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에서 AI벤처까지 ... 74억으로 1500억 회사 키운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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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06.20. 오후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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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경제TalkTalk] 김세진 한국펀드평가 대표
김세진(65) 한국펀드평가 대표는 원래 잘나가는 이코노미스트(경제학자)였다. 그는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쉴러(Robert Shiller) 교수 지도 하에 경제학 박사 학위를 마친 뒤 미국 워싱턴주립대에서 4년간 경제학 교수 생활을 하다 귀국했다. 이후 한국 금융정책 브레인들이 모인 한국금융연구원에서 10년간 금융정책 분야 연구를 했다.

김 대표의 인생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크게 바뀌었다. 그는 2000년에 ‘한국리스크관리’와 ‘한국자산평가’를 창업, 이코노미스트에서 기업 CEO(최고경영자)로 변신했다. 이후 일부 회사를 매각하고 새 회사를 다시 창업하는 ‘연쇄 창업가’의 길을 걸었다. 매각한 회사까지 포함해 그의 창업 실적을 숫자로 종합평가한다면 74억원의 자본금이 1500억원 가치의 회사로 성장했다.

김세진 한국펀드평가 대표


IT(정보기술)나 바이오 같은 공학이나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자가 창업해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하지만 금융과 거시경제 정책을 연구하던 이코노미스트가 전공을 살려 창업해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금융 이론과 기업 경영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융 먹물’들 사이에서 김 대표는 연구 대상으로 꼽힌다.

김 대표는 최근에 한국과 일본에서 파괴적 혁신을 한 기업 경영자들을 분석한 ‘기업성공방정식: 파괴·혁신 기업가 정신’이라는 책도 냈다. 그는 어떻게 ‘금융 먹물’의 한계를 넘어 기업 CEO로 안착했을까?

김 대표는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분야만 골라 창업해 그 분야에서 1위를 유지한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지난 5일 오후 3시, 서울 세종로 광화문 빌딩 9층 김 대표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창문 너머로 세종대로와 서울파이낸스빌딩의 간판이 눈 아래 보였다. 9일 보완을 위해 추가 인터뷰를 가졌다.

창업 계기가 된 외환위기

임창열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앞줄 왼쪽)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가 1997년 12월 3일 오후 세종로청사에서 내외신 보도진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국제통화기금(IMF) 긴급자금지원 최종 협상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조선일보 DB

―창업하게 된 배경은?

“외환위기가 터진 이듬해인 1998년에 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는데 구제금융 제공 조건 가운데 하나가 국내에 채권시가(市價)평가제도를 도입하라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한국에 채권 시장이 발달하지 않아서 채권 가격을 평가할 때 매입 가격으로 회계 처리하는 바람에 시장가격보다 고평가 혹은 저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침 나의 예일대 박사 논문이 채권시가평가 모형이어서 카이스트 교수와 함께 한국형 채권시가평가모형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게 됐다. 이에 금융당국이 채권시가평가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이를 담당할 회사를 창업했다.”

로버트 쉴러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 노벨상 수상자인 그는 김세진 대표가 자산평가에 관해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을 당시 지도교수였다./마크 다이 포토저널리스트

―구체적으로 어떤 회사를 세웠나?

“금융 분야에 전문화된 회사들이다. 금융회사들의 위험관리 솔루션을 개발하고 컨설팅을 담당하는 한국리스크관리(구 이밸류)를 2000년 2월에, 한국자산평가(구 한국채권평가)를 그해 5월에 각각 설립했다. 이후 2008년에 한국펀드평가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한국AI사이언스’를 창업했다. 모두 4개 이상의 회사를 창업했다.”

독자들이 쉽게 접하기 힘든 금융전문 회사이니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회사씩 자세히 물어보기로 했다.

연쇄 창업가의 길을 가다

―한국리스크관리는 어떤 회사인가?

