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섭의 플러그인] ‘내 몸이 증거다’ VS ‘과학의 사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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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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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등 가습기 살균제 제조·유통사 관계자들에 대해 지난달 1심 법원이 내린 무죄 판결을 두고 불공정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많은 피해자가 유명을 달리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자가 여전히 고통 속에 신음 중이다. 그런데 법적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희한한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정부의 살균제 피해 공식 인정도 법원의 판단을 바꾸진 못했다.

국민은 재판 결과에 매우 비판적이다. 최근 전국 만 18세 이상 응답자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76.7%는 이번 판결을 “불공정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의 법 감정과 법원 판단과의 거리가 상당하다. 살균제 피해에 대한 국민의 법 감정이 어떠한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가습기 살균제 피해, 무죄 판결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 불공정 논란

과학적 분석 자료, 수용 여부 쟁점

‘완벽한 기준’ 요구로 결과 불인정

‘법원, 과학적 방법 곡해’ 비판 불러

피해자 고통 여전… 종합 판단 필요

법원 판단과 국민의 법 감정과의 괴리 현상은 꽤 자주 보이지만, 무엇보다 이번 판결은 과학적 연구 결과가 재판 과정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왜곡되는지를 잘 보여 줬다는 점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다. 이 부분은 앞으로 항소심 재판에서도 유·무죄를 가르는 결정적인 잣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살균제 피해 사건 자체가 과학적 연구 결과의 수용 정도와 깊이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살균제 참사의 시작은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해 상반기 6명의 산모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폐 질환으로 숨졌다. 조사 결과 가습기 살균제 흡입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당시 사용되던 살균제 성분은 두 계열로 나뉜다. 이번에 무죄 판결을 받은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가 사용한 원료(CMIT·MIT)와 옥시·롯데마트·홈플러스가 쓴 원료(PHMG·PGH)로 대별된다. 옥시와 롯데마트, 홈플러스 관계자들은 사건 발생 5년 만인 2016년 재판에 넘겨졌고, 2018년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제품의 원료에 대해서는 독성 유발 여부가 명확하지 않아 기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제조사 제품 이용자들이 계속 폐 질환과 천식 등 피해를 호소하고, 환경부 실험에서 위험성이 확인되면서 2019년 재판에 넘겨졌다. 최고 쟁점은 3개 사가 사용한 살균제 원료의 유해성 여부였다.

그런데 원료를 분석한 과학적 연구 자료에 대한 재판부의 해석이 논란을 불렀다. 재판부는 법적 논증과는 성격이 다른 과학적 연구 방법의 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과학적 인과 관계의 논리를 법적 논증 기준에 맞춰 해석한 것이다. 재판부는 원료의 유해성에 대한 연구 결과와 전문가 증언이 단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꼽았다. 한마디로 원료의 유해성을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이를 “법원이 과학적 방법론에 무지한 결과”라고 보았다. 과학적 연구에선 ‘확실’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데, 법원이 이를 단정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곡해했다는 것이다. 측정 오류 등 변수와 나중에 있을지 모를 반증 가능성까지 고려한 과학적 표현법을 법적 잣대로 재단한 게 무죄 결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피해자들이 아무리 “내 몸이 증거”라며 피 맺힌 울음을 터뜨려도 100% 확실한 인과 관계를 충족할 수 없으면 재판부를 설득할 수 없다.

법원은 보통 과학적 사실이 중요한 판단에서 더 많은 자료와 연구를 요구한다. 소송을 당한 기업은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에 결점이 없는 완벽한 연구 결과는 없다. 이번처럼 사용된 제품은 이미 사라졌고, 이제 더는 이 제품 이용자도 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면 완벽한 인과 관계 입증은 불가능하다. 이런 구조라면 아무리 피해가 분명해도 가해자 없는 경우가 빈발할 게 뻔하다.

법원의 판단 영역이 더 넓어질 필요가 있다. 피해자에게만 엄격한 인과 관계를 요구할 게 아니라 가해 기업의 범행 의도와 의무 소홀 등에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또 수치 자료로는 알 수 없는 개별 피해자의 임상·병리학적 분석, 유전력, 환경 요소까지 종합적 판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적 연구의 평가가 사법적 판단에 좌우되는 ‘과학의 사법화’ 폐해를 벗지 못한다. 400여 년 전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이가 ‘천동·지동설 법정’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양상을 21세기 첨단 시대에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환경부 산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지원 종합포털에 따르면 지난달 말 가습기 살균제 피해 신청자는 7216명, 사망자는 1622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화학 물질 참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많은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우리의 사회 정의 역시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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