십자훈장을 받으셨고, 2006년에는 페루 태양 대십자훈장, 알제리  국가유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고해요.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소개합니다.

 

 

윤이상(尹伊桑, 1917. 9.17통영- 1995. 11.3.베를린)
윤이상은 현재까지 세계음악계에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작곡가이다. 그는 살아있을 당시에 이미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인정을 받은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남북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상황은 그의 개인적 생활에 비극적 흔적을 남겼다. 그는 통영(지금의 충무)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이후 일본(오사카, 도쿄)에서 첼로, 음악이론, 작곡을 공부했다. 1946년-52년에는 통영과 부산의 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1952-56년까지는 부산과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했다.

한국에서의 작곡활동은 동요와 가곡 정도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가곡집 『달무리』(1949. 8.)에는 「고풍의상」, 「달무리」, 「추천」, 「충무가」, 「편지」, 「나그네」가 실려 있다. 「고풍의상」이나 「추천」 등은 60년대에 한국에서 많이 불린 가곡에 속한다.

5음계를 조금 넘어서는 노래로서 간단한 장식음을 섞어서 나름대로의 한국풍을 의도한 음악으로 보인다. 반주는 음계를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는 방식으로 화성을 만든다. 그는 다른 음악들도 작곡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는 유럽에 건너간 후 한국에서 쓴 모든 작품들을 파기한다.

1957년 프랑스로 건너가 빠리 음악원에서 오뱅(Tony Aubin)에게, 이후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블라허(Boris Blacher)와 루퍼(Josef Rufer), 슈바르츠 쉴링(Reinhard Schwarz-Schilling)에게 작곡을 공부한다.
그후 유럽의 여러 음악제에서 참여하여 이름이 알려졌고, 독일에 정착한 그는 유럽의 현대음악과 한국음악 및 동양음악을 융합하는 작곡세계를 펼쳐나간다.

1967년에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치르는데, 이 사건이 그에게 남긴 후유증은 그의 평생 내내 남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 정부의 간섭으로 2년 후 석방되어 독일로 되돌아간다. 1969-70년에는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강사로, 1972년부터는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명예교수로, 1977-87년에는 베를린 음악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유럽에서 작곡된 윤이상의 음악은 대단히 많은 요소들을 혼합한 것이다. 그의 음악은 12음 기법처럼 모든 12음들을 한 번씩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뿐만 아니라 음향적으로 사고하는 "음향 돗자리"(Klnagfläche)를 깔아 작곡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래픽적으로 작곡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일정한 형식이나 이론적 방향 없이 작곡한 그의 음악은 "인상주의적"이라는 말과도 어울린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음악에 대한 연상작용을 통해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한국음악 관련성은 한국음악의 조성이나 리듬 등 금방 알아챌 수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음향적으로> 그리고 <선율형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국악 중 민속악보다는 궁중음악과 관련된 부분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음향적으로> 착상된 그의 한국음악관련성은 우선 쉽게 눈에 띄는 것으로는 한국의 악기의 음색을 서양악기로 옮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오보에는 피리를, 하프는 가야금을, 플루트는 대금을, 바이올린은 해금을 대신하여 소리내는 것이었다.

또한 작품에 한국적인 제목이나 음악형식을 사용하기도 했다(Reak-禮樂, Bara-바라, Gasa-가사歌詞 등등).

윤이상 음악을 말할 때에 가장 많이 얘기되는 것이 <중심음>(도. Hauptton, 해당 항목 참조) 기법이다. 이는 하나의 선율만 있는 음악에서는 한 음이 중심에 있고, 그 주위의 다양한 주변음들로 장식된다.

그리고 여러 음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음악에서는 <중심음들>(Haupttöne)이 몇 개의 음으로 결합되어 나타난다. 주변음들은 오선보 상에서 흔히 장식음으로 나타난다.

중심음들은 미끄러지면서 다른 음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심하게 떨거나 가볍게 떨기도 한다. 중심음(들)의 생성과 사라짐을 섬세하게 펼치는 것이 그의 음악이 가진 특징이다. 생성과 사라짐은 셈여림 기호에 의해 드러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음악은 음향음악 또는 클러스터 음악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다.

또한 생성과 사라짐을 음양(陰陽) 이론에 비추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음양적 성격을 도교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윤이상은 이런 음악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럽 음악에서 음 하나하나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고, 음들의 연속이 비로소 어떤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나 우리 음악에서는 <음> 그 자체가 이미 고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 음악에 음은 붓글씨의 필체와 비교할 수 있다. 시작부터 마지막 여운까지 모든 음은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장식이나 선취음, 진동, 글리산도 그리고 강세의 변화로 장식되어있다.

모든 음의 자연스러운 변형은 음고의 관점에서 선율을 형성하는 음정(Intervall)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장식적 기능으로 그리고 동일한 음의 부분으로 이해된다." 이는 한국음악의 "시김새"(해당 항목 참조)를 설명한 것이다. 이 시김새는 사실 윤이상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고, 한국의 여러 양악가들의 작품에서도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시김새 현상은 "오음음계"와 "삼박자"가 한국음악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것 이상을 넘어가지 않았던 초기의 한국양악가들과는 다른, 더 발전된 단계의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이자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이러한 시김새는 특히 윤이상처럼 12음을 기본으로, 그리고 여타의 미분음까지 사용하는 윤이상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도구를 제공한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실내악곡 『낙양』(洛陽 Loyang), 관현악곡 『예악』(禮樂 1966), 오페라 『류퉁의 꿈』(Der Traum des Liu-Tung 1965),
『유령의 사랑』(Geisterliebe 1970), 『심청』(1972), 3개의 교향곡 등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그는 다작의 작곡가로서 현대음악가로서는 대단히 많은 양의 곡을 썼다.



 

 

 

2008.12.02.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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