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미국인들이 동의하는 플롯이 있다. 미국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일까? 나는 미국에 살면서 오히려 이곳만큼 한결같은 장소가 드물다고 느낀다. 즉, 미국이 지금 나쁘다면, 과거에도 딱 지금만큼 나빴을 것이라는 것이 내 가설이다. 왜냐하면 미국에는 원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다. 그들은 여기에 유사-프랑스 마을을 짓고, 저쪽에는 유사-영국 마을을 지었다. 서쪽에는 유사-중국인 마을이 생겨났고, 동쪽에는 유사-유대인 마을이 생겨났다.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은 그들의 뿌리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유일한 진짜였던 원주민들 또한 일단 몰살한 이후에 유사-원주민 마을을 지었다. 이렇게 미국에는 애초에 진짜가, 아니 뭔가가 없다. 나빠질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것도 달라질 수가 없다.
시뮬라크르(가상)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아메리카』에서 미국을 유럽의 파생실재라고 불렀다. 21세기의 미국은 거기에서 더 나아간다. 오늘의 미국은 단지 유럽의 파생실재가 아니라 온 지구인들의 파생실재이다. 뉴욕에는 그 모든 파생실재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코리아타운에는 한국의 파생실재가, 웨스트빌리지에는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파생실재가, 월스트리트에는 국제금융의 파생실재가 있다. 이 놀라운 디즈니랜드는 공간만이 아니라 날씨와 시간에 따라 수시로 모습을 바꾼다. 흐린 날에는 런던이 되었다가 맑은 날에는 샌프란시스코가 되었다가 습기가 많은 날에는 홍콩이 되어버리는 식이다. 이렇게 순식간에 돌변하는 이 도시의 실체가 무엇인가 궁금하다면, 반복컨데, 답은 없다이다. 이 도시는 아무런 실체가 없다. 하여 뉴욕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의 습득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통해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납작한 화면에 펼쳐지는 가짜 세트장, 촘촘하게 들어찬 컴퓨터 그래픽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눈 앞에 펼쳐진, 손을 뻗어 만질 수 있는 현실의 실체가 없다는 것, 그 비현실성이 가져다주는 아찔한 현기증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앞에 분명하게 존재하는데, 그게 완벽한 유령이라는 이야기가 사이비종교처럼 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꽈배기처럼 비비 꼬인 말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잔뜩 했던 해괴한 말들, 4차 산업혁명이 약속한다는 신기한 미래, 그 알쏭달쏭한 이미지들이 가리키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여기, 미국이다. 모조품들만이 존재하는 멋진 신세계.
근사한 봄날씨의 얼마 전 주말, 윌리엄스버그에 갔다. 한때 완벽한 힙스터 동네였던 그곳은 해변가 신도시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 이유가 세월이 흘러서인지, 날씨 탓인지, 아니면 그저 나의 변덕스러운 기분 탓인지 알 길이 없다. 원인과 출처의 완벽한 부재 또한 이 유사-세계의 핵심적 특징이다. 그러니 묻지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에 대한 말들은 죄다 증명불가능의 헛소리가 되어버리고 말 운명이니 말이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 뒤 한 커피숍에 들어가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주문하자 점원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진짜 우유는 없어요. 아몬드밀크는 어떠세요? 라이스밀크는요? 혹은 소이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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