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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나라에 관심이 많아서...

제가 요즘들어서 또,, 여러나라에 관심이 많아지고 공부를 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올해로 6학년인 한 여학생입니다.

 

제가 요즘에 다른나라의 국기나 수도등을 많이 많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성심껏 답변에 주셨으면 합니다. ^^

 

먼저... 그 나라의 수도와 , 사진좀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내공 팍팍 넣을께요)

 

"몽골   ;  인도  ` 미얀마 ` 카자흐스탄 `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스탄 "

까지만요.. 부탁드립니다.

 

아시아 지역이라... 헤헤

잘 모르시겠으면 유럽쪽 알려주셔도 괜찬하용...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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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0.02.17 조회수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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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몽골의 수도는 이렇게

 

 

   몽골 사진 입니다..

 

 

 

인도 의 수도

 

 

인도 사진

 

 

 

미얀마의 수도

 

 

미얀마의 사진

 

 

 

카자흐스탄의 수도

 

카자흐스탄의 사진

 

     밥이 이런것입니다...

 

파키스탄의 수도

 

          

 

 

 

 

 

 

 

알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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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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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몽고 (동음이의) 글을 참조하십시오.
Монгол Улс
(국기)(국장)
표어: (없음)
국가: 몽골 국가
수도울란바타르
47°55′N 106°53′E
공용어몽골어
정부 형태 이원집정부제 공화국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
쉬크바타린 바트볼드
독립
 • 독립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
1924년 11월 24일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1,564,116km² (19위)
0.6%
인구
 • 2005년 어림
 • 2000년 조사
 • 인구 밀도
 
2,646,000명 (139위)
2,650,952명
1.7명/km² (227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5년 어림값
$55억 6,000만 (147위)
$2,175 (138위)
HDI
 • 2006년 조사

0.720 (112위)
통화투그릭 (ISO 4217:MNT)
시간대
 • 여름 시간
(UTC+7)
UTC + 8 
ISO 3166-1 496
ISO 3166-1 alpha-2 MN
ISO 3166-1 alpha-3 MNG
인터넷 도메인.mn
국제 전화+976

몽골국(-國, 몽골어: Монгол Улс 몽골 울스, 통용: 몽고(蒙古))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나라이다. 카자흐스탄 다음으로 큰 내륙국이기도 하다.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중국과 맞닿아 있다. 몽골의 면적은 156만 4116 평방킬로미터로, 아시아에서 6번째로 넓지만 인구는 290만명에 불과하다. 수도는 울란바타르로, 몽골 인구의 38퍼센트가 거주하고 있다. 이 나라의 국토 대부분은 황무지 및 농사를 짓기 힘든 스텝으로 덮여 있으며, 농지의 비율은 적다. 북쪽과 서쪽은 산악지대이며 남쪽에는 고비사막이 있다. 이 나라 인구의 30퍼센트 정도가 유목민 또는 준유목민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인들이 가장 널리 믿는 종교는 티베트 불교이다. 몽골의 인구 구성은 대부분 몽골인이지만, 소수의 투바인카자흐족도 포함되어 있다. 기타 소수 민족들은 몽골의 서쪽 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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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몽골의 역사입니다.

고대로부터 몽골 초원에는 흉노, 돌궐 등 여러 유력한 유목 민족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1206년 칭기즈 칸의 몽골부족이 초원을 통일하고 역사상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14세기 말에 몽골 제국이 몰락하자 몽골 초원에는 다시 여러 부족이 나타났다.

명나라에 이어 중국을 지배한 청나라강희제는 몽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내몽골외몽골로 분리시켰다. 이후 내몽골은 중국과 호흡을 같이하고 외몽골은 중국에서 신해 혁명이 일어난 1911년신정 군주제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1917년 이후 한때 러시아 내전의 여파에 휘말렸으나 1921년 수흐바토르 초이발산이 전란을 수습하고 1924년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이라 함에 따라 세계에서 두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이후 구 소련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중, 소분쟁이 발생할 때 구 소련을 지원하였다(그에 힘입어 코메콘 가맹 국가도 몽골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 주었다). 1992년에 복수정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 공산주의 경제를 버리고 민주주의 경제를 도입했다.

지리 [편집]

몽골은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있으며 국토는 4가지 성격의 지대로 나뉜다. 서쪽은 알타이, 항가이라고 하는 큰 산맥 지대, 남쪽은 중앙아시아 고비사막 지대, 동쪽은 아무것도 없는 초원 지대, 그리고 북쪽은 시베리아 남쪽 살림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고도는 평균 1500m 정도이다.

기후 [편집]

고비사막의 영향을 받아 매우 건조하고 온도의 차가 심하다. 일년 평균강수량이 200mm 정도이다.

정치 [편집]

이 나라는 1924년부터 1991년까지는 구 소련의 지원을 매우 많이 받은 공산주의 국가였으나 1992년 선거로 민주화되었다. 1992년도에 민주공화제 채택하였고, 의원내각제의 성격이 강한 이원집권제 연임이 가능한 4년 임기의 대통령을 국민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하며 바가반디 대통령에 이어 현재 2005년 선출된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이 재임하였으나 2009년 몽골 대통령 선거에서 빈곤층의 지지에 힘입어 민주당의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 전 총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종교 [편집]

몽골인의 주된 종교는 티베트 불교로 역사적으로는 티베트와의 관계가 깊다. 하지만 1992년 선거로 민주화된 이후 개신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유입되고 있으며, 그 이전부터 러시아의 영향으로 정교회 신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불교 50%, 이슬람교 4%, 토속종교 4%, 기독교 2%, 무종교 40% (2004)

요리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몽골의 요리입니다.

언어 [편집]

몽골어공용어이며 러시아어가 2언어로 많이 알려졌다. 또한 소수의 카자흐어, 중국어 사용자도 있다. 일본어, 한국어, 독일어, 영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몽골어는 알타이제어의 하나로 넓은 뜻으로는 몽골민족이 과거에 사용했고 또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몽골계 언어 전반을 가리킨다. 좁은 뜻으로는 위구르계 몽골문자로 쓰인 몽골어 문어를 뜻한다.

현재 몽골어는 키릴 문자를 주로 사용한다.

몽골어를 쓰는 곳 [편집]

사용지역은 내몽골과 몽골을 중심으로 중국 변경지구, 아프가니스탄, 볼가강(江) 유역 등 광대한 지역에 미친다.

현대 몽골어는 동서의 대방언군(大方言群)으로 나뉘고 그 밖에 약간 고립된 방언이 있으나, 지역적 언어차는 별로 심하지 않다. 그러나 2,3개의 고립된 방언은 어형(語形) 변화가 심하여 다른 방언과의 차이가 크다.

몽골어를 대표하는 방언은 동(東)몽골방언군에 속하는 할하어 계(系)의 언어로 현재 몽골 전지역의 공통어 구실을 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몽골어는 13세기부터 16세기 말에 이르는 중세 몽골어시대, 17세기부터 현대까지의 근세 몽골어시대 등 두 시기로 나뉜다.

교육 [편집]

몽골의 초중등학교 과정은 현재 11학년제에서 현제 12학년제로 변경하였으며 학기의 시작은 9월이다. 초중고등학교가 한국과 같이 별도의 학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초중고 통합학교로 운영하고 있다. 학교이름은 국공립학교의 설립년도 순으로 제1번 학교, 제2번 학교 제3번 학교 등으로 표기하며, 사립학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설립년도 순이 아닌 독립된 별도의 학교 이름을 사용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까지는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대학교는 대학교, 기술학교, 직업학교로 구분하며, 대학교는 기능별로 분류한 종합대학교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군대 [편집]

이 나라는 건강한 남자라면 군대에 갈 의무가 있다(징병제 채택). 18세~25세까지의 남,여 모두 1년간 복무하며, 병역세로 한화 70만원만 내면 병역이 면제된다.

몽골은 과거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련위성국이었으며,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제일 낮고, 인구 또한 280만 명 정도로 매우 적다. (수도인 울란바타르에 760,077명, 2000년 기준)

몽골군은 몽골 국군(육군과 육군항공대가 통합)과 국경 경비대, 내무 보안군(전투경찰)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방예산은 약 2.2%정도로 세계평균보다 약간 낮다.

  1. 몽골 국군 (통합군): 7,000여 명
  2. 국경경비대: 6,500여 명
  3. 내무 보안군: 15,000여 명

※ 생업에 종사하거나 학생, 질병이 있는 자 등은 징병이 면제되어, 실제 복무율은 낮다.

내무 보안군의 존재 이유는, 1992년 헌법 개정으로, 공산주의를 버리고 시장경제를 채택하며, 다당제 민주주의를 하였기 때문에 이후 정국이 다소 불안하기 때문이다.

국경경비대는, 소련의 위성국 시절 군을 대신하여 소련과 대치중이었던 중국에 대비하여 국경을 지키는게 목적이었으나, 현재는 국민 1인당 가축이 24마리가 넘기 때문에, 가축이 러시아나 중국 국경을 넘어갈 경우 다시 끌어오는게 주 임무가 되었다.

과거 1996년까지 육군 소속 해양경비대가 홉스골 호수에 주둔하였다. 경비정 1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총사령관은 소위이며, 부대원은 7명이었다. 전원이 러시아 해군과 군사 교류를 하였다. 이후 대원과 함대가 모두 민영화되어, 홉스골 호수 근처의 관광 가이드를 하고있다.

대외 관계 [편집]

대한민국과의 관계 [편집]

이 나라는 현재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과 1948년 수교하였고 대한민국(남한)과는 과거에 몽골은 공산주의 국가이므로 미수교국가였으나 나중에 대한민국과는 1990년 3월 26일 수교하였다.

북조선과의 관계 [편집]

북조선과는 1948년 수교하여 이전까지는 같은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친북(親北) 성향의 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 대한민국과의 수교한 후에는 성향도 바뀌어 한국과도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편집]

몽골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9번째 수교국이고 중공-몽골 국경 분쟁 때문에 난리를 겪기도 했다. 특히 몽골은 구 소련의 위성국가라고 할 만큼 소비에트연방(소련)과 상당한 친교 관계를 유지했으며, 소비에트연방(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사이의 국경 분쟁에서 구 소련의 편에 서기도 하였다. 특히 내몽골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영토였으므로 문제점이 있을수가 있다.

중화민국과의 관계 [편집]

몽골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중화민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골이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했고 내몽골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외몽골이 러시아의 공산혁명으로 독립을 하게 된다. 중화민국(대만)은 소비에트연방(소련)과 조약 때 몽골을 독립국으로 인정했으나 중국의 공산화와 구 소련과의 단교로 인하여 그 승인을 취소하였으며 그 후 2002년 10월에서야 몽골과 비공식 관계를 가짐으로써 사실상 독립국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중화민국 영토로 간주된다.

러시아와의 관계 [편집]

예로부터, 몽골은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17년 이후에 한때 몽골은 러시아 혁명의 여파에 휘말렸을 때, 1921년수흐바토르 초이발산이 전란을 수습하고 1924년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이라 함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으로 몽골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당시에 백군 5,000명이 몽골을 침략했을 때, 소비에트 연방이 적군을 몽골에 지원을 해주어 백군을 물리쳐 승리를 차지하였기도 하였으며, 이후 몽골은 구 소련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으며, 중, 소분쟁이 발생할 때 구 소련을 즉시 지원하였다.

