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코너 돌면 상생·공존의 생명화 시대 펼쳐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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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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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선진화·디지털화의 역설
선진국일수록 빨리 퍼져 큰 피해
거리두기 탓 ‘호저의 딜레마’도

러시안룰렛 같은 일상 생활
생명의 가치는 곧 자유의 가치
‘나 살고 너 살자’만이 해답

상대적으로 피해 적은 한국
상생 원리 알아 마스크 열심히 써
남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 덕
[SUNDAY 인터뷰] 이어령 전 장관의 코로나 1년 성찰
이어령 전 장관은 코로나19로 보낸 지난 1년을 성찰하며 "이제 상생·공생·공존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해 2월 촬영한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역병이 창궐해 전 세계를 뒤덮은 지 1년. 세상이 바뀌었고, 우리의 삶은 달라졌다. 공포와 불안과 고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미증유의 사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87) 전 문화부 장관에게 물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단단했다.


Q : 코로나19로 보낸 지난 1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요.
A : “한국인들은 누구에게서도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코로나의 역설’이라 부르겠습니다. 네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우선 글로벌의 역설입니다. 전 세계가 촘촘하게 이어졌고 누구나 어디로든 갈 수 있었죠. 그런데 그 때문에 코로나19가 비행기의 속도로 퍼졌습니다. 하나의 질병이 동시에 전 세계에서 발병한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입니다. 그 결과 봉쇄가, 로컬화가 시작됐죠. 두 번째는 선진화의 역설입니다. 자유의 가치, 인권의 가치가 높은 나라일수록 피해가 더 컸죠. 그러다 보니 정부가 자유나 인권을 제한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 등장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희구하는 것은 자유와 인권, 글로벌인데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추구하면 곤란해지는 세상이 된 것이죠.”


Q : 여태껏 세상을 지탱해온 논리가 뒤집어지고 있군요.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A : “호저의 딜레마입니다. 호저는 고슴도치처럼 몸에 뾰족한 가시가 있습니다. 추우면 짐승들은 함께 모여 온기를 나누는데, 호저는 찔리니까 서로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혼자는 춥고, 모이면 아프고. 인간도 마찬가지죠. 혼자 있고 싶어하지만, 외로우니까 또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보편화 되면서 억지로 혼자 있게 된 사람은 더욱 외로워지고, 억지로 같이 있게 된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됐습니다.”

물음표가 씨앗, 느낌표가 꽃인 인생


Q : 우울증이 심해지는 ‘코로나 블루’, 홧병이 생기는 ‘코로나 레드’로 인해 가정불화와 이혼도 늘고 있다죠. 마지막 네 번째는 또 어떤 건가요.
A : “디지털의 역설입니다. 디지털을 만능으로 알던 사람들은 ‘아, 디지털만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지요. 온라인 수업만 하면서 학교에 못 가게 되니 오히려 선생님의 지도, 친구들과의 만남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디지털은 ‘접속’하는 것이고 아날로그는 ‘접촉’하는 것인데, 이 둘은 같이 가야 하거든요. 이것이 바로 제가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디지로그’입니다.”


Q : 이 네 가지 역설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혹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A : “아무리 강력한 군대가 있어도 코로나를 이길 수 있나요. TV 속보를 통해 죽음을 매일 매일 실감하는 가운데 ‘오늘은 안 걸렸구나’하고 안도하는, 러시안룰렛이 일상이 돼버렸어요. 그래서 생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는 것이 가장 귀중한 교훈이겠죠. 앞만 보고 달려오던 삶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나에게 이토록 소중한 생명을 주신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의 원천적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또 그동안에는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을 때 갔는데, 그런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자유와 생명은 같은 뜻입니다. 자유를 잃으면 다 잃는 것이죠. 그래서 생명의 가치는 곧 자유의 가치입니다.”


Q : 일찍이 ‘생명이 자본’이라고 강조했던 말씀이 코로나 시국에서 역설적으로 힘을 얻게 되었네요.
A : “코로나는 언젠가는 갑니다. 이 수난의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흥하는 국가와 쇠하는 국가가 갈리게 됩니다. 경주에서도 코너워크 할 때 순위가 바뀌죠. 우리를 포함한 모든 국가는 산업화, 정보화에 이어 코로나라는 코너를 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직진 코스를 달렸기에 레이스에 큰 차이가 없었죠. 이 코너를 돌고 나면 이제 생명화의 시대가 펼쳐집니다. 생명이 가장 중요한 테제가 되는 세상입니다. 앞으로 반생명적인 것들은 절대 발을 붙일 수가 없어요.”