“100여개 금융회사와 공기업을 상대로 각종 리스크(위험) 관리 방안을 제시하고 컨설팅도 담당하고 있다. 2000년 2월 설립 당시에는 자본금이 4억원에 직원 4명이었는데 지금은 직원 50명에 회사 가치가 200억원 정도로 평가받는다.”

―한국자산평가는?

“채권의 가치를 평가하는 회사이다. 2000년 5월에 직원 10명, 자본금 40억원으로 시작했는데 2012년에 200억원 정도에 매각했다. 작년에 이 회사가 다시 다른 회사에 넘어갔는데 1000억원에 팔렸다고 하더라. 직원은 지금 220명 정도 된다고 한다.”

―현재 대표로 있는 한국펀드평가는 어떤 일을 하는 회사인가?

“각종 공모펀드의 투자 안전성과 가치를 평가해 등급을 매기는 일을 한다. 또한 국내 모든 연기금 및 공제회의 자산운용 성과를 평가하면서 온 국민의 노후자금을 지키는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2008년에 설립할 때 직원 5명과 자본금 30억원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직원 80명에 회사가치가 300억원 정도 된다.”

한국펀드평가가 매일 매일 분석해 홈페이지에 발표하는 펀드 수익률 분석표./한국펀드평가 홈페이지

―한국AI사이언스는?

“2018년에 직원 3명과 자본금 3억5000만원으로 설립한 벤처회사이다. 자연언어(NLU)를 사용하는 챗봇을 개발하고, 블록체인을 활용하는 특허도 갖고 있다. 자율주행차의 인식시스템인 3차원 라이더(lidar)를 개발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회사 가치를 20배로 키우다

―창업 실적을 평가할 수 있는 한국리스크관리-한국자산평가-한국펀드평가 3개 회사의 가치를 종합하면 창업 후 회사를 얼마나 성장시켰나? 자본금(회사가치) 기준으로 본다면?

“3개 회사의 창업 기준 자본금은 모두 74억원이다. 지금 이 3개 회사의 평가 가치는 1500억원 정도 된다. 모두 350여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다.”

김세진 대표는 기업가의 창의적 정신과 회사의 성장을 일차적인 경영 목표로 삼고 있다. 사진은 창조와 혁신의 대명사로 꼽히는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회장이 2019년 9월 기자회견에서 회사 장기 성장 전략을 발표하는 모습./AFP 연합뉴스

― 창업 이후 인력 구조조정을 한 적은 없나?

“창업 이후 회사마다 3~5년간은 적자를 냈다. 이후 사업이 안정되면서 계속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흑자를 유지한 덕분에 인력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내보낸 직원은 한 명도 없다.

다만, 아픈 기억도 있다. 2008년에 정부가 금융판매회사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해 기회를 선점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금융판매회사를 창업했다. 당시 제도상으로 가능한 보험종합대리점(GA) 회사를 설립했는데, 막상 정부가 금융판매회사 제도를 도입하지 않기로 하면서 3년 동안 약 30억원의 손해를 보고 회사를 대형 보험사에 매각한 사례가 있다. 창업 후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 재빠르게 구조조정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4가지 성공 비결

―남들은 한 회사를 창업해 성공시키기도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사업을 한 사람도 아닌데 4개나 되는 회사를 창업해 성공시킨 비결은?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남이 하지 않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둘째, 남보다 나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에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업계 최고의 기술력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만든 회사들은 모두 그 분야에서 국내 1위 업체들이다. 셋째, 체계적이고 강력한 영업활동을 하면서 업계 1위 자리를 고수했다. 넷째, 직원 10여명이 카이스트, 연세대, 성균관대 등에 박사 학위 과정을 밟도록 지원하면서 인재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하나씩 물어보자. 첫째,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사례를 들어달라.

“2000년에 설립한 한국채권평가는 국내 최초로 채권시가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모형을 직접 개발했다. 한국리스크관리는 국내 최초로 국내형 신용위험관리 모형을 만들었다. 한국펀드평가의 경우에도 온라인을 통한 성과평가 모형을 개발했다.”