1992년에 몽골은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하였어도 러시아와는 지금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편집]

몽골은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미국과는 관계가 없었으나, 소련의 개혁, 개방 정책과 중앙유럽의 개혁, 개방 시기인 1987년 1월 27일에 미국과 수교에 합의했고 지금도 돈독한 교류를 유지하고 있다.

바깥 고리 [편집]

몽골 [편집]

인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법률 용어에 대해서는 인도 (법)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힌디어: भारत गणराज्य
영어: Republic of India
(국기)(국장)
표어: सत्यमेव जयते (사트야메바 자야테)
(진실만이 승리한다)
국가: 인도의 아침
수도뉴델리
28° 34′ N 77° 12′ E
공용어힌디어, 영어1
정부 형태 연방 공화제
프라티바 파틸
만모한 싱
독립
 • 독립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7년 8월 15일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3,166,414km² (7위)
9.56%
인구
 • 2005년 어림
 • 2001년 조사
 • 인구 밀도
 
1,103,371,000명 (2위)
1,027,015,248명
329명/km² (31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5년 어림값
$3조 6330억 (4위)
$3,320 (122위)
HDI
 • 2006년 조사

0.609 (132위)
통화루피 (ISO 4217:INR)
시간대IST (UTC+5:30) 
ISO 3166-1 356
ISO 3166-1 alpha-2 IN
ISO 3166-1 alpha-3 IND
인터넷 도메인.in
국제 전화+91
1인도의 주 별로 지정한 주요 언어가 23개 있다. 인도의 국가언어 목록을 참조한다.

인도 공화국(印度共和國, 힌디어: भारत गणराज्य 바라트 가나라자, 영어: Republic of India, 문화어: 인디아)은 남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인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가 면적은 세계에서 일곱째로 넓으며, 인구는 중국에 이어 둘째로 많다.

북쪽으로는 중국, 네팔, 부탄,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미얀마, 방글라데시, 벵골 만,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해, 남쪽으로는 인도양, 스리랑카와 맞닿아 있다. 인도는 불교, 힌두교 등의 발상지이고, 각 지역마다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 이기도 하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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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인도의 역사입니다.

인도 문명의 기원은 기원전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서 발원한다. 그러나 기원전 1500년~12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넘어 인도로 침입하여 인더스 문명은 파괴되었다. 아리인들은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델리 근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나갔다. 이 시기에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에서 힌두교가 파생되어 나왔고, 산스크리트 어가 발전해 이후 2,000여 년 동안 인도의 국어로 사용되었다.

불교자이나교는 이보다 늦은 기원전 6세기에 나타났다. 북부 인도는 찬드라 굽타(기원전 321년경 ~ 기원전 185년)의 통치 아래 최초의 힌두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로 통합되었고 그 손자인 아소카 대왕의 시대에는 인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한 대제국으로 확장되었다. 인도는 마우리아 왕조의 붕괴 이후 수많은 소왕국이 난립하였다가 굽타 왕조(320년 ~ 480년) 시대에 다시 통일되었다. 이슬람 교도들의 침입은 1000년경 부터 시작되었다. 14세기 초, 모하마드 이븐 투글루크델리 술탄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북부 인도에서의 이슬람 지배는 16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남부 인도에서도 역시 이슬람계 바만 왕조가 성립(1347년)되어 1527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이와 함께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 왕조가 1336년에서 1556년에 걸쳐 인도의 남부 지방을 양분하며 통치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여행(1498년)을 기점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하여 인도와 유럽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서는 같은 목적을 가진 포르투갈인·영국인·프랑스인·네덜란드인들 간에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다. 16세기초에는 이슬람계 왕조인 무굴 제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1526년 바부르가 세운 이 제국은 악바르아우랑제브 치세 동안 세력을 확장하고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힌두 왕국인 마라타 왕국이 17세기말 세력을 뻗치면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 동안 영향력을 키워온 영국 동인도 회사는 차츰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식민 세력들을 몰아내고 1757년에 무굴 제국을, 1818년에는 마라타 왕국을 굴복시킨 뒤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한 영국의 통치는 세포이 항쟁(1857년) 이후인 1858년에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초기의 인도 민족주의는 인도 국민 회의(1885)와 전 인도 이슬람 연맹(1906)의 창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857년의 세포이 항쟁 후 거의 60여 년 동안 대다수의 인도인들이 영국의 지배에 순응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이슬람 교도와 힌두 교도 모두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인도 국민 회의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협력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은 1919년과 1935년 인도 행정법을 통해 인도에 제한된 범위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들은 완전독립과 인도의 통일을 요구했다. 인도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7년 8월 15일 독립을 획득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 공화국과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초래했다. 펀자브벵골은 주민들의 종교성향에 따라 각각 2개로 분리되어 양국에 포함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아직까지도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 있다.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한 국회가 1952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96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1965년에는 파키스탄과 잠시 국경분쟁을 겪었다. 1967년에는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1984 암살)가 의회의 지지를 받아 총리로 취임했고 인디라 간디가 암살된 이듬해 아들인 라지브 간디(1991년 암살)가 총리에 취임했다. 1971년 파키스탄과 국경 2곳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시크교도들이 펀자브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인종과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다.

20세기 후반 인도는 괄목할 만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가장 인구가 많은 의회 민주주의를 잘 이끌고 있다.

행정 구역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인도의 행정 구역입니다.

인도의 행정 구역은 28개의 주, 6개의 연방 지역, 그리고 1개의 수도권으로 나뉜다. 수도는 뉴델리 (New Delii) 이다.

정치 [편집]

원래는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였으나, 1950년 1월 24일부터 공화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영국식 의원 내각제를 채택함으로써, 총리의 권력이 강력하다. 의회 구조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연방공화국인 인도는 25개주와 7개 연방직할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는 연방정부와 이들 주정부 간의 역할 분담에 의해 국정이 운영된다. 연방정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획·실행되어야 할 여러 사항들, 즉 국방, 외무, 교통·통신, 화폐 및 동전 주조, 고등 법원 운영 등에 관한 업무를 관할하는 한편 그외 경찰, 공중보건, 교육, 임산자원 관리 등 지방업무의 성격을 띤 분야는 주정부에서 담당한다

주민 [편집]

인도에 거주하는 주민을 인도인이라 부른다. 인도에서는 아랍인, 타밀인, 벵골인,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중국인, 프랑스인등 소수 민족이 존재한다.


언어 [편집]

힌디어영어가 기본적인 공용어이다. 나머지는 각 주 별로 공용어가 지정된다(타밀어, 구자라트어, 텔루구어 등이 존재).

지정어 사용인구 및 공용어 채택지역 현황 [편집]

인도에는 3372개의 언어가 존재하며 이중 1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용중인 언어는 216개, 헌법이 인정한 지정 언어는 18개이다.[1]

언어공용어 채택지역인구수(십만명)인구비율(%)
1981199119811991
힌디어 (Hindi)델리 외 9개주2645337238.740.22
벵골어 (Bengali)서벵골 주5126957.518.30
텔루구어 (Telugu)안드라프라데시 주5066607.417.87
마라티어 (Marathi)마하라슈트라 주4946247.247.45
타밀어 (Tamil)타밀나두 주5306.32
우르두어 (Urdu)잠무 카슈미르 주3494345.115.18
구자라트어(Gujarati)구자라트 주3304064.844.85
칸나다어 (Kannada)카르나타카 주2563273.763.91
말라얄람어 (Malyalam)케랄라 주2573033.763.62
오리야어 (Oriya)오리사 주2302803.373.35
펀자브어 (Punjabi)펀자브 주1962332.872.79
아삼어 (Assamese)아삼 주1301.56
신디어 (Sindhi)20210.300.25
네팔어 (Nepali)13200.200.25
콘칸어 (Konkani)고아15170.230.21
마니푸르어 (Manipuri)마니푸르 주9120.130.15
카슈미르어 (Kashimiri)310.46
산스크리트어 (Sanskrit)0.060.4900.01

종교 [편집]

힌두교는 다수가 신봉하고 있는 종교이다. 제2의 종교 세력은 이슬람교이며 소승 불교 세력도 있다. 펀자브 주에서는 시크교를 믿는다.

기타 토착 종교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기독교도 존재한다. 인도 기독교 교파로는 1947년 조합교회, 장로교, 개혁교회가 연합한 인도 성공회 교회인 남인도교회(The Church of South India (United))[2], 침례교회, 루터교회, 구세군, 성 토마스 복음교회, 로마가톨릭, 말란카라 시리아정교회등이 있다.

군대 [편집]

인도 헌법에 의하면 모병제를 실시한다.

경제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인도의 경제입니다.

인도의 경제성장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이나 정교한 행정조직과 관료제도, 양호한 교통·통신망, 우수하고 풍부한 인력, 잘 정비된 공업기반 등 일반적인 개발도상국들과는 다른 여건을 갖추고 있다.

1947년 독립 이후 많은 투자를 통해 공업부문에서 현재 세계 20위권 내의 공업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나, 무역부문에는 아직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아 수출량이 세계교역량의 1%를 밑돌고 있다.

한편 소수 지배계층은 매우 높은 수준의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저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등 소득격차가 매우 큰 것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매년 1,000만 명을 넘는 계속적인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실업자의 증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도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빈곤율 [편집]

2005년 빈곤율이 40%다.

문화 [편집]

인도의 문화, 볼리우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인도의 예술과 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 예술에서 현대 예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독립 이래 연방 정부와 여러 주정부는 랄리트칼라 아카데미(국립 미술 아카데미)·상게트나타크 아카데미(음악·무용·드라마 아카데미)·사히티아 아카데미(국립 문학 아카데미) 등 여러 문화·예술 관련기관을 설립하여 예술·문화활동을 촉진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도는 또한 영화 문화 산업이 매우 발달해있다.

인도 사람들은 바느질을 한 이 더럽다고 생각해서 전통 의상도 바느질을 안 하는 사리를 입는다.

대외 관계 [편집]

인도는 남북간 동시수교국으로, 대한민국과는 1962년 3월 영사관계를 수립한 이후 1973년 12월 10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1962년 영사관계 수립을 거쳐 1973년 12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인도는 국제무대에서 한반도 문제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편 경제문제 등에서 한국과의 관계 증진에 힘쓰고 있다. 양국간에는 1974년 8월 맺은 무역협정을 시작으로 문화협정(1974년 8월)과 과학기술협력협정(1976년 3월)그리고 한인 cept가이 체결되었다. 교역량이 점차 증가추세에 있어$2007년 현재 대한수입액 1,508 억 달러, 대한수출액 2,302 억$달러이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인도 간의 양자 외교는 대체적으로 친밀하고 강력한 관계였다. 그러나, 일본은 피폭국이었기 때문에, 인도가 핵실험을 했다는 이유로 인도와 거리를 둔 시기도 있었다. 인도는 최근 현저한 경제 발전과 정보기술의 실적이 주목 받고 있으며, 또한 G4 국가로 함께 행동하는 등 관계 강화를 지향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은 2006년에 아시아대양주국(局) 중에 새로운 부문으로서, 남아시아부(部)를 설치하였다. 2006년 12월 인도 만모한 싱 총리의 일본 방문은 "일본-인도 전략적이고 국제적인 파트너십을 향한 제휴 선언"을 서명할 때 최고조에 달하였다. 또한 2008년 10월에, 일본-인도 양국 정상은 일본-인도 안전보장협력공동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일본에 있어서 인도는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안보 분야에서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맺은 세번째 국가가 되었다. 인도와 파라과이는 1961년 9월 1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인도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겸임 대사와 아순시온에 있는 명예 영사가 파라과이에서 외교활동을 수행한다. 2005년부터 파라과이는 뉴델리에 대사를 두고 있다

 

미얀마는 못했음.

