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시린 忍苦의 삶 살아낸 여인들… TV 드라마 시대 열어젖혔다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25> TBC ‘아씨’ KBS ‘여로’1961년 TV 방송이 시작될 때 보급된 TV 수상기는 1만3000여대였고, 1966년 국내 최초의 흑백TV가 생산되었을 때 19인치 TV 수상기 가격은 6만3000원이었다. 80㎏ 쌀 한 가마니에 25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대단한 고가품이었다. 정부는 TV 수상기 보급을 위해 ‘월부 판매’ ‘TV 무소유자 우선 공급’ ‘공개 추첨 판매’ 등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TV 시대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김삿갓 북한 방랑기’(KBS), ‘전설 따라 삼천리’(MBC), ‘아차부인 재치부인’(TBC) 등과 같은 라디오 일일연속극이 꾸준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사이 TV 수상기 보급은 서서히 증가해 1970년엔 38만여 대에 이르렀다.듣기만 하던 라디오와 달리 TV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대중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엔 광고가 따라갔고, 희로애락의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담아내던 인기 드라마 작가들은 TV로 발길을 옮겨갔다. 그렇게 라디오와 TV 일일연속극이 자리바꿈하던 교차점에 일일연속극 ‘아씨’(TBC·1970~1971년·253회)와 ‘여로’(KBS·1972년·211회)가 있었다.

인고(忍苦)의 여인들, 시청자 흔들다

드라마 ‘아씨’와 ‘여로’는 1970년대 전통적 여인을 중심으로 가부장적 풍경들을 담아낸 역사적 작품이다. 라디오에서 TV로 주류 매체가 이동하던 시기에 나란히 등장한 드라마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사진은 ‘아씨’의 장면들. 방송사 제공

열아홉이던 순덕(김희준)이 이참봉 댁으로 시집오면서 ‘아씨’는 시작된다. 얌전한 양반집 규수였던 아씨는 체통을 내세우는 천석꾼 집안으로 시집왔지만 남편 긍재(김세윤)는 아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신학문을 공부하러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그에게 아씨는 시대에 뒤떨어진 여인일 뿐이다. 또한 이미 정을 나눈 신여성 은심(선우용녀)이 있었고 둘 사이에 아들 봉구(노주현)까지 낳게 되니 아씨가 마음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은심은 긍재가 유부남인 것을 모르고 사랑에 빠졌었기에 기막힌 현실 앞에서 아씨와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시어머니(황정순)와 시누이의 괴롭힘은 아씨를 힘들게 했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새로 들어온 새 시어머니(사미자)도 까탈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아씨를 안쓰럽게 여긴 시아버지의 보살핌은 아씨에겐 큰 힘이었다. 은심이 떠난 후 주색잡기로 일생을 허송세월하던 긍재는 만주로 상해로 떠돌다 객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고, 그 사이 천석꾼 재산은 바닥이 났다. 남편 대신 의지하며 친아들처럼 키운 봉구도 사사건건 엇나가며 아씨의 속을 태웠다.

긍재의 마지막을, 스러져간 이참봉댁을 끝까지 지킨 것은 아씨였다. 은심은 긍재와의 불행한 사랑을 끝내고 교육자로 사회에 헌신하며 살았고, 아씨를 평생 연모하던 수만(김동훈)은 비록 아씨와 부부의 연을 맺진 못했지만 검사가 되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아씨를 도와주었다. 사람도 떠나고 재산도 바닥이 난 휑한 집에 남겨진 아씨 곁엔 몸종 간난이(여운계)가 있었다. 아씨에겐 친구이자 형제였고 평생을 의지하는 든든한 동반자였던 간난이도 시집을 가긴 했으나 삼일운동 때 남편이 만세를 부르다 죽은 후 아씨와 함께 서로 의지가지가 되어 살았다. 희생과 순종으로 점철된 인고의 여인상을 그대로 보여준 ‘아씨’는 마지막회 내레이션처럼 자신의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묵묵히 살아간 “우리들의 어머니이며,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여로’. 방송사 제공