채권 시장에서는 채권의 가격을 시가로 평가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사진은 기획재정부가 운영중인 국채시장의 구조도./기획재정부

―둘째, 업계 최고의 기술력은 어떻게 유지하나?

“우리 회사를 연구기반 회사라고 생각한다. 해외의 앞선 기술을 발 빠르게 도입하고, 고객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서비스를 정기적으로 계속 출시한다. 제조업 회사들이 신상품을 내놓듯이 말이다. 고객들에게 매번 새로운 느낌을 주어야 한다.”

―세 번째로 중요한 영업 활동은 어떻게 하고 있나?

“기업을 해보면 영업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 정기적으로 고객을 찾아가 고객에게 우리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고객이 우리에게 필요한 서비스가 어떤 것이 있는지 문의한다.”

막막했던 사업 첫 걸음

―학계에서 이론을 연구하다가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막막하지 않았나? 첫 단추가 매우 중요했을 텐데.

“처음 사업을 시작하니, 마치 그동안 구름 위에서 살다가 이제 땅 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경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처음하는 것이니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먼저 서점에 달려가 미국 경영학자인 조안 마그레타의 ‘경영이란 무엇인가?’ 등 경영, 기업, 마케팅 관련한 책을 많이 사서 읽었다. 그랬더니 사업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그림이 그려졌다.”

미국 경영학자 조안 마그레타./유튜브

―경제학자는 거시 분야인 국가 경제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에 정치인이나 관료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미시 분야인 기업경영에 손을 대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학부 때 경영학(연세대 경영학과)을 전공한 덕을 좀 봤나?

“학부 때 경영학을 해서 창업한 것은 아니다. 창업은 우연이었다. 경영학을 공부해 본 경험이 도움은 됐다.”

―왜 경영학을 전공하다가 경제학으로 바꾸었나?

“경영학과 다니면서 경제학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들었는데, 사회의 많은 문제를 경제학을 통해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경제학에 관심을 두게 됐다.”

한국경제의 3가지 문제점

―최근에 가치 창출과 파괴적 혁신의 기업가 정신을 가진 한국과 일본의 기업가들을 분석한 책을 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자서전을 제외하면 기업 CEO가 직접 책을 써서 출간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김세진 대표가 최근 일본 게이오대의 야나기마치 이사오 교수, 연세대의 전기석-박영렬 교수와 함께 쓴 책 '기업성공방정식'.

“사업을 시작한 뒤 다른 한편으로는 사업의 성공과 실패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학자적인 관점에서 고민하게 됐다. 이번 책 출간도 이 같은 고민의 연장선이다.

알다시피 한국경제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한 케이스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유일하게 빈민국에서 부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1960년대에 한국경제는 아프리카 가나와 유사했으나 1960년대부터 2000년까지 연평균 10%라는 고도성장을 유지해 이제 GDP(국내총생산) 기준으로 세계 10위권 경제가 됐다. 이러한 쾌거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현실이다.”

제철소의 용광로는 개발도상 시대 한국경제의 활력과 번영을 상징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경제의 엔진이 식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사진은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한 고로(용광로)에서 쇳물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조선일보 DB

―예전에 한국경제를 다루던 경제학자 시절의 고민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경제가 다시 활력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국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 혁신과 창조를 가능케 하는 제도와 정부, 둘째로 혁신과 창조를 만들어내는 기업가, 셋째로 혁신과 창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국민이 필수조건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서 한국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세가지 조건 모두가 삐걱거리면서 경고등이 켜진 상태라 말 할 수 있다.