 

 

카자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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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카자흐에 대해서는 카자흐 (동음이의) 글을 참조하십시오.
Қазақстан Республикасы
قازاقستان رەسپۋبليكاسى
Республика Казахстан
(국기)(국장)
표어: 없음
국가: 나의 카자흐스탄
수도아스타나
51° 10′ N 71° 30′ E
공용어사실상 카자흐어러시아어
정부 형태 대통령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림 마시모프
독립
 • 독립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12월 16일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2,724,900km² (9위)
1.7%
인구
 • 2006년 어림
 • 1999년 조사
 • 인구 밀도
 
15,217,700명 (62위)
14,953,100명
5.4명/km² (215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5년 어림값
$1255억 (56위)
$8,318 (70위)
HDI
 • 2006년 조사

0.807 (71위)
통화텡게 (ISO 4217:KZT)
시간대
 • 여름 시간
(UTC+5~+6)
(UTC+6~+7) 
ISO 3166-1 398
ISO 3166-1 alpha-2 KZ
ISO 3166-1 alpha-3 KAZ
인터넷 도메인.kz
국제 전화+7

카자흐스탄(카자흐어: Қазақстан 카작스탄, 러시아어: Казахстан 까자흐스딴[*], 문화어: 까자흐스딴)은 중앙아시아에서 영토가 가장 큰 나라이다. 공식 명칭은 카자흐스탄 공화국(카자흐어: Қазақстан Республикасы 카작스탄 레스푸블리카스, 러시아어: Республика Казахстан 리스뿌블리까 까자흐스딴[*])이다. 때로는,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의 거인이라고도 부른다.

러시아, 카스피해,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세계에서 아홉째로 큰 나라이자, 가장 큰 내륙국이다. 1850년경에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으며, 1920년 소련에 편입되었고, 1936년 카자흐자치공화국이 성립했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992년 3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했다. 광대한 평원국으로 기후는 대륙적으로 건조하며 초원·사막이 매우 넓다. 주민은 카자흐인이 절반이다. 에너지자원(석탄·석유·수력) 외에 철, 구리, 납, 아연, 금, 니켈, 크롬, 망간, 보크사이트, 인회토(燐灰土)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다. 공업발달의 기초는 이들 자원의 채광 야금업이며, 화학공업(카바이드·인조고무·과린산비료·섬유·플라스틱), 기계장치제조업(농기·광산기계·압연기·석유업장치·압착기·펌프)도 발달하고 있다. 북부 카자흐스탄은 1954년부터 광대한 처녀지가 개간되어 밀·보리·옥수수 등을 산출하는 곡창지대이다. 카자흐스탄은 유럽에 영토를 일부 두고있다.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12년 이상이나 집권한 카자흐스탄 대통령이다. [1]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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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카자흐스탄의 역사입니다.

카자흐인들이 15세기부터 이 땅에 민족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는데, 주로 유목생활을 했다. 19세기에 제정 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볼셰비키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차르의 지배하에 있었다. 제정 러시아의 몰락 후 잠시 독립국가로 있었으나, 1920년소비에트 연방(소련)에 편입되었다. 1936년에 소비에트 연방의 자치 공화국이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해체되자 1991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직후에는 알마티가 수도였다가 1998년에 수도를 아스타나로 천도했다.

경제 [편집]

카자흐스탄은 제조업보다는 수출의 90% 이상을 원유와 천연가스 등의 천연자원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GDP는 1인당 8,000달러 정도다. 천연자원 개발 등으로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다.

기후 [편집]

계절변화가 뚜렷한 대륙성기후로서,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우며, 특히 평원과 골짜기 지역에 그 특징이 심하게 나타난다. 연평균 강수량이 북부가 약 250㎜, 남부 산악지대가 450㎜에 이르지만 사막은 비가 훨씬 적게 내린다. 스텝과 사막이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 있다.

주민 [편집]

카자흐인이 53.4%, 러시아인이 30%, 우크라이나인이 3.7%, 우즈베크인이 2.5%, 독일인이 2.4%, 위구르족이 1.4%, 고려인이 0.5%, 폴란드인, 불가리아인, 벨라루스인, 약간의 중국인, 기타 6.6%이다.(1999년)

카자흐 군인

언어 [편집]

카자흐어가 '국가어'이지만 러시아어는 '민족간 소통언어'로 사용되고 있어서, 두 언어 모두가 사실상 공용어이다. 현재 정부는 카자흐어를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며, 정부의 모든 문서는 카자흐어로만 작성이 된다. 아직도 도시의 사람들은 러시아어가 일반적이다. 소수민족은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카자흐어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알고보면 카자흐어는 카자흐스탄 국민의 전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영어, 벨라루스어, 독일어, 우크라이나어, 소수민족의 언어 등 기타도 사용된다.

종교 [편집]

이슬람교가 47%, 러시아 정교회가 44%, 개신교 2%, 기타 7%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문화 [편집]

10세기철학·과학·수학에 관한 수많은 저술을 남긴 작가 아부 나스르 알 파라비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문필가로서 알려져 있으며, 1904년에 사망한 아바이 이브라김 쿠난바예프가 있다.

현대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작가로는, 시인 잠불 자바예프와 극작가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를 꼽을 수 있다. 아직도 카자흐스탄에는 서사적인 민요시와 서정시를 낭송하는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카자흐스탄에는 많은 예술·연극 학교가 있으며, 알마티에는 국립 미술관이 있다.

영국 <채널4>에서 <다 알리 G 쇼>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새처 배런 코언이 보랏 사그디예프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 TV리포터로 분(扮)해 미국을 탐방하는 내용의 쇼를 진행하였다. 그는 또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문화 빨아들이기>라는 영화를 만들어 2006년 토론토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문제는 이 캐릭터가 카자흐스탄 문화를 비난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제 카자흐스탄에서 여성은 버스 안에서는 여행할 수 있고, 동성애자는 더이상 푸른 모자를 쓰지 않아도 되고, 결혼 가능 연령은 8살까지 올라갔다"며 카자흐스탄 사회를 조롱해왔다. 그의 이 같은 도발에 카자흐스탄 정부는 코언을 상대로 소송을 공언해왔으며, 결국에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까지 나서, 2006년 11월로 예정된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문화 빨아들이기>의 미국 개봉을 앞두고 미국을 찾아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벌일 예정이다. [2]

대한 관계 [편집]

2006년 9월 25일 대한민국(남한, 한국)의 기업들이 카자흐스탄에서 도로, 철도, 공항, 항만을 세우는 건설 분야에서의 협력을 증진하기로 합의하였음을 대한민국(남한, 한국)의 추병직 건설교통부장관이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행정부는 4천㎞의 철도와 8천㎞의 고속도로를 오는 2015년까지 건설하여(Great Bridge 계획) 카스피 해 지역에 이르는 교통 인프라를 구축할 예정이다.[3]

자원 [편집]

우라늄 매장량이 세계 2위, 천연가스 매장량 약 322억 배럴(세계 7위), , 텅스텐 등 많은 광물자원을 보유한 자원강국이다

 

파키스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اسلامی جمہوریۂ پاکستان
(국기)(국장)
표어: ایمان ، اتحاد ، نظم
(이만, 이티하드, 나즘)
신뢰, 단결, 훈련
국가: 카우미 타라나
수도이슬라마바드
33°40′N 73°10′E
공용어우르두어
정부 형태 대통령제 공화국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유수프 레자 길라니
독립
 • 독립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
1947년 8월 15일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803,940km² (36위)
3.1%
인구
 • 2006년 어림
 • 인구 밀도
 
163,803,560명 (6위)
206명/km² (53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7년 어림값
$4,756억 (25위)
$3,004.5 (125위)
HDI
 • 2006년 조사

0.562 (139위)
통화루피 (ISO 4217:PKR)
시간대
 • 여름 시간
PST (UTC+5)
없음 
ISO 3166-1 586
ISO 3166-1 alpha-2 PK
ISO 3166-1 alpha-3 PAK
인터넷 도메인.pk
국제 전화+92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우르두어: اسلامی جمہوریۂ پاکستان 이슬라미 잠후리야 이 파키스탄)또는 파키스탄(우르두어: پاکستان 파키스탄)은 남아시아중앙아시아에 있는 국가이다. 파키스탄은 전세계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전세계에서 2번째로 이슬람교도가 많은 나라이다.

수도는 이슬라마바드이며 주요도시로는 카라치, 라호르, 라왈핀디 등이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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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파키스탄의 역사입니다.

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 당시에는 인도와 합쳐져 있었으나 종교적 이유로 인도로 부터 분리 독립했다.

13년 동안 군정의 지배를 받았으나 1971년에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동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고 서파키스탄만이 남게 되었고 이 전쟁의 영향으로 아히야 칸 대통령이 사임하고 줄피카르 부토가 선출되면서 군정 시대가 종식되었다. 부토는 새 헌법에 따라 총리가 된다.

그러나 1979년 무하마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의 쿠데타로 부토 총리가 사형당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하크는 독재자로 군림하며 카리스마적이고 인기를 얻었으며 각국간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했으나 1988년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뒤를 이어 이슬람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 베나지르 부토가 선출되어 2번에 걸쳐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나 부패 혐의로 모두 실각했다.

1999년 다시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되어 군림하다가 2008년 8월 18일에 무샤라프 대통령은 사임되고, 베나지르 부토의 남편이었던 자르다리가 새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

지리 [편집]

파키스탄의 총면적은 803,940 km²로 세계에서 34번째로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보다 약 8.2배 더 넓고,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도 3.7배나 더 넓다.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해가 있어 바다를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인도, 북쪽으로는 중국, 북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서쪽으로는 이란과 각각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쪽과 서쪽은 산악지대로 되어 있는데, 카슈미르 지역에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K2 등 세계에서도 높은 봉우리들이 많다.

서부 중앙의 발루치스탄 지역은 높은 사막 고원지대로 되어 있고, 중앙의 펀자브 지역인더스 강이 지나고 있어 파키스탄에서 가장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행정 구역 [편집]

1960년대에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으로 단순하게 구분되어 있었으나,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한 이후에 현재의 파키스탄인 서파키스탄은 네 개의 주로 행정구역을 나누었다. 현재 파키스탄은 4개의 주요 지역(펀자브, 신드, 발루치스탄연방통치 북부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주:

  1. 발루치스탄 주
  2. 노스웨스트프런티어 주
  3. 펀자브 주
  4. 신드 주

특별행정구역:

  1. 이슬라마바드 수도권
  2. 연방통치 부족지구

파키스탄 령 카슈미르 지역(아자드 카슈미르):

  1. 아자드카슈미르
  2. 연방통치 북부지구

기후 [편집]

기후는 세가지 형으로 구분된다.

