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석의 電影雜感]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세자매'…하루 차이로 극장행 택한 한국영화 두 편에서 본 '희망'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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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05   |  발행일 2021-02-05 제39면   |  수정 2021-02-05

지난달 27일 개봉한 '세자매'는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각자 불운한 과거를 묻어둔 채 살아가는 세 명의 자매가 주인공이다. 버릇없는 딸과 가정에 무관심한 남편에게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첫째 '희숙', 성가대 지휘자이자 교수 남편을 두고 윤택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중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지닌 둘째 '미연', 날마다 술과 함께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언행을 쏟아내며 슬럼프에 빠진 극작가인 셋째 '미옥'. 이렇게 서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던 세 자매는 아버지의 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면서 그간 말할 수 없었던 기억의 매듭을 풀며 폭발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나는.나를.해고하지.않는다(이태겸.연출)_poster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포스터.
이승원.감독

'세자매'
각자 불운한 과거 묻어둔 자매 이야기
오랜만에 모여 기억의 매듭 풀며 폭발
문소리·김선영 등 완벽한 캐릭터 소화

대학로서 오랜기간 연극대본 작업 연출
이승원 감독, 주변 인물이야기 연장선


미연을 맡은 문소리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로 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상(신인배우상)을 수상한 배우이자 '여배우는 오늘도'의 각본을 쓴 시나리오 작가이며 연출을 맡은 감독이기도 하다. 거기에 이번엔 세자매 공동 제작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희숙으로 분한 배우 김선영은 감독의 전작에 모두 출연하며 그간 '응답하라 1988'을 비롯해 여러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생동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재미있는 건 문소리보다 두 살 어리지만 영화에선 맏언니로 나온다는 것. 미옥으로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 이후 오랜만에 돌아온 배우 장윤주 역시 민낯과 탈색한 머리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한다.

연출을 맡은 이승원 감독은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SAC)에서 방송영화제작을 전공했지만 대학로에서 오랫동안 연극 대본을 쓰거나 연극 연출을 해왔다. 그러다 2004년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대사와 두 남녀 배우의 호연이 돋보였던 단편영화 '모순'을 연출하고 2005년 제6회 전주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받으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2015년 제작비 400만원을 들여 만든 첫 번째 장편영화 '소통과 거짓말'이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과 올해의 배우상(장선)을 수상하며 화제로 떠올랐다. 차기작 '해피뻐스데이'는 미니멀한 전작과 달리 10배 늘어난 제작비(그래봤자 '고작' 4천만원이다)에 인물 구성도 다양해지면서 주변부 인물들에 주목해 온 감독의 성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배우 김선영과 부부 사이이기도 한 이 감독은 후배 이돈구 감독의 '팡파레'에선 배우로 나오기도 했다.


세자매(이승원.연출)_poster
'세자매' 포스터.
이태겸.감독
이태겸 감독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권고사직 거부, 하도급업체서 고군분투
신예 유다인 강단·섬세한 연기로 인상
부당하게 지방 파견된 여성 실화 그려
이주노동자 슬픈 소동 그린 단편 주목
이태겸 감독, 장편으로 12년만에 복귀


세자매보다 하루 늦게 개봉한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7년이나 근무했던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받은 '정은'이 이를 거부하자 하도급 업체로 파견을 가면 1년 후 복귀시켜주겠다는 제안을 받아 그 시간 동안 이를 악물고 버티며 자기 자리를 되찾기 위한 고군분투를 그린 이야기다. 자기 자리를 찾아보려 하지만 하도급 직원들은 모두 정은을 불편해하고 난생처음 겪는 현장 일은 낯설기만 하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회사에 헌신했지만 이유도 모른 채 회사와 분리되는 정은의 상황은 납득할 수 있는 이유 하나 없이 회사로부터 해고당한 수많은 노동자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한다.

반기는 이 하나 없는 하도급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강단 있게 자신의 자리를 찾는 정은으로 분한 배우 유다인은 2011년 개봉한 민용근 감독의 '혜화, 동'에서 열여덟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된 '혜화'를 섬세하게 연기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혜화, 동'으로 유다인은 제48회 대종상영화제와 제32회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에 노미네이트됐고 제3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과 제36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을 수상했다. 이번 영화에 캐스팅이 된 것도 '혜화, 동'에서 펼친 내면연기 때문이었다고. 정은을 묵묵히 도우며 응원하는 하도급의 '막내' 역을 맡은 배우 오정세는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인 정은에게 말없이 안주를 건네거나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오직 원도급 복귀만을 목표로 하던 정은의 시야를 넓혀준다. '정은'에 비해 대사양이 많지 않고 등장하는 신도 적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존재감도 드러낼 수 있었던 덕에 오정세는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상을 수상했다.

이태겸 감독은 경희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999년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영화 워크숍에서 6개월 동안 뒤늦게 영화수업을 받았다. 이후 2003년 울산 현대자동차 직원들의 억울한 사연을 담은 다큐멘터리 '1984, 우리는 합창한다'와 2005년 악덕업주에게 복수하려는 이주노동자들의 슬픈 소동을 그린 단편영화 '복수의 길'을 완성한 이 감독은 2008년 아역배우 김영찬을 기용해 장편영화 '소년 감독'을 내놓는다. 개발로 없어질 위기에 놓인 아버지의 벽화를 8㎜ 카메라로 찍어 남기려는 시골소년의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제10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SIYFF시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제작하기로 했던 영화들이 차례로 무산되면서 우울증을 겪고 있을 때 '사무직 중년 여성이 지방 현장직으로 부당 파견이 되었는데 그곳에서 굉장한 치욕을 겪었음에도 결국 버텨냈다'는 기사를 우연히 보고 영감을 얻어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기획했다고. 영화 현장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경험이 기사 속 중년 여성과 같다고 여기면서 첫 장편영화로부터 무려 12년 만에 차기작을 만들어 복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일에도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 창작자로서 놓치고 싶지 않은 태도를 지닌 감독의 복귀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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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어도 코로나19의 위력은 가실 줄 모른다. 그래도 올 하반기엔 백신 개발과 접종 이야기가 나오니 그나마 희망을 가져도 될런지. 작년 한 해 그야말로 폭망한 한국영화계 소식으로 연초부터 코로나 블루를 제대로 겪고 있던 차에, 하루 차이로 개봉하는 한국영화 두 편이 우연이겠지만 마치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포스터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다. 두 편 모두 결국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코로나19 사태에도 넷플릭스로 가지 않고(혹은 가지 못하고!) 여전히 극장행을 택하는 이 영화들을 어여삐 보아주시기를.

(영화감독, 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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