미국 MIT대의 애쓰모글루 교수와 하버드대 로빈슨 교수의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읽어 보면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와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를 비교하면서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포함한 착취적 제도 하에서는 국가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내가 책을 쓴 이유는 이 세 가지 조건 가운데 두 번째인 혁신과 창조를 만들어내는 기업가 정신에 대해 내가 겪은 경험에 근거해 성공 사례를 분석해 본 것이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기업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기업가들이 매우 어렵지만, 동시에 난국을 타개할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포퓰리즘은 국가를 망하게 만든다고 역설한 대런 애쓰모글루 미국 MIT대 교수./위키피디아

―코로나 사태로 기업인들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다. 이들이 기업 경영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기업가를 4명만 꼽는다면?

“일본에서는 전자기기업체인 키엔스의 다키자키 다케미쓰 회장과 전자상거래회사인 라쿠텐의 미키타니 히로시 회장, 한국에서는 LG생활건강의 차석용 부회장과 카카오의 김범수 이사회 의장을 꼽을 수 있다.”

기업성공방정식 ①

다키자키 다케미쓰 日 키엔스 명예회장

―키엔스는 어떤 회사인가?

“‘Key of Science’에서 만든 조어이다. 공장자동화 및 검사 장비를 개발 생산하는 기업이다. 예를 들어 바코드 리더기, 레이저 마킹기, 비전 시스템, 측정 시스템, 마이크로스코프, 센서 및 정전기 제거 시스템 등을 만든다.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일본의 전기제품 회사인 키엔스의 오사카 본사./위키피디아

―경영 실적은?

“2020년 3월 기준 매출액이 5조8625억원, 영업이익 2조7763억원이다. 제조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률이 무려 47.4%라는 경이로운 경영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매출 비중을 보면 일본 국내가 46%이고, 해외가 54%이다.

특히 최근 4차 산업혁명을 맞아 국제적으로 제조업 분야에서 공장 스마트화와 RPA(Robotic Process Automation)가 화두인데, 이들 분야에서 키엔스가 핵심 부품과 공정을 제공하고 있어 미래 전망도 매우 밝다.”

―다키자키 명예회장은 어떤 사람인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27세인 1972년에 키엔스의 전신인 리드전기를 창업해 일본의 대표적인 제조 회사로 성장시켰다. 키엔스는 2020년에 도쿄증권거래소 시가총액 기준으로 6위에 올랐다.”

다키자키 다케미쓰 일본 키엔스 명에회장./위키피디아

―그의 성공 요인은?

“첫째, 중간대리점을 쓰지 않고 고객의 생산라인이나 연구개발 부문을 직접 방문해 자사 제품을 판매하는 직판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직판 방식은 고객의 수요를 현장에서 파악해 고객에게 맞춤형 컨설팅과 제품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또 대리점수수료가 없기 때문에 높은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다.

둘째, 팹리스(fabless), 즉 생산 공장을 갖지 않는 무공장 경영을 추구하고 있다. 생산 공장이 없는 대신, 효율적인 생산관리 시스템을 유지해 협력업체로부터 즉시 납품 받는 것을 가능케 하고 있다. 키엔스는 창업 때부터 신속 대응(quick response)을 핵심 이념으로 삼고, 국내와 해외 고객에게도 주문을 접수한 당일에 출하하고 있다.

셋째, 늘 세상에 없는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키엔스 본사 건물에는 화석 조형물이 있는데, 과거의 상품과 서비스는 바로 화석이 된다는 의미로,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기업성공방정식 ②

미키타니 히로시 日 라쿠텐 회장

라쿠텐은 일본 내 온라인 쇼핑몰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11억명의 글로벌 멤버십을 보유하고 있다. 여행, 은행, 증권, 신용카드, 모바일 메신저, 프로스포츠 등 여러 업종에 걸쳐 30여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라쿠텐의 미키타니 히로시 회장은 어떤 사람인가?

“1997년 회사 창업 당시 일본 내에는 온라인 쇼핑 사업자가 대기업 계열사들을 포함해 수백 개에 달했다. 미키타니 회장은 작은 서버 한 대와 직원 2명을 데리고 창업해 기존의 쟁쟁한 회사들을 물리치고 라쿠텐을 일본 내 1등 온라인 쇼핑 회사로 키웠다.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전자상거래의 생태계를 구축했다.”