- 북부 산악 지방: 고산성 기후 - 중앙의 펀잡 지방: 스텝 또는 온대하우(溫帶夏雨) 기후와 여름에는 몬순의 영향으로 기온이 높아지고 비가 내리며, 겨울은 서늘하다. - 남부, 남동부 (신드지방, 타르사막), 남서부(발로치스탄) 지방: 스텝과 사막의 건조한 기후.

정치 [편집]

정부 -파키스탄은 대통령이 국가의 수장인 의회제도와 총리가 정부의 수장인 정부형태를 가지고 있다.

의회 - 의회는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1. 파키스탄 상원 의회 (상원) 2. 파키스탄 국회 (하원) 

사법제도

- 대법원과 각 지역에 고등법원 그리고 그 외 법원에서 민 형사 관련 사법권을 행사한다.

주민 [편집]

인구 [편집]

파키스탄이 인구는 2005년 현재 162,419,946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는 세계에서 브라질에 이어 여섯번째로 많은 것이다. 1980년대에는 높은 인구증가율로 인해 2050년경에는 세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질 것으로 예측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이후 인구증가율이 급격히 낮아져 현재의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언어 [편집]

법적으로 우르두어를 국어라고 지정했을뿐 공용어의 지위는 없다. 게다가 우르두어를 국어라고 한 조문에는 다음과 같은 단서가 있다. "공용어가 영어의 역할을 대체할 때까지는, 영어는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즉, 실제적으로는 영어가 공용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수준에서는, 신드주만이 신드어와 우르두어를 공용어로 사용할 뿐, 나머지 지역은 우르두어가 유일한 공용어다.

종교 [편집]

파키스탄 인구의 대부분은 이슬람교을 믿고 있으며, 그 중에서 수니파가 75%, 시아파가 20%를 차지하고 있다. 무슬림 외에는 기독교인이 2.5%로 가장 많으며, 그 밖에도 소수의 힌두교도, 불교도, 조로아스터교도, 시크교도 등이 있다. 이 중 기독교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해 탄압받는 종교이지만, 무샤라프 대통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을 전망이다.

파키스탄의 종교인구의 구성은 영국령 인도의 분할에 의해 크게 바뀌었는데, 영국령 인도가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으로 분할될 당시 7백만 명의 무슬림이 인디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동했고, 반대로 6백만 명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파키스탄에서 인디아로 이동하여 파키스탄에서 무슬림은 더욱 더 큰 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파키스탄은 시크교대승 불교, 그리고 밀교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교육 [편집]

대외 관계 [편집]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대한민국과는 1983년에 수교하였다.

일본은 파키스탄과 대체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피폭국이었기 때문에,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했다는 이유로, 이러한 핵보유국과의 거리를 둔 시기도 있었다. 파키스탄에 대해서 1998년 지하 핵실험 때부터 2005년 4월까지 원조를 중단했었다. 그러나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 등 안보의 관점에서 볼 때, 중동에 대한 영향력이 강한 파키스탄과 협력할 필요를 느낀 일본 정부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파키스탄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유상 자금 지원을 재개하였다.

 

 

 

아프가니스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만화에 대해서는 아프가니스탄 (만화)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د افغانستان اسلامي جمهوریت
(파슈토어: 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라미 좀호리야트)
جمهوری اسلامی افغانستان
(페르시아어: 잠후리예 이슬라미예 아프가니스탄)
(국기)(국장)
표어: 없음
국가: 소우오우드 에멜리
수도카불
34°30′N 69°10′E
공용어파슈토어, 다리어[1]
정부 형태 이슬람 공화국
하미드 카르자이
무함마드 카심 파힘
칼림 할릴리
압둘 살람 아지미
독립
 • 독립
영국에서 독립
1919년 8월 19일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647,500km² (41위)
0%
인구
 • 2009년 어림
 • 1979년 조사
 • 인구 밀도
 
28,150,000[2]명 (37위)
13,051,358명
43.5명/km² (150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8년 어림값
$213억8800만[3] (96위)
$760[3] (172위)
HDI
 • 2007년 조사

0.345 (174위)
통화아프가니 (ISO 4217:AFN)
시간대
 • 여름 시간
(UTC+4:30)
UTC+4:30 
ISO 3166-1 004
ISO 3166-1 alpha-2 AF
ISO 3166-1 alpha-3 AFG
인터넷 도메인.af
국제 전화+93
최초의 아프가니스탄 독립 국가는 두라니 왕조로 1747년 10월에 성립하였다. 이 나라는 1919년에서 1973년까지는 아프가니스탄 왕국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파슈토어: د افغانستان اسلامي جمهوریت, 다리어: جمهوری اسلامی افغانستان)는 남아시아 또는 중앙 아시아 또는 서아시아에 있는 내륙국이다. 북쪽은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은 중국, 동쪽과 남쪽은 파키스탄, 서쪽은 이란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카불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빈국으로 손꼽힌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고대에 비단길이주의 중심지였다. 또 동아시아서아시아 사이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이 땅은 수많은 침략자들의 표적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이웃 지역을 침공하여 제국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1747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두라니 제국을 세웠는데, 이 때가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4] 나중에 두라니 제국의 도읍은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겨졌으며, 제국 영토 대부분은 이웃 강국들에게 빼앗겼다. 19세기 말, 영국령 인도 제국러시아 제국이 "거대한 경쟁"(The Great Game)을 벌이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은 두 제국의 완충국으로 전락하였다.[5]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1919년 8월 19일에 이 나라는 영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상태에 빠진 상황이며, 1979년에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1년 미국 주도로 탈레반을 축출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외국의 점령을 겪게 된다. 2001년 말,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북대서양 조약기구 군대로 구성된 국제 안보 지원군(ISAF) 창설을 승인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현재 해외 원조로 재건되고 있으나 심각한 내부 분쟁을 겪고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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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편집]

아프가니스탄의 지형도

아프가니스탄의 총 면적은 647,500 km²로, 세계에서 41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북쪽 아무다리야 강을 사이에 둔 국경으로는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있으며, 서쪽에는 이란, 남쪽 힌두쿠시 산맥 너머로는 파키스탄, 동쪽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내륙국으로 산악 지형이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평야는 북쪽과 남서쪽에 펼쳐져 있다. 가장 높은 산은 해발고도 7,485km의 노샤크 산이다. 기후는 지역마다 편차가 크며, 변화도 심하다. 국토 상당 부분은 건조하고 담수 공급이 부족하다. 내부 유역 분지시스탄 분지는 전세계에서 건조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이다.[6] 아프가니스탄은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중앙 고원은 겨울에 몹시 춥고, 빙하화된 북동부(누리스탄 주변)와 와칸 회랑 지대는 1월 평균 기온이 영하 15도에 이르며, 남서부의 시스탄 분지와 동부의 잘랄라바드 분지 그리고 북부의 아무다리야 강을 따라 이어진 아프간 투르키스탄 평원의 저지대는 여름에 무척 덥고 6월 평균 기온이 35도를 넘는다. 이 나라는 소규모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데, 특히 힌두 쿠시 산악 지방의 북동부에서 주로 일어난다. 1988년 5월 31일에 일어난 지진으로 마을 125곳이 파괴되고, 4,000명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천연 자원으로는 남동부의 , , 구리, 아연, 철광석, 북동부의 귀금속과 보석(청금석, 에메랄드, 사파이어 등), 잠재 매장량이 상당한 북부의 석유천연 가스가 있다. 그 밖에도 우라늄, 석탄, 크롬철광, 활석, 중정석, , , 소금이 있다.[1][7][8][9]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의 침공과 이후 내전으로 말미암아 아프가니스탄의 풍부한 광물 및 에너지 자원은 개발되지 않은 실정이다. 가까운 장래에 자원 채굴 계획이 준비 중에 있다.[10][11]

역사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입니다.
수백년간 아프가니스탄 땅은 페르시아 제국의 동부 영토였으며, 지금까지도 이 나라는 이란 문화의 동쪽 접경을 이루고 있다.

근대적인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1747년에 세웠으나,[4] 이 땅은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다양한 문명들이 들어선 바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루이스 뒤프레, 스미소니언 학회 등에서 발굴한 원시 시대 유적을 보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땅에 사람이 산 것은 적어도 50,000년 전의 일이며, 이 지역의 농경 집단은 세계적으로 초기에 속함을 알 수 있다.[12][13]

아프가니스탄은 수많은 인도-유럽 문명들이 상호작용하고 투쟁하던 독특한 연결점이며,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땅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은 온갖 민족의 터전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박트리아, 아리아, 아라코시아아리아인 민족들 인도-이란인도 있었다. 또 이 땅을 정복한 집단으로는 메디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 셀레우코스 제국, 인도-그리스 왕국, 튀르크인, 몽골인 등이 있었다. 현대에는 영국소비에트 연방이,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과 동맹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원주민 집단은 주변의 이란 고원, 중앙 아시아, 인도 아대륙을 침략하여 자신들의 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슬람 이전 시대 [편집]

기원전 2000년에는 인도-유럽어족 아리아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아인들은 원래 아프가니스탄에서 기원을 두고 이 곳에서 남쪽의 인도나 서쪽의 페르시아로 간 것 같지는 않고,[14] 다만 카스피 해 북쪽을 통해 유럽으로 이주한 것 같다. 이들은 아이리아넴 바에자라는 민족을 이루게 된다. 아리아인의 원래 터전은 아나톨리아, 쿠르디스탄, 중앙 아시아, 이란 또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는데, 이런 각 주장에 따라 역사상의 이주 방향이 달라진다.[15][16] 나중에 파르티아사산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 곳은 "아리아인들이 지배하는 땅"을 뜻하는 '이란사르'(틀:Lang-fa)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최대 판도. 기원전 180년경.

자라투스트라교(조로아스터교)가 발생한 곳은 기원전 1800년~800년 사이의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여겨지는데, 창시자 자라투스트라발흐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17][18] 자라투스트라교가 발흥하던 시기에 아베스탄어와 같은 고대 동부 이란 언어는 이 지역에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제국메디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그리스인들은 아라코시아라고 불렀다)을 병합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0년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땅을 잠시 정복한 이후 후계국인 셀레우코스 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다 기원전 305년에 동맹 조약의 일환으로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에 이 지역 대부분을 넘겨 주게 된다. 마우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힌두교불교가 아프가니스탄 땅의 주요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85년에 마우리아 제국이 숭가 제국에 무너지고, 기원전 180년경에는 헬레니즘 국가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정복하였다. 이내 아프가니스탄 상당 부분은 그리스-박트리아에서 떨어져나가 인도-그리스 왕국의 영토로 넘어간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인도-스키타이에 패배하고,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르면 아프가니스탄 땅 대부분을 잃게 된다.