Q : ‘생명화 시대’의 특징은 어떤 건가요.
A : “생명은 서로 같이 사는 것입니다. 상생하고 공생하고 공존하지요. 인간이 동굴에 살 때부터 박쥐와 같이 살았다는 사실은 전염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연구하는 데 있어 흥미로운 테마입니다. 사실 바이러스도 인간과 공생해 왔어요.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겨서 인간에게 달려든 것이죠.”


Q : ‘같이 산다’는 말이 왠지 짠하게 느껴지는데요.
A : “마스크를 예로 들어 볼까요. 마스크는 내가 걸리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옮기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언제든 피해를 볼 수도, 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걸렸다고 하면 쉽게 그를 욕하고 그가 속한 집단을 매도합니다. 흔한 말로 갑질하는 것이죠. 그런데 누군가에게 갑인 사람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을이 되지 않나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나 살고 너 죽자’(이기주의)나 ‘나 죽고 너 살자’(이타주의), ‘나 죽고 너 죽자’(물귀신)가 아닌 ‘나 살고 너 살자’(상호주의)만이 코로나 시국을 벗어날 수 있는 해답입니다. 인류는 포식에서 기생, 기생에서 상생의 ‘자리행 이타행(自利行 利他行)’의 단계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지요.”


Q : 이제 마스크는 삶의 일부가 돼 버렸죠. 마스크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게 됐으니 말입니다.
A : “자, 마스크를 꼭 정부가 쓰라고 하니까 쓰는 걸까요. 벌금을 때리니까 쓰는 걸까요. 정부를 위해 방역하는 게 아닙니다. 법이 그러니까 쓰는 게 아니라,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고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 것을 알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K방역 성공’의 본질입니다.”


Q : 우리 국민들이 마스크를 열심히 쓰긴 하죠.
A : “봉쇄하지 않고 개방했는데도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이 상생의 원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즉 남을 위해 흘려주는 ‘눈물 한 방울’을 가졌다는 거죠. 한국인의 이런 생명 사상은 위기가 왔을 때마다 발현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피니시를 잘 못 해.”

매 순간 마침표 찍어야 새 삶 가능

이어령, 80년 생각

Q : 그건 왜 그런가요.
A : “서구에서는 개인이 시시비비를 묻고 따지는 계몽주의를 18세기에 거쳤는데,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어요. 즉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힘이 좀 모자랍니다. 그럼 지속력이 떨어져요. 코로나 사태 한 방에 순식간에 구한말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없으면 남의 생각에 휘둘리기 쉽거든요.”


Q : 최근 출간된 회고 인터뷰집 『이어령, 80년 생각』도 한마디로 요약하면 ‘스스로 생각하라’인데요.
A : “먼저 말해둘 것은, 그 책을 위해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내 자랑하는 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어요. 남이 자기 자랑하는 글을 누가 읽겠어. 다만 ‘나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밖에 없는 내 생각을 내 머리로 풀어내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그것들이 합쳐져 창조적인 집단 지성이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지요. 누구나 ‘온리 원’의 천재로 타고 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인물 탐구론으로 접근해 달라고요.”


Q : 그게 어떤 삶이었습니까.
A :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에요.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죠. 품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왜 그런지 이유를 찾아내는 것.”


Q : 음력 설 연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소의 해’를 맞는 느낌을 말씀해 주시지요.
A : “이 기회에 밝혀둘 것이 있어요. 지금 유튜브에는 내가 2007년 1월 1일자 중앙일보에 쓴 소원 시 ‘날개’가 마치 지금 쓴 것처럼 나돌아 곤란한 인사를 받기도 하고, 또 내가 쓰지 않은 시가 내 이름으로 올라온 것들도 있어요. 모두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닌 덕담이기에 일일이 찾아서 삭제할 수도 없지만, 조금은 난감하지요. 그런가 하면 ‘소가 한 마리면 소원, 두 마리면 투우, 세 마리면 우하하’라는 유머를 적어 연하장을 보내온 독자들도 있습니다. 코로나의 우울 속에서도 웃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려는 내 이웃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기보다 마음이 울컥해지더라고. 글 쓰는 사람은 한 줄 쓰고 마침표를 찍어야 새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매 순간도 마침표 찍듯 매듭을 지어야 비로소 새 삶을 살 수 있겠지요. 우리 모두 이 코로나 시대를 큰 마침표 하나 찍어 보내고,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기를 기원합니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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