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미술 거장 전광영 "아름다운 色 찾아 염색공장·약재시장 누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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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4.05. 오후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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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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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염색공장서 일하다 폐·성대 부상
古書 한지로 감싼 삼각 오브제 수만개…천연 염색한 작품 PKM갤러리서 전시
"나이 드니까 화사한 색깔 많이 써"…9월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서 개인전


논어와 맹자 등 고서(古書) 한지 책장으로 감싼 삼각형 오브제 수만개가 200호 이상 대형 화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옛사람들 기록이 축적된 시간의 대서사시 같았다. 검은색과 갈색으로 물들인 작품은 화산 분화구처럼 보였으며, 연두색 작품은 풀밭,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염색한 작품은 꽃밭으로 다가왔다.

한지 작가 전광영(74)은 아름다운 색(色)을 얻기 위해 목소리를 바쳤다. 1970년대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 회화과를 다닐 때 고급 옷감 염색 공장에서 6년간 일했다. 독성 화학물질에 폐가 상하고 목젓이 녹아내려 거칠고 쉰 음성이 됐다.

최근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만난 작가는 "물감 자국 없이 염색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공장에 들어갔다. 1m가 100만원에 팔리는 비싼 옷감을 염색했다. 주로 명품 브랜드나 의상실에 납품했다"고 말했다. 요즘은 천연 염색 재료를 찾아 서울 제기동 경동시장을 누빈다. 색이 잘 우러나오는 치자, 구기자, 선인장 가루, 백반 등을 사온다.

그는 "자연스러운 색을 내기 위해 티백이나 커피로 한지를 물들이기도 한다"며 "같은 재료를 반복적으로 쓰지 않기에 모든 작품 색깔이 다르다"고 말했다. 2011년 이후 7년 만에 여는 개인전에 걸린 최근작들이 유난히 화사하다. 그 이유를 묻자 작가는 "나이가 들면서 색이 부드러워지고,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예쁜 컬러를 많이 쓴다"며 "7년 전 삶이 지금과 다르듯 색도 많이 달라졌다"고 답했다. 이번 개인전에는 1970년대 추상평면 회화 작품도 걸려 있다. 어둡고 강렬한 색상이 압도적으로 펼쳐졌다. 한지로 감싼 삼각 오브제를 붙인 입체화 '집합' 시리즈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미국 유학 후 그만의 독창성을 고민하면서 구상하게 됐다. "페인팅(회화)은 서양 사람들을 흉내내는 것 아닌가라는 회의가 들었어요. 한국에 와서 내 뿌리를 생각했고, 과연 내 조상들은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해서 민속박물관을 돌아다녔죠. 오래된 책 한지에서 옛사람들 목소리를 느꼈어요. 100년 된 고서로 싸는 이유는 내 손에 오기까지 100년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민족혼과 정신을 싸서 돌연변이 식으로 독특한 예술로 만들어냈어요. 우리나라 보자기 문화를 반영했죠."

유년 시절 자주 들렀던 큰할아버지 한약방에서 영감을 받아 삼각 오브제들을 약봉지처럼 싸게 됐다. 작가는 "정성 들여 약봉지를 싸서 환자들에게 줬을 때 '감사합니다'며 받아가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소중한 약봉지를 예술로 승화시킨 셈"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고서 1만권을 투입해 작품을 만들었으며, 경기도 판교 연구실에 2만권을 보관해놨다. 작가는 "1만권으로 작업을 하고 나니 지금은 우리 조상들 삶이 많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그의 작품은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미국 얼드리치 현대미술관, 뉴욕 로버트 밀러 갤러리, 런던 애널리 주다 파인 아트, 브뤼셀 보고시앙 재단, 도쿄 모리 아트센터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오는 9월에는 한국 작가 최초로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지난해 벨기에 보고시안재단의 유서 깊은 미술관인 빌라 엉팡에서 그의 개인전을 기획한 미국 유명 큐레이터 아사드 라자가 이날 전시장을 방문했다. 라자는 "이런 종류의 작업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닌 개인 같은 조각들이 모여 통일성 있는 전체를 이룬다"고 극찬했다. 전시는 6월 5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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