미키타니 히로시 일본 라쿠텐 회장./위키피디아

―미키타니 회장의 경영전략은?

“사업 초기부터 고객 만족을 최우선으로 삼고, 라쿠텐에 입점하는 온라인 사업자들이 편리하고 저렴하게 쇼핑몰을 운영할 수 있는 RMS(Rakuten Merchant Server)를 구축했다. 그리고 입점업체에 쇼핑몰 구축부터 운영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원스톱 지원 체제를 제공했다. 또한 처음부터 국제화를 추진했다. 언어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기업의 사내 영어 공용화를 실행했다.”

일본 최대 전자상거래 플랫폼인 라쿠텐의 홈페이지.

―라쿠텐은 독특한 기업문화로 유명하지 않은가?

“미키타니 회장은 ‘오늘은 어제의 나를 이겨야 한다’라는 구호 아래 라쿠텐만의 기업문화를 정착시켰다. 첫째, 항상 개선하고 항상 전진한다. 둘째, 철저한 프로 의식을 갖는다. 셋째, 가정-실행-검증을 통해 시스템을 만든다. 넷째, 고객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다섯째, 스피드가 중요하다.”

일본 경영자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제 한국 경영자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이다.

기업성공방정식 ③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치약과 칫솔, 화장품 등 각종 생활용품을 만드는 LG생활건강의 차석용 부회장은 한국에서 이미 유명한 경영자인데 그의 어떤 점을 높이 평가하나?

“차 부회장은 2004년 12월에 상황이 어려운 회사에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이후 2021년 현재까지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LG생활건강의 시가총액을 59배 이상 올리는 경이로운 성과를 만들었다. LG생활건강은 2004년에는 매출 1조원에 영업이익이 600억원 수준이었다. 그런데 차 부회장이 맡은 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2020년에는 매출 7조8445억원, 영업이익은 1조2209억원을 달성했다. 매출은 약 7.8배, 영업이익은 20배 증가했다. 그의 재임 중에 주가도 2004년말 2만7450원에서 2021년 2월초 160만원대로 59배 올랐다. 놀라운 경영 실적 아닌가?”

차석용 LG생활건강 대표이사 부회장./조선일보 DB

차석용 부회장이 이끈 LG생활건강의 지난 10년간 주가 추이./네이버

―성공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 20여 차례 이상의 체계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뷰티-음료-생필품의 삼각편대를 구성해 안정적인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둘째, 고가 화장품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셋째, 지속적인 내부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보유하고 있는 사내의 좋은 자원을 최대로 활용하는 기업문화를 구축했다. 넷째, LG그룹이 외부에서 영입된 그가 자율권을 가지고 경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줬다.”

―만약 해외에서 차 부회장과 비슷한 경영 사례를 찾는다면?

“미국 종합전자기업인 텔레다인(Teledyne)의 헨리 싱글턴 회장과 유사하다. 싱글턴 회장은 미국 MIT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명한 과학자이다. 1960년대에 텔레다인을 설립해 체계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사업다각화를 했고, 공격적인 자사주 매입 등을 통해 회사 가치를 올렸다. 1963년에 텔레다인에 1달러를 투자했다면, 싱글턴 회장이 은퇴한 1990년에는 180달러가 되어 있었다. 재임 동안 회사 가치가 무려 180배 오른 셈이다. 차 부회장이나 싱글턴 회장은 체계적인 M&A를 통해 사업다각화를 이룩하면서 기업의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 종합전기제품업체인 텔레다인을 창업한 헨리 싱글턴 회장./미국공학회

―같은 업종의 아모레퍼시픽이 한 때 LG생활건강보다 더 주목을 받았는데.