1세기경, 파르티아 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였으나, 인도-파르티아 봉신들에게 땅 빼앗겼다. 기원후 1세기 중엽에서 말엽에는 광대한 쿠샨 제국이 아프가니스탄 땅을 중심에 두고, 불교 문화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3세기에 쿠샨 제국은 사산 왕조에 격퇴되었다. 스스로를 쿠샨샤스(보통 인도-사산으로 알려짐)라고 부른 수많은 통치자들이 이 땅의 일부를 계속 다스렸으나, 이들은 아마 사산 왕조에 종속되어 있었을 것이다.[19] 후기 쿠샨 이후로는 키다라 훈족[20]이 지배자가 되었다가, 강력한 에프탈이 5세기 초에 잠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였다.[21] 서기 557년에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가 에프탈을 무찌르고, 페르시아에서 사산 왕조의 패권을 재확립하였다. 그러나 쿠샨과 에프탈의 후손들이 카불리스탄쿠샨-에프탈 또는 카불-샤한이라 불리는 작은 왕조를 세웠는데, 이들은 나중에 무슬림 아랍인에게 패배하고, 결국은 가즈나 왕조의 무슬림 튀르크 군대에 정복되었다.

이슬람과 몽골의 정복 [편집]

아프가니스탄은 서기 750년에 이슬람 할리파 국가의 동쪽 접경 지대였다.

서기 9세기까지 이어지는 중세 시대에 아프가니스탄은 대 호라산 지방의 일부였다.[22][23][24] 그리하여 발흐, 헤라트, 가즈니, 카불 등 호라산의 여러 중심지가 아프가니스탄 땅에 있었다. 이 시기에 이슬람이 이 땅에 전파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지방은 여러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샤히 왕조, 사만 왕조(875–999), 가즈나 왕조(977–1187), 셀주크 왕조 (1037–1194), 구르 왕조(1149–1212), 몽골 제국, 일 한국(1225–1335), 티무르 제국 (1370–1506)이 바로 그러하다. 이 가운데 가즈나 왕조[25]와 티무르 왕조[26] 시대는 아프가니스탄 역사에서 대단히 번영했던 시대로 여겨진다.

1219년, 이 지역은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인의 침략을 받아 황폐화되는데, 가령 헤라트발흐의 고대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절멸시키기도 하였다.[27] 몽골인의 파괴로 주요 도시들의 인구가 격감하고, 수많은 주민들이 농경 생활로 돌아가게 되었다.[28] 이들의 지배는 일 한국 때에도 지속되었으며 중앙 아시아 출신의 지배자 티무르의 침공 이후로 더욱 확대되었다. 1504년에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후손인 바부르무굴 제국을 세우고 카불을 도읍으로 삼았다. 170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집단의 지배를 받았는데, 북쪽은 우즈베크인, 서쪽은 사파비 왕조가, 나머지 지역은 무굴 제국과 지역 부족들이 지배하였다.

호타크 왕조 [편집]

1709년, 길자이 부족의 파슈툰족인 미르 와이스 호타크가 사파비 왕조의 칸다하르 태수인 구르긴 칸을 죽였다. 미르 와이스는 사파비 왕조의 토벌군을 무찌르고 칸다하르 지방을 장악하여 1705년에 죽을 때까지 지배하였다. 그의 아들 미르 마흐무드 호타키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1722년, 미르 마흐무드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이끌고 이란의 이스파한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자신을 페르시아의 왕으로 선포하였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배자를 찬탈자로 여겨 거부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스파한 시민 수 천명을 학살한 이후 (그 가운데는 3천 명이 넘는 신학자, 귀족, 사파비 왕족도 있었다.) 이들은 결국 페르시아의 새 지배자인 나디르 샤에게 격퇴되었다.[29][30]

두라니 제국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두라니 왕조입니다.
두라니 왕조의 병사들.

1738년, 나디르 샤와 그의 군대(그 가운데는 4천 명의 파슈툰족 압달리 씨족도 있었다.[31])는 칸다하르 지방을 정복하였으며, 같은 해에 가즈니, 카불, 라호르도 그의 손에 떨어졌다. 1747년 6월 19일, 나디르 샤는 암살당하였는데, 이 일은 조카 알리 콜리의 음모로 말이암은 것 같다. 나디르가 죽자 그의 부장이자 경호병이었던 압달리 씨족의 파슈툰족 아흐마드 샤 압달리로야 지르가('대회의')를 요청하였다. 칸다하르에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모여 아흐마드 샤를 새 통치자로 삼고, 1747년 10월에 대관식을 치렀다. 아흐마드 샤는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창건자로 여겨지기도 한다.[1][32][33] 임금이 된 아흐마드 샤는 자신의 칭호이자 씨족명을 '두라니'로 바꾸었는데, 이 말은 '진주'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두르'에서 나온 말이었다.[31]

1751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와 그의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의 호라산 주코히스탄 주를 비롯해 인도의 델리까지 정복하였다.[34] 1772년 10월, 아흐마드 샤는 퇴위하여 고향인 칸다하르의 마루프로 돌아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티무르 샤 두라니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겼다. 티무르 샤는 1793년에 죽었으며, 아들 자만 샤 두라니가 왕권을 승계하였다.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손자들은 위대한 선조들이 이룬 유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 이들은 서로 갈라져 "추방, 눈멀게 하기, 처형을 되풀이"하였으며,[35] 결국 벌리 떨어진 아토크나 카슈미르같은 영토의 지배권이 약화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결과로는 압달리의 손자인 샤 슈자-울-물크가 형제의 분노를 피해 시크 교도에게로 피신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일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압달리가 펀자브 지방을 여러 차례 침략했던데다, 얼마 전에도 시크교의 가장 거룩한 성소인 암리차르하르만디르 샤히브를 파괴하고 소의 피로 사로와르를 더럽혔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하라자 란지트 싱그 휘하의 시크 교도들은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왕국(오늘날 신드를 제외한 파키스탄 전역)에서 상당한 영토를 빼앗았다.[36]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맡은 시크 제국의 군 사령관인 하리 싱그 날와는 힌두쿠시 산맥 산자락까지 진출해 국경선으로 삼았다.[37] 시크 교도들은 파슈툰족의 심장부에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1837년, 카이바르 고개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군대 전체가 잠루드의 소규모 시크 군대를 공격하였다. 수적 열세와 용맹한 장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리 싱그 날와의 악명 때문에 카불 왕국의 전 군대는 일 주일이 넘도록 진군하지 못하였으며, 이 때 라호르에서 시크의 지원군이 잠루드에 당도하였다.[38]

유럽의 침략과 아프가니스탄의 나라 성립 [편집]

19세기에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년~1842, 1878년~1880년, 1919년)과 바라크자이 왕조 성립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에게서 상당한 영토와 자치를 얻어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1919년 아무눌라 칸이 왕위에 오르면서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성립하여 아프가니스탄은 외세에게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간섭하던 당이 파슈툰족의 영토는 듀런드 선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 선으로 말미암아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후대에 신생국 파키스탄)간의 긴장 관계가 생기는데, 나중에 이는 파슈투니스탄 논란으로 알려지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왕국 [편집]

베를린을 방문한 아물라 왕. 이 방문으로 오늘날까지 아프가니스탄과 독일의 견고한 동맹이 시작된다.

아물라 칸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전통적인 고립 정책을 버렸다. 그는 대부분의 주요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1927년에 터키유럽을 순방한 이후 (이때 그는 아타튀르크의 근대화와 세속화에 관심을 가졌다), 아프가니스탄의 근대화를 위한 여러 개혁을 실시하였다. 아물라의 개혁 이면에는 아물라 칸의 장인이자 외교 장관이었던 마흐무드 타르지가 있었는데, 그는 여성 교육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헌법(로야 지르가를 통해 선포되었다) 중 초등 의무 교육을 규정한 68조를 위해 투쟁하였다.[39] 전통적인 무슬림 여성 베일을 폐지하고 수많은 남녀 공학 학교를 개설하는 등 개혁책 가운데 일부가 시행되자 이내 여러 부족과 종교 지도자들이 소외되었다. 아물라 칸은 압도적인 군사적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1929년 1월에 하비훌라 칼라카니가 이끄는 군대가 카불을 함락하면서 강제로 퇴위당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에 아물라와 사촌간인 모함메드 나디르 칸 왕자가 하미불라 칼라카니를 무찌르고 죽였으며, 파슈툰 부족의 상당한 지지를 얻어 나디르 샤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권력을 공고히 다지고, 나라를 새로이 고쳤다. 그는 점진적인 근대화 방식을 선호했던 아물라 칸의 개혁 정책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1933년에 그는 카불의 어느 학생에게 보복 살해를 당하고 만다.

자히르 샤와 왕비가 미국 존 F. 케네디재클린 케네디뉴욕에서 만나는 모습.

나디르 칸의 19살된 아들인 무함마드 자히르 샤가 1933년에 왕위에 올라 1973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무함마드 자히르 샤의 치세에 아프가니스탄은 가장 긴 안정기를 맞았다. 1946년까지 자히르 샤는 총리직을 맞아 나디르 샤의 정책을 계승한 숙부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였다. 1946년에 자히르 샤의 다른 숙부인 사르다르 샤 마흐무드 칸이 총리가 되어 정치적 자유를 크게 확대하는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상황이 더욱 진전되자 당초의 정책을 뒤엎게 된다. 1953년, 그의 뒤를 이어 왕의 사촌이자 처남이었던 무함마드 다우드 칸이 총리가 되었다. 다우드는 소비에트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파키스탄과는 거리를 두려 하였다.

이 시기에 아프가니스탄은 중립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냉전 이후에는 어느 진영과도 동맹을 맺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기에는 소련과 미국이 호텔이나 하수도 드으이 건설 사업을 통해 이 곳의 영향력을 얻고자 경쟁하면서 이득을 보았다. 이란으로 가는 2차선 도로도 건설되어 헤라트, 칸다하르, 카불을 거쳐 파키스탄 국경까지 이어졌다. 1960년대 말에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히피 여행 경로로 이용하였다.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편집]

1973년, 자히르 샤가 국외 순방 중일 때 무함마드 다우드가 무혈 정변을 일으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무함마드 다우드는 아프가니스탄의 라디오를 反파키스탄 방송으로 채웠으며, 소련과 미국에게서 개발 원조를 기대하였다.

1978년에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PDPA)의 유력 당원인 미르 아크바르 카이바르가 정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인민 민주당 지도자들은 다우드가 자신들을 모조리 몰아낼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두려워하였으며, 과연 그 직후에 지도부 상당수가 정부에 체포되었다. 하피줄라 아민과 인민 민주당의 군부 인사들은 건재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바브라크 카르말, 아민이 이끄는 인민 민주당은 무함마드 다우드 정권을 전복하였으며, 다우드는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정변은 칼크 즉 위대한 4월 혁명으로 알려졌다. 1978년 5월 1일, 타라키는 대통령, 총리, 인민 민주당 사무총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으로 개명하였으며, 인민 민주당 정권은 1991년까지 존속하였다.

1978년의 칼크 반란으로 두라니족(다우드 칸을 비롯하여 이전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조)과 대립하던 파슈툰족길자이 부족이 소생하게 되었다.[40]

소련 침공 이전에 카불에 있던 여왕 궁전.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의 당사로 쓰였다.

권력을 잡은 인민 민주당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야심찬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전국의 농민 부채를 탕감하였다. 이들은 또 여성의 권리에 관한 여러 정책을 내놓고 여성을 정계로 끌어들였다. 저명한 여성 정치인으로 아나히타 라테브자드를 들 수 있는데, 그녀는 유력한 마르크스주의자 지도자이자 혁명 평의회의 의원이었다. 라테브자드는 1978년 5월 28일에 '뉴 카불 타임스' 지의 사설에서 '권리를 통해 여성은 평등한 교육, 직업, 안전, 의료 서비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건강한 자녀를 기를 자유 시간을 누려야 하며 ... 여성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일은 이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 일이다."라고 썼다.[41]

카불 등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에 환영하기도 하도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세속적 성격 때문에 농촌 지역에 사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이에 반감을 가졌으며, 전통적인 이슬람 율법을 선호하였다.

