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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양녕과 명나라 칙사 사이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내시(환관) 출신 칙사인 황엄을 위한 연회장에서 양녕대군이 분을 참지 못해 황엄의 밥상을 뒤엎고 말았다. 조선을 얕잡아보는 명나라 칙사의 고압적 태도에 그만 속이 울컥하고 만 것이다.

 

이 장면은 2월 3일 <대왕세종> 제10회 방영분이다. 어찌 보면 경솔하고 또 어찌 보면 속 시원한 그 장면을 보면서, “차라리 저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시청자들은 없었을까?

 

황엄이 군마 1만 필을 요구한 것으로 보아, 위 장면은 태종 9년(1409) 10월 하순경의 상황인 것으로 생각된다. 1409년이면 태종이 ‘은퇴’하기 9년 전이다. 

 

<대왕세종>에서 방영된 것처럼, 연회장에서 황엄은 군마 1만 필을 요구했다. 그런데 내시 출신 칙사인 황엄은 군마만 요구한 게 아니었다. 그 내시는 조선의 처녀도 요구했다. “조선에 갔다 오는 길에 예쁜 조선 처녀도 함께 데리고 오라”는 명나라 황제 영락제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명나라 황제의 입장에서는 일반 관료 출신 칙사에게 조선 처녀 선발을 맡기는 것보다는 황엄 같은 환관에게 그 일을 맡기는 편이 더 나았을 수도 있다. 일반 관료 같았으면, 중간에 조선 처녀를 빼돌릴 수도 있고 또 황제의 스타일이 아닌 자기 스타일에 맞는 여자를 선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명나라 칙사가 조선 처녀를 뽑을 때에는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수백 명의 여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번에 걸쳐 심사를 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뽑힌 몇 명의 여자를 명나라로 데려갔다. 뽑힌 여자들의 나이는 대개 10대 중후반이었다. 

 

황엄이 군마 1만 필을 요구한 태종 9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때에 최종적으로 선발된 사람은 정씨라는 처녀였다. 그는 11월 13일 태평관을 떠나는 황엄을 따라 명나라로 갔다. 그런데 황엄의 눈에는 그의 외모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씨의 외모가 별로니까, 다른 사람을 구해 두어야 합니다.”

 

태종 이방원에게 하는 당부였다. 이번에는 이렇게 돌아가지만, 다음에는 제대로 하라는 압박이었다. 그러자 이방원 왈(曰):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해 군마를 겨우 1만 필 밖에 못 드리지만, 미인들이야 어찌 다시 구할 수 없겠습니까?”

 

명나라로 끌려간 조선 처녀들 중에 황제의 후궁이 된 사례가 많았던 점을 고려할 때, 이때 끌려간 정씨도 명나라에서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명나라에 가서 어떤 대우를 받든지 간에, 끌려가는 조선 여자의 입장에서는 그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딸을 내주지 않으려는 조선 백성들의 저항으로부터 그 같은 정서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라에 세금을 바치는 백성들을 보호해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백성들의 몸을 넘겨주면서까지 명나라의 국제적 지원을 얻어내려 한, 정통성 약한 조선 지배층의 서글픈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는 비단 조선의 처녀들만 고난을 당한 게 아니었다. “여진족을 토벌해야 하니 군대를 파견해달라”는 명나라의 압력에 따라, 조선의 청년들도 ‘남의 나라 전쟁’을 위해 아까운 목숨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처녀 선발 이야기로 돌아간다. 위의 정씨 처녀 ‘조공’이 있기 1년 전인 태종 8년(1408) 7월 2일에는 좀 더 황당하고도 서글픈 장면이 있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 날 경복궁에서 황엄이 의정부 관헌들과 함께 조선 처녀들의 외모를 심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엄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화가 난 황엄이 경상도 경차내관 박유를 포박하고는 호통을 쳐댄다.

 

“경상도에 이렇게 미인이 없더냐? 네가 혹시 딴 맘을 먹고 이런 여자들만 데려온 게 아니냐?”

 

금방이라도 박유에게 곤장을 칠 것 같던 황엄은 갑작스레 마음을 바꿔 곤장을 거두더니, 이번에는 조선 정승에게 한바탕 망신을 주고는 태평관으로 돌아가 버린다. 

 

황엄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국왕 이방원은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지신사(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 황희를 급파한다. 이방원이 황희를 통해 전달한 말은 다음과 같다.

 

“그 아이들이 부모 곁을 떠날 생각에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수척해진 탓이오. 중국제 화장품을 바르게 한 뒤에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중국제 화장품을 발라 보면 좀 더 예쁘게 보일 것이니, 너무 노여워말라는 말이었다.

 

“좋습니다.”

 

마음을 돌린 황엄은 다시 처녀 선발에 나섰다. 11월 12일 명나라로 돌아가기 전까지 황엄은 300명의 조선 처녀들을 1차로 선발한 뒤에 5명의 여자를 최종적으로 선발했다.

 

그 과정에서 태종 이방원은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황엄의 ‘미스 조선 선발’을 지원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심사위원’ 황엄을 따라다니면서 이런 저런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황엄과 함께 처녀들을 심사하고 나서 그를 돌려보낸 뒤였다. 황엄이 여자를 제대로 볼 줄 모른다면서 이방원은 이렇게 말했다. 

 

“황엄이 매긴 등수는 틀렸어. 임씨 처녀는 꼭 부처님 같이 생겨서 애교가 없잖아. 또 여씨 처녀는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으니, 그게 무슨 미인이야?”

 

여권(女權)을 논하기에 앞서, 이 장면은 전통시대 봉건통치자들이 백성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이것은 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면 자기 백성들도 얼마든지 내줄 수 있는, 정통성 약한 조선 지배층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권력만이 “하늘이고 땅이고 우주”였던 것이다.

 

조선 지배층이 이처럼 자기 백성들을 없이 여겼으니, 명나라로서도 툭 하면 칙사를 파견해 처녀 조공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나라에서 존중을 받지 못하는 백성은 남의 나라로부터도 존중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태그:#대왕 세종, #황엄, #처녀 조공,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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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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