“아모레퍼시픽은 2015년에 시가총액이 25조원에 달하는 등 매우 잘나갔다. 당시 LG생활건강의 시가총액은 13조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사업이 번창할 때 아모레퍼시픽은 서울 용산 신사옥 건설에 많은 자본을 투입했다. 반면 LG생활건강은 자본을 사업다각화에 사용했다. LG생활건강이 효율적인 자본 배분에 성공하면서 지금은 두 회사 사정이 역전이 됐다. 2021년 2월 현재 아모레퍼시픽의 시가총액은 13조원인 반면, LG생활건강의 시가총액은 25조원 수준이다.”

기업성공방정식 ④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은 1999년에 한게임을 창업해 2001년 네이버와 합병시켜 NHN을 출범시켰다. 이후 일찍이 모바일 시대를 예견해 2010년에 카카오톡을 출시해 10년 만에 카카오를 시가총액 40조원의 국내 9위 기업(시총 기준)으로 성장시켰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카카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의 성공 요인은?

“첫째, 언제나 수익모델 발굴을 우선시했다. 일찍이 한게임을 창업해 수익모델 때문에 고전했고, 이것이 네이버와의 합병 동기가 됐다. 그래서 카카오톡 출범과 함께 처음부터 수익모델 발굴에 노력해 ‘애니팡’ 등 카카오 게임 등의 수익모델을 발굴했다.

둘째, 2014년 다음과 합병한 데 이어, 구글의 전략을 벤치마킹해 다양한 벤처기업들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카카오택시 등 O2O(Online to Offline) 서비스를 구축했다.

셋째, 카카오페이 등 온라인 지급결제, 카카오 쇼핑 및 선물하기 등을 통해 온라인 생태계를 구축했다. 또 카카오뱅크와 카카오증권을 설립하고 카카오 디지털 보험사 설립을 추진하는 등 금융 분야로 전광석화처럼 진출했다.”

―그러나 카카오의 문어발식 확장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모두 부도 위기에 몰린다는 지적도 있다.

“맞는 말이다. 미용실 예약, 세탁 예약, 가사 도우미 예약 같은 서비스도 카카오가 하는데, 이런 것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까지 하면 영세 기업들이 모두 죽으면서 디지털 빈곤이 더 심화한다. 모든 플랫폼 사업자들이 진정으로 고민해야 되는 점이다. 돈 되는 것은 모두 다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나서기 전에 하지 말아야하는 것을 스스로 자제해야한다.”

―김범수 의장이 10조원 가치의 사재 가운데 절반인 5조원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발표했다.

“매우 높게 평가해야 한다. 기업가 정신의 요체는 기업보국(기업을 통해 사회와 국가에 봉사한다)인데, 이중 번 돈의 사회 환원이 실천하기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

4명의 성공 비결을 요약하면

―4명 기업가의 성공 비결을 요약하면 공통점은?

“개별 기업마다 환경과 업종이 다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대략 4가지 정도의 공통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첫째, 분명한 가치 창출을 통해 고객 만족을 최우선시했다. 둘째, 사업 기회를 포착하고 전광석화처럼 사업을 펼쳐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셋째, 다소 공격적이나 체계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빠른 시간 내에 사업다각화를 구축했다. 기업의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한 것이다. 넷째, 위험을 감수하고 어려운 환경을 헤쳐 나가면서 기업을 키우려는 강한 의지, 곧 기업가 정신이 투철했다. 이들은 불굴의 기업가 정신을 10년, 20년 계속 유지해 나갔다.”

코로나 사태의 난국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 뿐 아니라 기업인들의 창의적 정신도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사진은 예전 한 기업의 '기업가 정신' 관련 사내 방송 프로그램./조선일보 DB

창업자들이 명심해야 할 4가지

시계가 4시 30분을 넘어가면서 인터뷰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 됐다. 김 대표는 경제 이론과 창업 경험을 모두 갖춘 ‘이코노미스트 겸 비즈니스맨’ 답게 답변이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었을 뿐 아니라 현장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이 돋보였다. 그가 40년 동안 축적한 경제 연구와 경영 현장 경험을 모두 종합해 창업 희망자들에게 해 줄 조언을 부탁했다.