당시 미국은 이런 상황이 소련을 약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1979년에 지미 카터의 미국 정부는 암암리에 親소련파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이 일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웠다.[42] 무자히딘은 여러 상이한 세력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유사한 보수적인 이슬람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1979년 3월, 하피줄라 아민이 총리가 되었으며, 원수직을 보유하고 최고 국방 평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타라키는 대통령직을 유지했으며,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9월 14일, 아민이 타라키를 배반하여, 타라키는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아민의 총리 임기는 몇 달을 채 넘기지 못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침공과 내전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아프가니스탄 내전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의 파르참 파를 지원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1978년에 양국이 맺은 우호 협력 및 선린 조약을 명분으로 1979년 12월 24일에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였다. 10여 만 병력이 넘는 소비에트 군대가 침공에 동원되었으며, 만여 명의 병력과 파르참 파의 구성원들도 가세하였다. 아민은 살해당하고 바브라크 카르말이 뒤를 이었다.

1988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소련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하여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은 무장하고 소련 점령군에 맞서 봉기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히딘을 지원하였다. 미국의 지원은 카터 행정부 때 시작되었으나, 레이건 행정부에서 크게 늘어나,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앙골라, 니카라과 등의 반공 저항 운동을 지원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레이건 독트린의 핵심 사항이 되었다. 무자히딘은 미국의 지원과 더불어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지원도 받았다.

소련의 점령으로 6만~2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살상되었다. 5백만이 넘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조국을 등지고 파키스탄, 이란 등 해외로 떠났다.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데다 사상자가 크게 늘면서 소련은 1989년에 철수하였다.

미국은 석유가 풍부한 페르시아 만 근처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세 대통령의 행정부가 무자히딘을 지원하였는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미국의 이념적 승리로 비쳐졌다.

소련은 계속 무함마드 나지불라 대통령(전에는 아프가니스탄 비밀 경찰 KHAD의 수장이었다)을 지원하다가 1992년에 새 러시아 정부가 나지불라 정권에 석유 제품 판매를 거부하였다.[43]

전쟁 때문에 수많은 엘리트와 지식인들이 해외로 피신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도층의 불균형 현상이 일어났다. 소련군을 물리친 무자히딘 내 각 분파들은 계속 서로 싸웠으며, 아프가니스탄은 군벌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 시기에 가장 심각한 전투는 1994년에 있었는데, 카불 한 곳에서 10,000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탈리반(탈레반)이 정치-종교 세력으로 성장하여 결국 1996년에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2000년 말에 탈리반은 국토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탈리반이 7년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면서 , 주민 대다수는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했다. 여성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엄금되었으며, 어린 여성이 학교나 대학에 가는 것도 금지되었다.[44]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근절되었으며, 절도범은 손이나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45] 2001년에 탈리반은 아편 생산을 거의 일소하였다.[46]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 ~ 현재)입니다.
국제 연합에서 밝히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국내의 안보 위험과 아편 재배의 정도를 나타낸 지도.

2001년 8월, 미국 국무성 관리 크리스티나 로카(Christina Rocca)는 미국 에너지 대기업 우노칼(Unocal)이 계획하는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하는 석유 및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문제를 놓고 탈리반과 마지막 협상차 만났다. 여기서 로카는 "우리가 주는 선의의 융단을 수락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네들을 융탄 폭격으로 파묻어 버리겠습니다."라고 발언하였다.[47][48][49][50][51]

2001년 9·11 테러 하루 전날인 9월 10일,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 정권이 알 카이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을 넘겨주지 않을 시 탈리반 정권을 전복시키기로 결정하였다.[52]

9·11 테러 당시 비행기를 납치한 19명의 테러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며, 아무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살지도 않았으며(이들은 함부르크에서 살았다), 아무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받지도 않았으며(이들은 플로리다에서 훈련받았다), 아무도 아프가니스탄의 비행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이들은 미네소타에서 비행 연습을 했다)[53]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내 알 카이다 테러범 훈련소를 파괴하는 군사 작전인 항구적 자유 작전을 개시하였다. 미국 군대는 빈 라덴과 여러 알 카이다 조직원들을 인계하는데 거부한 탈리반 정부도 전복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미국은 이를 위해 옛 아프가니스탄 무자히딘과 공동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아직도 아프가니스탄 정부로 국제 연합에서 승인받은 민병대인 북부 동맹도 있었다.

2001년 말, 미국은 특별 작전 부대의 CIA 준군사 조직 장교와 미군 특수 부대를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하여, 탈리반과 알 카이다에 대한 공중 타격을 지원받던 反탈리반 민병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는데, 그리하여 북부 동맹이 카불을 함락하고, 탈리반 정권이 무너졌으며, 탈리반과 동맹 관계였던 여러 지방 군벌들이 북부 동맹으로 돌아섰다.[54]

2001년 12월, 옛 무자히딘의 지도자과 난민들이 독일에서 만나 본 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서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칸다하르 시 남부 출신으로 파슈툰족 두라니 씨족(옛 왕가 출신) 사람인 하미드 카르자이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의 의장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2002년 전국적인 로야 지르가(원로 회의) 이후,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3년에 이 나라에서는 제헌 로야 지르가를 소집하여, 2004년 1월에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헌법을 비준하였다. 2004년 10월에 선거가 열려, 카르자이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의회 선거는 2005년 9월에 열렸다. 1973년 이래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음으로 자유롭게 선출된 아프가니스탄 국민 의회가 2005년 12월에 개회하였으며, 여성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하여 주목을 끌었다.

아프가니스탄은 계속 재건 중인 상태이지만, 빈곤과 기반 시설 부족, 지뢰나 미폭발 화기의 지나친 집중, 불법적인 양귀비 재배와 아편 거래 등 문제가 산적해 있다. 또 아프가니스탄은 아직도 이따금 정치 폭력 사태가 벌어진다. 이 나라는 아직 탈리반 반군과 싸우고 있으며, 알 카이다 잔당의 공격 위험도 남아있다.

2007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리반이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난다는 보고로 말미암아 미국은 파병 기간 연장에다가 심지어 군대 증파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2007년 1월 16일, AP 통신의 로버트 번즈가 취재한 기사에 따르면, "미군 관리가 탈리반 운동과 오랜 관계를 맺어온 파키스탄 군부가 탈리반의 공격을 눈감아주고 있다는 새 증거를 언급하였다"고 한다.[55] 또 "2006년 9월이래 반군 공격 횟수가 300% 증가하였으며, 이 때 파키스탄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국경에 있는 북부 와지리스탄 지방의 부족 지도자들과 화의를 맺었다"라고 미국 첩보 장교가 기자에게 증언하였다.[55]

2008년 말, 탈리반은 알 카이다와 남은 관계를 끊었다.[56] 미군 고위 첩보 관리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알 카이다 조직원은 100명 이하라고 한다.[57]

2009년 12월 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6개월 이상 미군 30,000명 병력을 추가 파병하여 미군의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하였다.[58] 그는 또 파병 시점부터 18개월 이후부터 미군 철수를 시작하겠다고 제시하였다.[59][60] 다음날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지휘관 스탠리 A. 맥크리스털 장군은 파병 일정은 바뀔 수도 있다고 언급하며, "확실하지 않다"고 밝혔으며,[61] 로버트 게이츠 국방부 장관은 미국 상원 군사 상임 위원회 의원에게 2011년 7월에는 파병이 완료될 수 있을 지 질의받자 "최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항상 자신의 결정을 수정할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고 답하였다.[62] 12월 7일, 아프가니스탄의 카르자이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반군을 제압할 준비가 되려면 5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말하였다.[63]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편집]

2004년 12월 7일, 하미드 카르자이의 대통령 취임식.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사는 권력 투쟁, 유혈 정변, 불안정한 권력 이동으로 점철되었다. 지난 20세기동안 이 나라는 군사 독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 형태 - 왕정, 공화정, 신정, 공산 통치 - 를 겪었다. 2003년 로야 지르가에서 비준된 헌법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삼부로 이루어진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하미드 카르자이로, 2004년 10월에 이어 2009년 8월 대선에서도 연임하고 있다. 현재 의회는 2005년에 선출되었다. 선출직 공무원 가운데는 옛 무자히딘, 탈리반, 공산주의자, 개혁주의자, 이슬람 근본주의자도 있다. 의원 가운데 28%가 여성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여성 할당 의석 25% 비율보다 3% 높은 수치이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은 과거 탈리반의 여성 억압으로 악명 높았으나, 지금은 여성 의원 비율로만 보자면 세계 선두권에 있는 나라이다. 2005년 8월 29일에 새 의회 의사당 건설이 시작되었다.

2009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선거는 치안 부재, 낮은 투표 참여, 광범위한 투표지 채우기, 협박, 그 밖의 선거 부정으로 얼룩졌다.[64][65][66] 420 의석의 주 의회 선거를 비롯하여 당시 선거는 2009년 8월 20일에 치러졌으나, 득표수 계산과 선거 부정 조사로 오랜 시간을 끌었다.[67] 두 달 뒤에, 미국과 동맹국의 강력한 압박으로 현직 카르자이 대통령과 그의 주요 정적인 압둘라 압둘라 간에 결선 투표를 11월 7일에 치르기로 발표가 났다. 그러나 11월 1일에 압둘라 후보가 더이상 결선 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는데, 그 이유로 자신이 선거 관리위원회의 변화를 요구한 바가 이행되지 않았으며, '투명한 선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루 뒤인 11월 2일, 선거 관리위원회는 결선 투표를 취소하고, 하미드 카르자이를 차후 5년 임기의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으로 선포하였다.[65][66]

대선 직후 카불에 주재한 국제 연합 고위 관리인 피터 갤브레이스는 국제 연합이 1차 대선 투표에 앞서 선거 부정 준비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밝혀야 한다고 촉구하다 해임되었는데, 그는 선거에 앞서 카르자이는 무능하고 부패한 자로 여겨졌는데 이제는 무능하고 부패한데다 적법하지도 않다고 썼다.[68] 한 달 뒤 카불 주재 미국 대사는 본국 정부에 두 편의 기밀 통신을 보내었는데, 여기서 카르자이 정부가 탈리반의 발흥을 조장하고 있는 부패와 실정을 시정할 의지가 있음을 보일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을 더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69] 2009년 11월, 아프가니스탄은 국제 투명성 기구의 연간 부패 지수에서 세 계단이 떨어져, 소말리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부패가 심한 나라가 되었다.[70]

현재 아프가니스탄 대법원의 대법원장은 압둘 살람 아지미로, 전직 교수출신으로 과거에는 대통령의 법조 비서관을 지낸 바 있었다.[71] 과도 정권에서 임명했던 이전 법원은 파이살 아흐마드 신와리 등 근본주의자 종교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법원은 케이블 텔레비전 금지령을 내리고, 2004년 대선에에 한 후보의 출마를 금지하려 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제약하는 등 여러 판결을 내놓았는데, 헌법상의 권한을 무시하고 법원에 맡겨지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서도 판결을 내리기도 하였다. 현행 법원은 더욱 온건한 것으로 평가되며, 이전 법원보다는 기술 관료들이 더욱 주도권을 잡고 있다.

