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으로 들어서니 일단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눈을 들어 응접실을 둘러보니 흡사 갤러리 혹은 박물관에 온 느낌이다. 밋밋한 듯하지만 담백한 선의 미학이 있는 백자 그릇에 눈길이 갔다. 이 셰프는 “대호 백자로 각 그릇마다 천지현황(天地玄黃) 한 글자씩 새겨진 15세기 궁중 왕실용 그릇 4개 중 하나로 국보급이라 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역시 궁중에서 쓰던 ‘소반(小盤)’의 일종인 회전반(작은 밥상인데 회전하는 상) 하며 조선시대에 쓰이던 거북 모양 대형 자물쇠까지 입이 떡 벌어진다. 여기에 더해 백남준, 박서보, 최명영 작가의 현대 미술 작품이 함께 어우러져 전통과 현대, 동서양의 미(美)를 한곳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귀를 간질이는 음악에 테이블 한쪽을 쳐다보니 특이한 모양의 스피커가 또 한 번 눈길을 사로잡는다. ‘소리 마에스터’ 유국일 작가 작품이다. 스피커 한 대당 1억원을 호가한다.
셰프면 맛으로 승부하면 되지 왜 이렇게 휘황찬란한 공간을 연출했을까.
“슈퍼리치는 꼭 비싼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한국의 순수한 자연과 문화를 경험하고 싶어 하더군요. 이때의 경험은 단순히 먹는 즐거움뿐이 아니에요. 오감을 느끼고 가고 싶어 하지요. 포시즌스 슈퍼리치 디너 때 깜짝 국악 공연을 곁들였더니 정말 좋아했어요. 식사 내내 감동받은 한 외국인 고객은 단아한 한국의 그릇에 매료됐던지 수소문 끝에 구입해갔다고도 하더군요. 그래서 장식 하나, 서버의 복장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쓸 수밖에 없답니다. 한 끼의 식사가 슈퍼리치의 가슴에 시 한 편, 소설 한 편 선사한다는 사명감으로 음식을 내놓습니다.”
‘오감을 만족시킨다’ ‘럭셔리 경험을 선사한다’는 말을 되뇔 즈음 식사 준비가 됐다고 알려왔다. 식사 순서가 적힌 카드가 주어졌다. ‘봄날 축일에 손님 맞다’라는 제목 아래 전식 2코스, 메인 7코스, 후식으로 준비됐다.
메인 요리마다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福복- 복을 부르는 음식’ ‘楓풍- 바람의 여운으로’ ‘地지- 땅의 기운으로부터’ 등 각각 이름과 사연이 다 있었다. 특히 눈길 끄는 것은 ‘開개- 열어보다’였다. 검은 보자기에 싸인 그릇에서부터 호기심이 든다. 서버 직원은 “예부터 귀한 분께 선물을 드릴 때 정성을 들여 보자기에 싸던 전통 그대로를 재현했다. 그만큼 공을 들인 귀한 음식”이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보자기를 걷자 그릇 위에 소나무 문양의 검은 종이가 또 한 번 음식의 온기를 감싸고 있었다. 이마저 젖히자 능이버섯, 고사리, 가지, 석이버섯 등 다양한 검정색 식재료로 향과 맛을 낸 볶음요리, 일명 ‘블랙푸드’가 손님을 반겼다. 한 젓가락 넉넉히 집어 입속에 밀어넣자 고소하면서도 버섯과 콩의 아삭한 식감, 쫄깃한 식감이 어우러져 입속에서 향연을 펼쳤다. 맛도 좋지만 보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이 배가되는 음식이었다.
▶30년 된 간장 등 시간·정성이 한 상에
배우 존 말코비치, 톰 브라운도 연신 극찬
레스토랑 ‘백사104’서 정찬 즐길 수 있어
식재료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이종국 셰프는 “1㎝도 안 되는 찔레의 어린순만 따서 만든 장아찌, 강원도 심마니가 채집한 더덕, 해녀가 심해에서 따는 벚꽃굴, 제철에 나는 귀한 버섯, 지리산 장단콩으로 빚은 30년 된 간장 등 정성과 시간이 오롯이 담긴 식재료를 골라 쓰니 이 세상에 단 한 끼밖에 없는 식사가 완성된다”고 소개했다.
하나하나 맛보던 중 음식값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때에 따라 다르지만 셰프의 집에서의 만찬은 100만원, 와인을 곁들일 경우 1인당 150만원을 훌쩍 넘길 때도 많다고 전했다.
가격 관련 이 셰프의 의견은 단호했다.
“한 끼의 식사가 통상 3시간 정도 걸립니다. 연극이나 오페라 한 편을 보는 시간과 같지요. 유명 예술 공연에서 좋은 좌석에 앉는 데 미련 없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처럼 한 끼 식사를 넘어 한국 식문화를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라 생각하는 슈퍼리치들이 더 많아요. 그래서 그런지 가격에 대한 저항이나 항의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 집에 언제 한번 올 수 있는지를 되묻고 가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들 중에는 해외 유명인사도 많다. 배우 존 말코비치, 유명 디자이너 톰 브라운도 이 셰프의 팬이 됐다고. 그 밖에도 영국 문화부장관 만찬, 한중일 인사장관 디너, 동계올림픽 전시(경복궁) 등 국내외 크고 작은 행사에도 섭외 1순위다.
최근 이 셰프는 파인다이닝 체험을 보다 넓혀나가기 위해 성북동 집 근처에 레스토랑 ‘백사104’를 열었다. 오찬은 20만원, 만찬은 30만원부터 즐길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책정했단다. 포시즌스 미식 투어에 참여할 정도의 재력(약 1억원)이 안 된다면 단신으로 ‘백사’를 찾아 럭셔리 경험을 해보는 것도 방법은 방법이겠다 싶다.
한끼 100만원 정찬 들여다보니
봄날 축일에 손님 맞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54호 (2018.04.18~04.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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