―창업 희망자나 성공적인 기업인이 되려는 사람에게 해 줄 말이 있다면?

“첫째, 제공하고자 하는 상품 및 서비스가 고객에게 어떤 새로운 가치를 전달하는가를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시장의 경쟁상품 및 서비스와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를 본인뿐 아니라 고객이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아이디어 또는 남이 쉽게 베낄 수 있는 상품 및 서비스를 가지고 창업한다면 백전백패가 된다. 확실한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

둘째, 작게 시작하고 크게 생각하라(Start Small, Think Big). ‘위대한 기업을 위한 경영전략’을 쓴 미국의 경영사상가 짐 콜린스는 위대한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겁나게 엄청난 목표(hairy audacious goal)를 세워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목표는 장대해도 시작은 소박하게 해야 한다. 동네에 라면집을 연다고 가정할 때, 향후 전국에 수천 개의 프랜차이즈 가게를 운영할 것이라는 목표는 세우더라도, 일단 새로 오픈하는 조그마한 가게에서 서울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짐 콜린스가 만났던 위대한 기업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겸손하다는 것이다. 최근 바이오 등 벤처 붐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데, 창업의 목표가 최고 품질의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여 국내외 최고의 기술회사가 되는 것이어야 하는데, 코스닥시장에 상장하는 것으로 변질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돈을 버는 것이 매우 큰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지만, 머니게임에 빠질 경우 사업은 바로 사기가 되기 쉽다.

미국의 유명한 경영사상가 짐 콜린스./짐 콜린스

셋째,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고 철저한 자금계획을 세워야 한다. 스타벅스의 슐츠 회장의 자서전을 보면 1985년 창업 시에 18억원을 모으기 위해서 200여명이 넘는 투자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투자를 부탁했다. 사업을 시작해 1992년 상장하기까지 늘 운용자금이 부족해서 밤마다 회계장부를 끼고 고민했다고 한다.

이처럼 회사가 제자리를 잡기까지는 회사를 운영하거나 창업하는 경우 모두가 돈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창업 후 2~3년을 죽음의 계곡을 지나가는 시간이라고 한다. 대부분 신생기업은 2년이 지나면 창업자금이 소진되고 적자에 시달려 추가 투자도 받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창업 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고 3년 내 쓸 자금의 계획을 미리 세워 놓아야 한다. 특히, 제 3자에게 받은 투자금을 본인 돈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스타벅스를 창업한 하워드 슐츠 회장은 창업 초기에 자금난을 많이 겪었다고 털어놨다. 사진은 2007년 스타벅스 캐나다 지점 개장 때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위키피디아

넷째, 실물시장도 주식시장과 마찬가지로 불확실성이 크며 시장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오늘 날개 돋친 듯 잘 팔리는 상품이 내일이면 전혀 안 팔려 재고만 늘어날 수 있고, 내가 구축한 비즈니스모델이 내일되면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상품다각화, 고객다각화는 물론이고 회사가 잘 나갈 때 인수-합병(M&A)을 통한 사업다각화를 추진해야 한다.”

다시 학자의 열정으로

김 대표의 답변은 길었지만 매우 논리적이고 명료했다. 이코노미스트의 분석력과 비즈니스맨의 경험을 모두 갖춘 덕택이다. 김 대표는 “20년간 학계에 있었고, 20년간 실물 경제를 다루었기에 균형감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20년만에 처음 책을 쓰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앞으로는 예전 학자의 경험을 살려 매년 한권씩 책을 쓴다는 계획 하에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디지털 빈곤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을 가로질러 나오는데 왼쪽 유리벽에 ‘금융과학연구소’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직원들 서너명의 자리가 보였다. 김 대표가 이제 막 걸음마를 하고 있는 ‘한국AI연구소’라고 했다. 김 대표의 나이는 60대였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사업에 대한 열정은 30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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