법 집행과 군사 [편집]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은 70,000명 이상의 국가 경찰을 보유하고 있으며, 앞으로 총 경찰 병력에 80,000에 이를 수 있도록 모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경찰 계획에 따라 훈련받고 있다. 경찰은 공적으로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지만, 때론 지방 군사 지휘관들이 배후지의 통제권을 계속 행사하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 경찰은 감옥수를 부적절하게 가두고 학대하여 비판받고 있다. 2003년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의 명령이 지금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지휘 아래 카불 지역 바깥으로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들 군대가 점령하지 못한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 민병대들이 통제권을 잡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범죄가 수사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경찰이 불충분한데다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 탓도 있다. 경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부 지역에서는 아프가니스탄 국방군 부대가 파견되기도 하였다.[72]

아프가니스탄 국방군은 현재 병력이 90,000명이며, 이후 몇 년 안에 260,000명으로 증강할 계획이다.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국제적인 감시 덕분에 경찰처럼 부패하지 않다. 그러나 탈영은 심각한 문제이다. 미국 국방부 자료와 아프가니스탄 재건 감찰관의 자료에 따르면, 2009년 9월에 전투병 네 명 가운데 한 명꼴로 12개월만에 군대를 떠났다고 한다.[73]

치안과 범죄 [편집]

아프가니스탄에서 헬만드 주는 가장 위험한 지역인데, 수도 카불에서 가장 먼 데다 마약 거래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다른 위험 지역으로는 칸다하르오루즈간 등을 들 수 있는데, 오루즈간의 경우 최근 네덜란드와 아프가니스탄의 반격으로 치안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 치안이 불안정한 주 대부분이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국토 남부에 자리잡고 있어서,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반군이 유입되는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160개국 가운데 부패 면에서 121위이다.[74] 2009년에 카르자이 대통령은 미국, 유럽, 이란의 요구로 내무부에 반부패 기구 두 곳을 설치하였다.[75] 2009년 11월 16일, 아프가니스탄 내무부 장관 하니프 아트마르는 카불에서 기자들에게 미국(FBI), 영국(런던 경찰국), 유럽 연합(ELOPE)의 치안 관리들이 이 조직의 직원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 관계 [편집]

아프가니스탄의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과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파키스탄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이 함께 있다.

탈리반 정권이 붕괴된 이래로 새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과 여타 북대서양 조약기구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22개국 이상의 북대서양 조약기구 회원국들이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의 일환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수 천명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다. 군사 관계 외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나 여타 동맹국들과 강력한 경제 관계를 이루고 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지원국이며, 그 밖에도 일본, 영국, 독일, 인도가 있다.[76]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변동이 심하다. 탈리반 정권 시절에 파키스탄은 대부분의 탈리반 지도자들과 인맥이 가까워 아프가니스탄에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다.[77] 그러나 탈리반이 전복되면서 파키스탄의 영향력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지금도 아프가니스탄과 안보 및 경제 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긴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의 대립국인 인도의 영향력이 커져 파키스탄의 우려를 낳고 있으며 양국이 듀런드 선을 놓고 국경 분쟁을 계속 벌이고 있어서 양국간의 대립이 남아있다.[78] 2007년부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군대는 여러 차례 국경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관리가 파키스탄 첩보 기관이 아프가니스탄의 일부 테러 공격에 관여했다고 주장하면서 양국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79][80]

역사와 문화 면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이웃 나라 이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두 나라 모두 대 페르시아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과거 두 나라의 관계는 급진적인 순니 이슬람주의자인 탈리반 정권이 집권하면서 악화되었지만,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관계가 회복되었다.[81]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지원 사업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82] 또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와 이웃 중앙 아시아 국가들(특히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인도는 아프가니스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로 손꼽힌다.[83] 인도는 주변 국가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지원국이며, 전력, 농업, 교육 사업 등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재건 사업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다.[84][85] 2002년 이래로 인도는 아프가니스탄에 12억 달러 이상을 원조하였다.[86] 군사 관계도 긴밀한데, 아프가니스탄 보안군은 정기적으로 인도에서 반군 대처 훈련을 받으며[87] 인도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검토하고 있다.[88]

행정 구역 [편집]

지도
이 부분의 본문은 아프가니스탄의 행정 구역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행정구역상 34개의 (벨리야트)로 구성되어있으며, 각 주는 영내에 주도를 두고 있다. 각 주는 여러 군으로 구성되는데, 각 군은 보통 한 도시나 여러 마을로 되어 있다.

주지사는 내무부에서 임명하며, 군수는 주지사가 임명한다. 주지사는 아프가니스탄 중앙 정부의 대표자이며, 모든 행정 및 공무를 담당한다. 주의 경찰국장은 내무부에서 임명하며, 주지자와 협력하여 주내 모든 도시나 군의 법 집행을 담당한다.

수도 카불은 예외적으로 시장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임명하며, 카불 주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주민 [편집]

주요 민족 (2003년 추계)

언어 [편집]

2004년에 제정한 현행 헌법 1부 16조는 “파슈토어, 다리어, 우즈베크어, 투르크멘어, 발루치어, 파샤이어, 누리스탄어 및 국내에서 말하는 다른 언어들 중에서 파슈토어다리어는 국가의 공용어다. 국가는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언어의 강화 및 발전을 위하여 효과적인 계획을 채택하며 이행한다.

출판과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은 국내에서 말하는 모든 다른 언어들로 자유롭게 한다.”고 했다. 공용어인 파슈토어는 35%, 다리어는 50% 정도가 사용한다. 투르크멘어는 11%를 차지하며, 기타(러시아어, 우즈베크어, 키르기스어, 타지크어, 힌디어, 우르두어 등)도 사용된다.

종교 [편집]

이 나라는 이슬람교가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이다.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과는 달리 수니파가 다수이다.

교육 [편집]

문해율은 남성 71%, 여성 57%이다. 탈레반 정권하에서는 여성의 교육 및 사회활동이 엄금되었으나, 탈레반 축출이후에 교육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그러나 불안한 정세와 이로 인한 교육인프라 부재가 문제이다.

대한 관계 [편집]

2007년 2월 27일 폭탄 테러로 한국군 장병 1명이 사망했고, 같은 해인 2007년 7월 19일가즈니 주 카라바그 부근에서 독일인과 한국인 봉사단 23명이 탈레반에 의해 납치되어 한국인 2명 (목사 1명, 봉사자 1명)이 살해 되었다. 결국 협상의 타결로 나머지 일행들은 석방되었다. 그 후 현재 본국의 불안한 치안상황 등 여러 정황에 따라 국민의 신변안전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는 허가없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입국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대한민국과는 1973년 수교에 합의하였으나 1978년 사회주의 정권 수립과 동시에 단교되었다가 2002년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과도정부 수립과 함께 재수교하였다. 북조선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아프가니스탄에 군사를 파병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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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ыргыз Республикасы
(키르기즈 레스푸블리카시)
Кыргыз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키르기즈스카야 레스푸블리카)
(국기)(국장)
표어: 없음
국가: 키르기스스탄 공화국 국가
수도비슈케크
42°52′N, 74°36′E
공용어키르기스어, 러시아어
정부 형태 공화정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펠릭스 쿨로프
독립
 • 독립 선언
 • 승인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
1991년 8월 31일
1991년 12월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19만 8500km² (85위)
3.6%
인구
 • 2005년 어림
 • 1999년 조사
 • 인구 밀도
 
5,264,000명 (111위)
4,896,100명
25명/km²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5년 어림값
$9억 3240만 (134위)
$2,088
HDI
 • 2006년 조사

0.694 (122위)
통화 (ISO 4217:KGS)
시간대
 • 여름 시간
KGT (UTC+6)
(없음) 
ISO 3166-1 417
ISO 3166-1 alpha-2 KG
ISO 3166-1 alpha-3 KGZ
인터넷 도메인.kg
국제 전화+996

키르기스스탄(키르기스어: Кыргызстан, 러시아어: Киргизия 키르기시야[*], 문화어: 끼르기즈스딴)은 중앙아시아 내륙의 공화국으로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었다가 1991년에 독립했다.

중국,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과 접해있다. 2005년까지는 혁명내전으로 정국이 불안하였다고 한다. 키르기스스탄은 국토 대부분 산이여서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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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편집]

키르기스스탄은 2005년레몬 혁명으로 아카예프 대통령이 축출되었는데, 혁명의 주역중에는 고려인도 포함되어 있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1] 2008년 10월 6일에 키르기스스탄 남쪽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사망자가 65명으로 증가했다. [2]

지리 [편집]

국토 전체의 40%가 해발 3000m를 넘는 산간 지방이다. 국토는 동서로 길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에는 톈산 산맥이 펼쳐져 있다. 남쪽에 위치하는 타지키스탄으로는 파미르 고원이 펼쳐져 있다.

국토의 중앙과 동서로 산맥이 펼쳐져, 국토는 수많은 협곡으로 갈려진다. 최고봉은 중국 국경에 우뚝 솟은 포베티산(Pobeda 또는 Jengish 혹은 승리봉, 7439m), 그 다음으로 칸·텡리(Khan-Tngri 또는 Kan-Too, 6995m)다. 4000m급의 봉우리가 적지 않은 수가 있다.

주요 하천은 시르다리아강 지류의 널인 강이고, 주요 호수는 국내 북동부에 위치하는 이시크 호수 (Isik-Kl)이다. 동서로 180km, 남북으로 60km, 둘레가 700 km에 이른다. 호수 표면의 해발은 1600m이다. 이시크 호수와 널인 강은 서로 다른 수계를 가지고 있다.

기후 [편집]

주변의 카자흐스탄이나 중국과는 달리 국내에 사막은 존재하지 않고, 이 지역은 천혜의 기후를 가지고 있다. 동서로 뻗어있는 계곡 부분은 사람이 거주하기 적절하며,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하계에 비가 적은 온대의 지중해성 기후 (Cs)에 해당한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로마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기후 지역이다. 산지는 아한대 습윤기후 (Df)이고, 특히 고지대는 고산기후(H)가 된다. 톈산 산맥을 끼고 남쪽의 중국과 아라 산맥을 끼고 북쪽으로 카자흐스탄에는 스텝기후(BS)와 사막기후 (BW)가 펼쳐진다.

실제 강수량을 비교하면, 톈산 산맥의 100km 남쪽에 위치하는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카슈가르의 연강수량은 60mm이지만, 비슈케크(북위 43도, 해발 800m)의 강수량은 450mm에 이른다. 이것은 로마나 샌프란시스코와 비슷한 수준이다. 비슈케크의 평균 기온은 1월에―3도, 7월에 25도이다.

비슈케크와 제2의 도시 오슈, 중앙부의 널 인에는 구 소련 시대에 대규모 관개시설이 부설되어 있기 때문에, 면화를 중심으로 한 경작에 적합하다. 이러한 관개지는 시르다리아강, 널인강의 지류에서 물을 얻고 있다.

