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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진시황제 39살에 중국통일, 썩은 생선 최후 ‘처참’ [어제TV]



39살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의 최후는 어땠을까.

2월 1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6회에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을 달성한 진시황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방송에서 조관희 교수는 사마천의 <사기>를 중심으로 진시황제에 대해 강의했다. 이날 조관희 교수는 “차이나(china)도 진(chin)이라는 말에서 온 거다. 진이 로마로 건너가 서양 사람들이 차이나로 바꿔 불렀다”며 진나라의 위력을 말했다. 황제라는 말을 처음 만든 것 역시 진시황. 시황제는 자신이 진나라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였다고.

이어 조관희 교수는 진시황제가 인재 등용, 군대와 전략,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천하통일을 이뤘던 당시 39살로 첫 번째 시황제에서 만만세까지 진나라를 이어가려 했다고 말했다. 그를 위해 진시황제는 중국 내에서 따로 사용했던 글자들과 화폐도 통일한다고.

조관희 교수는 “도로도 마찬가지다. 진시황 때 만든 길을 치도라고 한다. 치도를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뻗어간다. 이것은 황제의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지방 반란도 재빠르게 진압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며 “시찰을 많이 했다. 한 번 떠나면 1년 정도 걸릴 정도로. 5번 정도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워커홀릭 일벌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시황제 죽음 3년 후 진나라는 멸망했고 패망의 원인으로 꼽히는 하나는 만리장성. 진시황제는 전국을 통일했지만 흉노족은 못 당했고 만리에 달하는 거대한 장성을 세웠다. 새로 쌓은 것도 있고 보수한 것도 있다. 나라를 보호하려던 만리장성 사업이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진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됐고 눈이 와도 멈출 수 없었다. 잠은 길거리에서 잤다. 산이라 변변한 숙소가 없었다고. 먹는 것도 부실했다. 무엇보다 비용도 컸다.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많이 걷었고 감당 못한 백성들이 뛰쳐나갔다. 10가구 중 5가구가 반란에 참가했다. 민심도 돌아서고 국가재정도 고갈됐다.

진시황제의 시대 역시 기울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분서갱유였다. 분서는 책을 태우는 것이고 갱유는 유생들을 땅에 산채로 파묻은 것. 통일을 이루긴 했지만 사람들 사이 전체주의, 통일에 반대하는 학설이 떠돌고 있었다. 진시황제는 백성들이 선동 당할까봐 걱정해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건 태워버리라고 했고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면 얼굴에 낙인을 찍고 친족, 외족, 처족 3족을 멸했다.

원하던 바를 다 이루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불로불사의 꿈까지 꿨던 진시황제는 하지만 50세의 나이에 시찰 중 건강이 악화돼 죽음을 맞는다. 어려서부터 허약했다는 설과, 수은을 불로불사를 위한 명약으로 알고 섭취해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고. 그렇게 진시황제가 죽음을 맞자 간신배들이 유언장을 조작해 첫째 아들 호해도 자결하게 한다.

게다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신하들은 썩은 생선 냄새로 시신의 악취를 숨겼다고. 은지원은 “신처럼 살았던 사람이 마지막에 썩은 생선과 가는 게. 잘했으면 최고의 황제로 남을 뻔 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후 진시황제가 죽은 지 3년 만에 진나라는 멸망했고, 조관희 교수는 나라를 세우는 창업만큼이나 중요한 수성(지킴)을 강조했다. (사진=tvN ‘벌거벗은 세계사’ 캡처)

[뉴스엔 유경상 기자]뉴스엔 유경상 y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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