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고향의 파도 소리 노래 삼아 편히 잠들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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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3.12. 오전 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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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 윤이상 돌아온 통영

통영시 도천동 윤이상 기념관 앞 전경. 시민들이 기념관을 관람하거나 산책하고 있다. 통영/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이 고국을 떠난 지 49년, 세상을 떠난 지 23년 만에 고향 땅 통영에 돌아왔다. 지난달 25일 검은색 돌로 만든 유골함에 담겨서다. ‘유럽의 현존 5대 작곡가’, ‘현대음악의 거장’ 등으로 불리며 세계 음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지만 ‘이념 딱지’가 붙은 그의 귀향은 쉽지 않았다. 고국은 그를 오랜 시간 따스하게 품지 못했다. 영원히 잠들었으나 이국땅에서 깊이 잠들지 못했다.

윤이상 기념관이 있는 통영시 도천동 생가터에서 부터 옛 통영보통학교로 이어지는 ‘윤이상 학교 다니던 길'. 통영/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다시 찾기 시작한 이름 ‘윤이상’

지난 7일 찾은 통영은 바람 부는 우중충한 날씨처럼 착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전날 어선이 전복되면서 8명의 실종자가 생겼고, 지역 경제를 떠받치던 성동조선해양이 법정관리 위기에 놓였다는 우울한 뉴스가 연속해서 보도됐다. 그러나 그의 고향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고 있었다.

통영시 도천동 윤이상 기념관 옆 ‘베를린하우스' . 방송사가 취재중이다. 통영/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통영은 윤이상의 정신과 음악 세계의 탯줄이었다. 어부들의 노랫소리, 파도 소리, 무당 굿소리 등 어릴 때부터 보고 듣던 풍경들이 ‘음’이 되어 그가 만든 모든 곡에 자리잡았다. 윤이상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지만 3살부터 살던 통영을 고향으로 여겼다. 윤이상이 살던 도천동 집은 조금만 나가면 바로 바다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배를 타고 밤낚시를 하면서 겪은 ‘음악적 체험’을 후일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어부들의 노랫소리가 배에서 배로 이어졌습니다. 남도창이라는 침울한 노래인데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까지 전해주었습니다. 바다는 공명판 같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고국 떠난지 49년,
죽어서 23년 만에 돌아온 고향
‘이장 반대’ 집회 한층 잦아들고
거리엔 ‘평화’ 기원 환영 메시지

현대음악 거장의 기념관
친북 이념 논란에
7년간 ‘도천테마파크’라 불리다
지난해야 ‘윤이상’ 제 이름 찾아


윤이상의 생가가 있던 도천동 갯벌은 매립돼 사라졌다. 통영시는 2010년 윤이상의 생가 터 부근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지었다. 그러나 기념관은 ‘도천테마파크’로 불렸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라 친북 논란을 빚는 윤이상의 이름을 건 기념관을 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야 겨우 제 이름을 찾았다. 이중도 윤이상기념관 팀장은 “윤이상을 둘러싼 많은 오해로 이름을 붙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며 “그래도 시내버스 정류장 명칭은 ‘윤이상기념관’이었다”고 말했다.

기념관은 지난해 리모델링을 하면서 독일 베를린에서 생활하던 집을 축소해 재연한 ‘베를린 하우스’도 새로 지었다. 이 집에는 윤이상이 베를린에서 사용한 피아노를 비롯해 책걸상·소파 등 가재도구가 그대로 옮겨져 있다. “동양의 사상과 음악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시킨 그가 쓰던 피아노 위에는 대금과 피리가 놓여 있었다.

통영시 도천동 윤이상 기념관 옆 ‘베를린하우스'. 윤이상이 독일에 머물렀던 집을 재현해놓았다. 서재에 꽂혀있는 책들이 보인다. 통영/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음악적 원형이 된 통영의 유년 시절

윤이상은 여덟살 때 세병관에 마련된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기념관 옆에는 세병관 가는 길이 ‘윤이상의 학교 가는 길’이란 테마로 꾸며져 있다. 집에서 도보로 왕복 1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소학교에서 오르간을 처음 접한 윤이상은 음악적 감수성이 뛰어났다. 다양한 악기에 금방 매료됐다. 선비였던 윤이상의 아버지는 윤이상이 바이올린을 켜면 “복어 이 가는 소리”라고 야단쳤다. 첼로는 윤이상이 가장 아낀 악기다. 아쟁·거문고·가야금 소리를 낼 수 있어 윤이상은 첼로를 유독 사랑했고, 첼로 독주를 위한 ‘활주’(1970) 등 첼로를 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어린 윤이상, 클래식 연주 듣던
‘봉래좌’ 지금은 주차장 됐지만
독일 집 재연한 ‘베를린 하우스’엔
그가 쓰던 피아노와 대금·피리가…