사람과 언어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키르기스스탄의 주민입니다.
전통적인 길가 무덤

키르기스족들이 69.5%정도 차지하고, 유르트와 야크를 방목한다. 기타 소수민족은 러시아인 (9.0%), 남부의 우즈벡족 (14.5%)이다. 소수그룹을 차지하는 위구르족 (1.1%), 타지크족 (1.1%), 카자흐족 (0.7%), 둥간족 (1.2%)과 터키인 (0.9%), 고려인 (0.3%), 우크라이나인 (0.5%)이다.

키르기스어러시아어가 공용어이며, 키르기스어는 1991년 9월부터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신생국인 키르기스스탄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이 대부분 떠나게 되는 원인중 하나였다. 러시아어는 2000년에 다시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키르기스어는 투르크어족에 속한 언어로 20세기까진 아랍 문자로 표기되었다. 1928년에서 1941년까진 로마자로 표기되다가, 1942년부턴 키릴 문자로 표기되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이해할 줄 안다. 특히 비슈케크 주민들은 러시아어가 모국어이고, 사업과 정무에서 많이 사용된다. 소수 민족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종교 [편집]

75%가 이슬람교에 속하고, 러시아 정교회와 다른 종교들도 존재한다.

문화 [편집]

행정구역 [편집]

키르기스스탄은 현재 7개의 주(주; 단수область 복수областтар)로 구분되어 있다. 수도는 비슈케크이다. 도시(Шаар)도 구분되어 있다.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주와 중심지를 보면

  1. 비슈케크
  2. 바트켄 주 (바트켄)
  3. 추이 주
  4. 잘랄아바트 주 (잘랄아바트)
  5. 나린 주 (나린)
  6. 오시 주
  7. 탈라스 주 (탈라스)
  8. 이식쿨 주 (카라콜)
  9. 오시

외교 [편집]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여러국가(구 소련 분리독립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대한관계

한국과는 구 소련 해체와 한소수교 이후인 1992년에 수교하였으며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CIS공동관 국가로 참여한 적이 있다.

휴일 [편집]

휴일한국어키르기스어비고
1월 1일새해Жаңы жыл~
1월 7일러시아 정교회의 크리스마스~~
3월 8일여성의 날Аялдар күнү~
3월 21일누루즈Нооруз майрамы~
5월 1일Labour (Labor) DayLabour (Labor) Day~
5월 5일헌법 제정일Конституция күнү~
5월 9일제2차 세계대전 승전일Жеңиш күнү~
8월 31일독립일Эгемендилүүк күнү~

 

 

 

제가 미얀마를 소개하는 대신 덴마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덴마크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ngeriget Danmark
(국기)(국장)
표어: 신의 가호, 국민의 사랑, 덴마크의 힘(Guds hjælp, Folkets kærlighed, Danmarks styrke)
국가: 사랑스러운 땅에서1
수도코펜하겐
55°43′ N 12°34′ E
공용어덴마크어
정부 형태 입헌군주제
마르그레테 2세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건국
 •
8세기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43,094km² (134위)
1.6%
인구
 • 2008년 어림
 • 인구 밀도
 
5,475,791명 (108위)
129.16명/km² (78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6년 어림값
$1,985억 (45위)
$37,000 (6위)
HDI
 • 2006년 조사

0.952 (13위)
통화크로네 (ISO 4217:DKK)
시간대
 • 여름 시간
CET (UTC+1)
CEST (UTC+2) 
ISO 3166-1 208
ISO 3166-1 alpha-2 DK
ISO 3166-1 alpha-3 DNK
인터넷 도메인.dk
국제 전화+45
1왕실이나 군대에서는 Kong Christian을 부른다.

덴마크 왕국(Kongeriget Danmark 콩게리게트 단마르크[*] 듣기 , 문화어: 단마르크, 통용: 정말(丁抹))은 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며, 수도는 코펜하겐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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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덴마크의 역사입니다.

고대 덴마크 [편집]

고대부터 윌란 반도(유틀란트 반도)에는 데인 족이 살고 있었다. 카를 대제의 북진정책의 결과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811년 프랑크 왕국과 아이더 강을 국경으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이킹의 해상원정은 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구드프레드 왕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10세기에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11세기 초 크누트 대왕(재위 1014∼1035) 때에 덴마크-노르웨이-잉글랜드(동군연합)의 왕위를 겸하는 대왕국을 창건하였다. 크누트가 죽자 곧 그 대왕국은 분열되고, 덴마크는 다시 스칸디나비아의 한 세력으로 전락하였으나, 크누드의 조카 스벤 2세에 의해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신 덴마크 왕국이 건설되었다. 스벤 2세가 죽은 뒤, 1074~1134년까지 스벤 2세의 다섯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그 동안에 한때 앵글로색슨의 세력하에 있던 덴마크교회는 다시 함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가 1104년경 룬드를 대주교구로 한 독자의 국교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134년 이후, 다시 교회와 국가의 분열 및 국내분쟁이 지속되다가, 1157년 발데마르 1세(재위 1157∼1182)가 일어나서 국내를 통일하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켰다. 발데마르 1세는 군사력을 재편성하여 독일에 대항하고 발트해의 슬라브 세력과 싸웠는데, 그 때 슬라브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셸란섬에 구축한 성채가 오늘날의 코펜하겐의 기원이 되었다.

동군연합의 성립 [편집]

발데마르 2세 때 정치적·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으나, 그가 죽자 다시 왕·교회·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왕권이 약화되고, 또 같은 시대에 발트해의 지배 및 슐레스비히의 영유권를 둘러싸고 스웨덴·노르웨이·한자동맹 세력과의 항쟁이 지속되어 왕국의 약체화를 가져왔다. 발데마르 4세가 죽은 뒤, 발데마르의 딸 마르그레테와 그녀의 남편, 즉 노르웨이왕이자 스웨덴 왕위계승자인 노르웨이의 호콘 6세의 아들인 덴마크의 올라프 2세(재위 1375∼87)가 왕위에 오르자 마르그레테가 섭정이 되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해오다가 호콘 6세, 올라프 2세의 사후인 1387년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군주로 승인받았다. 마르그레테는 다시 1389년 스웨덴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동군연합 형태의 3왕국의 통합은 1397년의 이른바 칼마르 동맹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1448년 덴마크의 왕조는 올덴부르크가로 바뀌었으나 칼마르 동맹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동군연합의 해체와 절대군주제 확립 [편집]

1520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독립을 요구하던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보게순 전투에서 스웨덴의 스투레 일파를 격파하고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분리주의자들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스웨덴은 다시 봉기하여 독립을 이룩하여, 결국 1523년 칼마르동맹은 해체되었다. 덴마크의 종교개혁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에 의해 추진되어 루터교가 받아들여졌으며, 한편 그 무렵에 노르웨이는 자치운동이 완전히 봉쇄당한 채 사실상 덴마크의 속국이 되어 버렸다. 크리스티안 3세 때는 원로원 등 귀족세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해서 경제의 발전 및 학자의 배출 등 국가번영의 기운을 보였으나, 그 후 덴마크의 프레데릭 2세 때 발트해의 주도권을 놓고 덴마크·스웨덴·폴란드·뤼벡 사이에 ‘북방 7년전쟁’이 일어났고,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 때는 2차에 걸친 스웨덴과의 싸움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 덴마크의 프레데릭 3세는 귀족세력과 대립하는 도시부르주아 및 루터교 성직자와 결합하여 왕위의 세습제를 승인받고, 1665년에는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하였다.

근대 덴마크 [편집]

1788년 농노제가 폐지되고, 1797년 자유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이 성립되어 덴마크의 경제가 활력을 얻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고 나폴레옹 편에 서게 된 덴마크는 영국·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국과 싸운 끝에, 1814년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고 4세기에 걸친 노르웨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영토는 현재의 덴마크와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로 국한되었다. 국내적으로는 프레데릭의 절대왕정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1842년에는 입헌적 대의정치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1849년 덴마크의 프레데릭 7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전제정치를 포기하고, 자유헌법을 성립시켜서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또한 1864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배하여 홀스텐(홀슈타인)과 슬레스비(슐레스비히)를 상실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1920년, 북슐레스비히를 수복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 바로 근처였기 때문에 민간인 상선들이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어 1944년까지 고초를 겪었다. 덴마크에 사는 사람들 중 유대인들이 독일군에게 끌려갔으나 중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비율이 미미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독일군들이 빼앗았다. 1945년 5월에 덴마크 전체가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되었다. 1944년에는 덴마크의 영토였던 아이슬란드가 독립하게 되었다.

한국 전쟁과 덴마크 [편집]

한국 전쟁 당시 덴마크는 의료 지원을 했는데 병원선 유틀란트 호를 보내 유엔군과 민간인 구호활동을 크게 폈다. 전쟁 후 병원(국립의료원/메디칼센터)을 지어 한국의 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리 [편집]

인공위성에서 본 덴마크.

덴마크는 윌란 반도와 여러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빙하 침식에 의해 산이 별로 없으며, 평야가 많다. 예전에는 황무지가 많았으나 개간되었다.

행정 구역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덴마크의 행정 구역입니다.

수도코펜하겐이다.

기후 [편집]

정치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덴마크의 정치입니다.

덴마크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의원 내각제정부가 구성되는 입헌 군주국이다. 현재의 국가 원수는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이며 정부의 수반은 총리가 맡고 있다. 2007년 총선 결과 자유당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이 총리직을 3번째 연임했다.[1]

주민 [편집]

주민은 게르만계의 덴마크인이 대부분이며 다른 민족은 적게 존재한다.

언어 [편집]

덴마크어공용어이다. 덴마크인과 노르웨이인은 서로 자국어로 이야기해도 무리 없이 서로 통한다. 영어독일어, 프랑스어도 외국인들 사이에서 사용된다. 덴마크의 문자 해독률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종교 [편집]

루터교국교로 인정받으며 그 외에 감리교, 모라비안, 구세군 등의 다른 개신교 종파들과 동방정교회가 존재한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는 0.55% 존재한다. 이슬람교, 유대교 등의 다른 종교는 아주 적게 존재하며, 특히 이슬람은 아랍 세계이란에서 온 이민들이 믿는다.

교육 [편집]

이 나라는 문맹률이 매우 낮은 나라이며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이 나라의 자치령인 페로 제도그린란드 역시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군대 [편집]

이 나라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한다.

경제 [편집]

이 나라의 자치령인 페로 제도그린란드2005년부터 지리는 물론이고 경제·외교적으로도 자치를 얻었다. 덴마크 본토 또한 세계적인 경제 수준을 자랑한다. 손꼽히는 낙농 국가이며, 낙농 제품이 큰 수출품 중의 하나이다.

문화 [편집]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이 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오랫동안 같은 군주 밑에서 연합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형제의식이 강하다.

대한 관계 [편집]

한국 전쟁대한민국에 병원선 유틀란트 호로 의료 지원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병원선의 의료 기자재를 한국에 기증하고 한국에 국립의료원을 설립하여 한국의 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2007년 현재 덴마크에는 약 9000명의 한국 입양인이 있으며 교민은 250여 명이 있다. 한국 대사관, KOTRA, 한인교회, 한국센터, 한글학교가 있고 정한친선협회, 유틀란트 모임, 코리안 클럽, 한인회가 있다.

 

 

내공과 체텍 바람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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