인고의 삶을 살아가기는 ‘여로’도 마찬가지다. ‘아씨’의 순덕이와 달리 ‘여로’의 분이(태현실)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사창가까지 가야 했던 여인이다. 부잣집이었던 최주사(정민)네 며느리가 되긴 했지만 분이의 남편 영구(장욱제)는 지능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영구 없다’ ‘떽띠(색시)야 밥 줘’ ‘아부지 제기차기 하자’. 그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었다. 대나 잇자는 생각에 분이를 받아들였지만 시어머니(박주아)와 시누이에겐 눈엣가시였다. 분이를 소개해 준 달중이는 은근히 분이를 마음에 둔 채 시어머니와 짜고 분이를 괴롭혔다. 분이는 아들 기웅(송승환)을 낳았지만 술집에서 일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시댁에서 쫓겨났다. 분이와 영구는 한국 전쟁 와중에 부산에서 만났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국밥집을 하며 많은 돈을 모은 분이가 청심원이란 장애인 교육 재단을 세워 사회에 공헌하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고 이를 본 영구는 기웅과 함께 분이를 찾아가 뜨겁게 재회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와중에 몰락한 시댁의 집과 땅을 다시 사들인 분이는 그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두 드라마는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을 거쳐 1970년까지의 일정 기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했고, 전통적 부덕(婦德)을 강조하며 부침이 심했던 시댁을 지켜낸 여인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시청자들은 ‘아씨’와 ‘여로’를 헛갈려 기억하기도 하지만 두 드라마는 다른 결을 갖고 있다.

‘아씨’는 민영방송인 TBC에서 제작되었고 전국 네트워크를 갖추지 못했기에 서울과 부산에서만 시청할 수 있었다. 당연히 주시청층은 대도시민. 이들의 정서에 맞춰 양반가의 혼인과 신학문을 공부하러 떠난 긍재의 외도, 혼외 자식 등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의 성격이 강했다. 반면 ‘여로’는 전국 네트워트를 갖고 있던 국영방송 KBS(1973년 공영방송으로 전환)에서 제작된 만큼 도시뿐 만 아니라 농어촌 등 전국 시청자를 대상으로 했고, 부부 갈등보다는 편견 가득했던 시집살이와 힘들었던 가난을 극복해낸 분이의 성공 스토리를 중심으로 한 가족 드라마에 초점을 맞췄다.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오늘의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당시 대중은 ‘아씨’와 ‘여로’를 보며 마음껏 울고 웃고, 욕하고 응원하며 자신의 마음속에 쌓인 응어리를 풀어내곤 했다.

‘아씨’와 ‘여로’를 통해 본 시대 풍경

두 드라마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아씨’는 TBC 조사결과 71%, KBS 조사결과 85%, ‘여로’는 KBS 조사결과 80%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당연히 ‘아씨’가 방송되는 시간에는 거리가 한산했다. 이미자의 구성진 주제가가 나오는 동안 화면에는 “시청자 여러분, 문단속, 물단속이 잘 되었나 확인한 후 시청해 주십시오”라는 고지문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TV가 있는 곳으로 밤마실 가는 틈을 타 기승을 부렸던 좀도둑을 경계하고, 연속극을 놓치지 않으려다 수돗물 잠그는 것을 잊는 실수를 막아주려는 방편이었다. ‘여로’의 열풍은 전국을 휩쓸었다. 해수욕장에서는 TV가 있는 상점들이 문전성시를 이룰수록 백사장은 텅 비었고, TV가 있던 만화방들은 ‘여로’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기도 했다. ‘영구식 제기차기’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여로 다방’ ‘여로 식당’ ‘여로 과자’까지 등장했으니 대중들의 삶 속에서 그 존재감은 한껏 빛났다.

일일연속극은 1969년 MBC TV 개국으로 경쟁에 불이 붙기 시작했는데 열악했던 제작여건 상 연속극당 30~70여회가 전부였다. 그러다 1970년 가을 ‘아버지와 아들’(KBS)이 150회로 종영하며 일일연속극 최초로 100회를 넘긴 기록을 세웠는데 ‘아씨’와 ‘여로’가 모두 200회를 넘겨 방송되었으니 그 분량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으면 ‘아씨’의 작가 임희재는 ‘아씨’를 제작하는 동안 위암이 악화하여 더 이상 집필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작가 이철향이 이어받아 무사히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병중에도 마지막회 내레이션만은 직접 썼던 작가 임희재는 ‘아씨’가 끝난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아씨’와 ‘여로’를 지금 다시 볼 수는 없다. 드라마 제작용 테이프 가격이 고가이다 보니 방송 후 재사용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그나마 ‘아씨’는 마지막회 및 출연진이 함께했던 좌담회와 전체 대본이 남아있지만 ‘여로’는 일부 장면만 남아 있을 뿐 대본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드라마가 종영되기도 전에 영화화되고 뮤지컬로 공연되는 등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아씨’와 ‘여로’는 TV 드라마 시대의 문을 연 일등공신이었고, 이후 50여년 동안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여성들의 삶을 다각도로 그려낸 본격적인 출발점이었다. 최근 누적조회수 1700만뷰를 넘어서며 시댁과 며느리,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재조명한 ‘며느라기’(카카오TV)도 전근대의 틀 안에서 주체적 삶을 살고자 했던 ‘아씨’와 ‘여로’로부터 시작되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 네이버에서 국민일보를 구독하세요(클릭)
▶ 국민일보 홈페이지 바로가기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