윤이상의 유년 시절 놀이터였던 극장인 문화동의 ‘봉래좌’는 지금은 주차시설로 바뀌었다. 윤이상은 이곳에서 조선 명창 이화중선의 남도 노래를 들었던 기억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봉래극장’으로 이름이 바뀐 뒤엔 무성영화가 상영됐다. 필름을 교환하는 중간에 최신 유행가나 서양의 클래식을 연주해준 까닭에 윤이상은 이곳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통영시 도천동 윤이상 기념관 옆 '베를린하우스'. 윤이상이 독일에 머물렀던 집을 재현해놓았다. 통영/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유년기 통영의 소리가 그의 음악세계의 원형이었다면, 고통의 현대사는 그의 음악세계를 떠받치는 골조였다. 그래서 그는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삶과 정신, 나의 예술은 정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이국땅에서도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김지하 시인 구명운동을 벌였고, 그럴수록 그의 한국행은 점점 더 멀어졌다.

윤이상이 작업하던 책상을 재현해 놓았다. 통영/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동백림 사건으로 2년간의 옥고 끝에 1969년 독일로 추방된 이후 고향에 대한 애틋함은 갈수록 더해졌다. 베를린 자택 마당의 연못은 한반도 모양으로 꾸몄고, 침실 침대 머리맡엔 1960년대 후반 서호에서 강구안까지 통영의 전경이 담긴 사진을 걸어뒀다. 악보를 그리던 책상 머리맡엔 강서고분의 사신도가 있었다.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1968), 플루트와 오보에와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영상’(1968)을 만드는 데 영감을 준 그림이다. 이중도 팀장은 “1963년 윤이상의 첫 북한 방문은 강서고분의 벽화에서 사신도를 보기 위해서였다”며 “윤이상은 미술과 건축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고 말했다.

윤이상이 묻히게 될 통영음악당 묘자리에서 한려수도가 내려다 보인다. 아직 터를 다지고 있는 포크레인이 보인다. 통영/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상처입은 용’은 편히 잠들 수 있을까

기념관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윤이상의 유해가 묻힐 통영국제음악당이 있다. 음악당 공터 한쪽에 조성된 묘는 포클레인으로 땅을 고르는 작업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통영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묻히고 싶다”던 윤이상의 소원대로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소박하게 꾸며지고 있었다. 통영의 흙 한줌과 이국땅에서 잠들었던 윤이상은 오는 30일 이곳에 묻히면 고향 땅에 푹 안기게 된다. 윤이상의 아내 이수자(91)씨는 “독일에서는 돌 유골함에 담겨왔는데 이장할 때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향나무로 된 유골함에 옮겨 담을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당으로 이어진 길에는 “상처받은 용! 윤이상 선생을 보살핀 베를린 시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우리는 평화입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재경 통영중고등학교 동창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윤이상이 생전에 교가를 만들어준 학교다. 이용민 통영국제음악재단 예술기획본부장은 “2011년에 ‘통영의 딸 신숙자 송환’ 논란이 있을 때만 해도 고엽제전우회, 어버이연합 등이 12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내려와 집회를 했다”며 “지금도 보수단체들의 이장 반대 움직임이 있지만 예전보다 한층 차분한 분위기”라고 말했다. 윤이상의 유해를 독일 땅에서 통영 땅까지 안고 돌아왔던 플로리안 림 통영국제음악재단 대표는 “윤이상의 귀향이 화해와 평화를 이행하라는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통영/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통영의 딸’ 송환 논란 계속…분단의 비극은 현재진행형

윤이상의 귀향은 분명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다시 한번 ‘분단의 비극’을 곱씹게 만든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윤이상은 2년간 감옥 생활을 한 뒤 독일로 추방돼 영영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동백림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과대포장한 사건으로 판단했지만 ‘통영의 딸 신숙자 송환’ 문제는 아직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했다.

신씨의 남편인 경제학자 오길남씨는 독일 유학생 시절인 1985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가 1992년 혼자 귀국했는데, 북한에 간 것이 윤이상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신씨와 두 딸은 북한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이상의 가족은 2011년 오길남씨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으나 2013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됐다. 윤이상 가족 변호인인 민병덕 변호사는 “무혐의 처리가 된 것은, 생전에 월북을 강요한 적이 없다는 진술서를 쓴 윤이상이 사망해 진위를 확인할 수 없고, 오길남의 주장이 허위임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윤이상의 가족은 “안타깝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언젠가는 역사가 다 정화해줄 걸로 믿는다”고 말했지만, 통영시애국시민총연합회 등 보수단체들은 “신씨와 두 딸의 생사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라며 여전히 윤이상의 국내 이장을 반대하고 있다. 통영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윤이상의 유해가 임시 안치된 봉안당 보안에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

통영/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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