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별이 되어 베니 굿맨과 ‘스윙 재즈’ 즐기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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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03.17. 오후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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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한국 재즈 1세대 연주자’ 이동기 선생을 기리며

팔순 암투병 중에도 무대 지킨 열정
새달 4일 ‘데뷔 60돌’ 무료 헌정공연
2010년 다큐멘터리 <브라보! 재즈 라이프>(감독 남무성) 중에서 이동기 선생 포스터.


선생이 술잔을 연거푸 비워내고는 클라리넷으로 ‘웬 유 위시 어폰 어 스타’(별에게 소원을 빌 때)를 연주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피노키오> 주제가다. 동화 속 예쁜 그 선율이 처연한 곡조로 바뀌어 흐른다. “내가 언제 사람이 되나. 음악을 잘해야 사람이 되는구나…. 왜냐면 내가 나팔장이이기 때문에, 한데 그게 죽을 때까지 안 될 거 같아”라며 수줍게 웃는다. 그 미소가 소년 같다 해서, 항상 모자를 쓰고 있다 해서, 붙은 그의 별명이 피노키오다. 8년 전 서울 인사동의 어느 대폿집에서 선생과 한잔 나누던 때의 추억이다.

지난 27일 우리 곁을 떠난 ‘한국 재즈 1세대 연주자’ 이동기 선생은 간암으로 투병 중이던 최근까지도 클럽 무대에 섰다. 평생의 음악 동료인 ‘재즈 1세대 밴드’는 이제 몇 명 남지 않았고, 그래서 더 힘을 보태려 안간힘을 썼다. 더욱 안타까운 건 오는 6월4일 ‘이동기 데뷔 60돌 콘서트’를 준비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선생의 팔순 기념 공연은 후배 연주자들의 헌정공연이 되고 말았다. 기획사는 모든 예매표를 환불해주기로 하고 무료공연으로 바꿨다.

1938년생인 선생은 색소폰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서울 대동상고를 마치고 미8군 부대에서 연주하며 재즈에 입문했다. 23살 때 일반 무대로 진출했고, 67년 당대 최고 재즈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엄토미씨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그를 대신해 조선호텔 프린세스룸에서 ‘이동기 악단’으로 활동했다. 정훈희의 노래 ‘그 사람 바보야’를 작곡하기도 했다. ‘내 이름은 소녀’를 부른 60년대 인기가수 조애희씨와 결혼했다. 한때 ‘재즈로는 밥 벌어 먹기 힘들다’는 생각으로 가요계 활동에 전념했지만, 다시 현실적인 고민을 밀쳐내고 친구들이 기다리던 재즈 무대로 복귀했다.

선생은 두말할 필요 없는 재즈 클라리넷의 장인이었다. 색소폰과 트럼펫 사이에서 스윙재즈의 참맛을 살려냈다. 사실 클라리넷은 언뜻 재즈 악기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스윙의 제왕’ 베니 굿맨이 클라리넷 연주자였듯이, 클라리넷은 재즈 역사에서 일찌감치 연주되던 악기였다. 이동기 선생이 ‘한국의 베니 굿맨’으로 불리는 이유다.

한국 재즈 1세대 연주자들은 대부분 미8군 클럽 무대 출신이다. 그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중고 음반을 듣고, 미군 연주자들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러다 70년대부터 한국 대중 앞에서 재즈를 선보였다. 가요 작곡가로 유명했던 고 길옥윤·박춘석·이봉조 선생 등이 앞서 재즈를 연주하다 대중가요 활동으로 방향을 바꿨고, 그 후배들이 재즈 음악인의 길을 이어받은 것이다.

나는 대학 시절 재즈 1세대 밴드의 클럽 공연을 보러 다니곤 했다. 그때마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연주하던 그들. 훗날 나는 그들의 음악인생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브라보! 재즈 라이프>(2010)를 만들었다. 영화를 찍으려 카메라를 세워놓고 이동기 선생과 마주 앉았다. “사실 놀지 않고 열심히 했는데…. 이게 돈은 모아지지 않는 직업이에요” 하며 웃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해왔다는 걸, 부연하지 않아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별에게 소원을 빌 때’를 즐겨 연주하던 선생은 이제 조용히 빛나는 별이 되어 먼 하늘 위로 사라졌다.

남무성/재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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